이상함을 발견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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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모임은 더 이상 고지능자 협회와는 무관합니다. 그래서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서 고지능자임을 입증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만, 상위 2%라는 것에 그리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가 싶습니다. 그 정도 비율이라면 영재나 수재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50명 정도가 모이면 그 안에서 한 명 정도는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요.
상위 1%라고 하더라도 무작위로 백 명이 모이면 그중에 한 명 정도 있다는 것인데, 그 사람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영재의 이미지에 들어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건 심지어 천명 중 한 명, 만 명 중 한 명으로 비율을 줄여봐도 비슷합니다. 올림픽 주 경기장의 좌석수가 대략 6만 석인데, 만 명 중 한 명이 영재라면 거기에 영재가 6명이나 있다는 뜻이니까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영재라고 보기에는 너무 흔합니다.
그런데 만 명 중 한 명이라면 0.01%입니다. 비율로 보면 아주 희소해 보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이 정도라도 그다지 드문 경우가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상위 몇 퍼센트라는 것이 그다지 희소함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아마도 여기서 활동하는 분들도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도 서로의 지능지수에 관심이 없으니까요. 그런 수치보다 훨씬 중요한 건, 이상한 점을 발견해 내고, 그걸 설명해 내는 가설을 꾸밀 수 있는가입니다.
사실상 지능지수란 이런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계기판 같은 거니까요. ‘계기판에 기재된 최고 속력’과 ‘실제 달리는 속력’ 중에 중요한 건 역시 달리는 속력이겠죠.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달리는 속력보다도 ‘달리고 있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게 바로 모임의 활동이니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지능을 자랑하는 건, 한 번도 달려 본 적 없는 스포츠카의 계기판을 닦으면서 흐뭇해하는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모임에서 활동을 하면서 느낀 점은, 이 활동을 하면 할수록 ‘이상한 점을 발견하는 능력’과 ‘가설을 세우는 능력’이 점차 좋아진다는 겁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죠. 달리기를 하면 달리기가 늘고 수영을 하면 수영 실력이 좋아지니까요. 우리의 운동능력이 육체에 쌓이는 것처럼, 정신능력도 육체에 쌓입니다. 다만 보이냐 보이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네요. 팔의 근육세포가 발달하는 것처럼, 뇌의 신경세포도 분명히 발달합니다.
그러니 미리 움츠러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모임이 고지능자 협회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알게 된 어떤 경향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관찰에 따르면, 지능이 높을수록 기존의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설 속으로 적극적으로 들어가 탐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쩌면 언제든지 자신의 원래 울타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도 해봅니다.
반면에 지능이 낮을수록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사고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어려워하는 것이죠. 즉 사고의 경직도가 높을수록 저지능일 경향성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는 것도 적극적인 탐색이라서 여기의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이상한 점을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저 수용하게 되죠. 일단, 알고 있던 사실과 알게 된 사실이 충돌된다는 걸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이상함을 발견하는 첫 단계입니다.
이때,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기계적으로 배척하지 않으려고 시도해야 합니다. 내가 맞다는 생각을 밀어둬야 한다는 것이죠. 이 태도가 사고를 유연하게 만드는 것이고, 경직성을 낮추는 방법입니다.
경직성을 조금 낮추기만 해도 세상이 이전에 보던 것과는 많이 달라 보입니다. “관상은 과학이다.” - 이 말은 대개 조롱처럼 쓰입니다. 좋지 못한 언행을 하는 이들이 비슷하게 생겼다는 식의 풍자죠. 사실 관상학은 과학이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경험적으로 어느 정도 수긍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마흔이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하는 이야기와 맥이 닿아있기도 합니다.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관상학은 과학이 아니다’와 ‘사람들은 관상에 대해 수긍하는 경향이 있다’라는 두 사실이 충돌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만약 ‘무저항 수용’의 태도라면 관상이 과학적으로 분석된 적은 없어도 오랜 시간의 관찰을 통해 통계적 사실을 알려주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관상을 수긍하는 것을 납득하고 넘어갈 것입니다. ‘적극적 검토’를 하기 전에 두 사실의 충돌을 무마하는 것이죠.
바로 이때, 자신이 충돌을 무마하려 한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합니다. 이 자각이 있어야 충돌이 흐려지지 않고, 오히려 또렷해집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두 사실을 연결하여 ‘관상학이 과학이 아닌데, 왜 사람들은 일정 정도 수긍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비로소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이 당연함에 균열을 냅니다. 세상은 당연히 이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상함을 발견할 수 있을 때만, 이상해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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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글의 모든 등장인물, 사건은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