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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은 과학이다’를 이해하는 법

이상한 점을 납득시킨다는 것

by 푸른알약

[<-1화​]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눈을 반짝이시는 걸 보니, 세상의 '당연함' 속에서 '이상함'을 발견하는 예리한 눈을 가지신 것 같군요. 하지만, 그 발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자신이 발견한 그 '이상한 점'을 다른 회원에게 납득시키는 일입니다. 발견이 세상의 당연함에 균열을 내는 날카로운 칼을 찾는 과정이었다면, 납득 과정은 그 칼날을 구체적인 논리로 예리하게 세우는 일이니까요.


“관상이 과학이 아닌데, 왜 사람들은 일정 정도 수긍을 하는가?”하는 질문으로 돌아가보죠. 먼저 얼굴의 외형에 영향을 주는 구성 부분을 나누어보면 골격, 근육, 피하지방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관상학이 과학적 분류라면 골격과 근육의 형태에 영향을 주는 특정 유전자가 성격과 기질에도 일정 정도의 영향을 끼친 결과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죠.


하지만 관상학이 유전학 확립 이전에도 성행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 애초에 유전학적 분류 체계를 담고 있었을 리는 없을 겁니다. 허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을 법합니다. '관상학이 유전학적 기반은 없지만, 오랜 관찰을 통해 유전형의 발현을 통계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고 말이죠.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유전적 발현은 어린 시절의 얼굴에서부터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또한 사람의 외형은 나이를 먹으면 어느 정도 변합니다. 따라서 유전학적 표현형은 아동의 얼굴에서 더 쉽게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해오는 관상학 서적에 나오는 얼굴은 모두 어른의 얼굴이고, 정작 아이들의 얼굴은 본 기억이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무척 이상한 것이죠. ’왜 전통 관상 서적에는 아이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가?‘ 하는 의문을 곱씹다 보면, ‘혹시 관상학이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관점의 지식은 아닌가?’ 하는 가능성을 타진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혹시 관상이란, 타고난 모습이 아니라, 살아가며 변화하는 얼굴에 대한 설명인가?’하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이 지점에 이르면, "사람이 마흔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링컨의 말이, 사실은 같은 맥락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즉, 관상학의 진짜 정체는 후천적 얼굴형 변화에 대한 경험적 지식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아이들의 얼굴이 관상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죠.


이 의구심을 품고 자료를 찾아보면, 동양 관상학의 시초 격이라 할 수 있는 송나라의 ‘마의상법’에 “(관)상이란 세월이 쌓여야 드러나는 것”이라고 언급되어 있으며, 이어지는 명나라의 ‘신상전편’에는 “동안은 아직 성정이 고정되지 않아 상을 보기 어렵다.”라고 기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후의 당나라의 ‘태청신감’, 위진남북조 시대의 ‘관상론’, 조선시대의 ‘관상신서‘, ‘인상편’, ‘상법정종‘ 등에서도 아동의 얼굴은 찾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상학’에서도 성인, 그중에 남성을 위주로 분석하고 있으며, 라바터의 ‘관상학’에서는 아동은 대상이 아님을 정면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된 문헌에서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관상 분석의 대상이 최소 20세, 주요 분석 연령은 30~50세이며, 관상의 판단 적기가 40세 이후임이 빈번하게 언급됩니다. 전통적 관상 서적의 그 어디에도 어린이의 관상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이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전통적인 관상학에서 말해주는 것은 얼굴형이 기질과 성격을 결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기질과 성격이 얼굴에 반영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런 얼굴형은 포악한 성품을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포악한 성품으로 살면 이런 얼굴형이 된다“는 설명서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관상이 과학이 아닌데, 왜 사람들은 일정 정도 수긍을 하는가?”가 아니라, ”기질과 성격이 살아가면서 얼굴에 반영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수긍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더 나아가, “사람의 기질과 성격은 살아가면서 실제로 얼굴에 반영되는가?” 하는 것이 핵심 질문이 됩니다.


어떻습니까? 이상한 점을 들여다보고 구체화시키다 보니 어느새 완전히 다른 국면이 되었네요. 그런데 이것은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헝클어진 실타래 밖에서 한쪽 끝을 찾아내는 것이 이상한 점을 발견하는 것이라면, 질문을 구체화한다는 것은 발견한 실타래의 한쪽 끝을 손에 쥐고서 뒤엉킨 실뭉치 속으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앞을 헤치며 반대편 끝으로 따라가는 일이기 때문이죠.


실의 한쪽 끝을 단단히 잡고,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봅시다. 우리는 사람의 기질과 성격을 어떻게 알 수 있죠? 관상이 말하는 ‘사람의 성품이 간악하다 또는 선량하다’하는 것을 무엇을 보고 판단하냐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시기, 질투, 분노의 감정을 자주 표현하면 간악한 성품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즉, 성품이란 살아가면서 주로 품고, 드러내는 감정이 어떤 것이냐에 의해 판단됩니다. 이때, 감정을 표출하는 주된 방법이 표정과 목소리입니다.


외국에 여행을 나갔다고 해보죠. 낮에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현지 사람들을 만날 겁니다. 그런데 그 나라의 언어를 몰라서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데도 표정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다는 걸 깨닫습니다. 우리는 표정만 보고서도 감정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특정 감정을 표현하는 보편적인 표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크루지 이야기를 몰라도 삽화만 보면 스크루지의 감정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저녁 무렵에 외국의 전통민요 공연을 관람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가슴이 아려오는 노래를 들으며 문득 알게 되는 것은 그 노래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하는데도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감정을 솟구치게 만드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목소리 자체입니다. 우리는 감정을 목소리의 음색, 음조에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심지어 바이올린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데도 우리의 심금을 울릴 수 있죠.


그런데 음색과 음조는 안면근육과 아주 긴밀한 관련성이 있습니다. 목소리를 내는 성대는 인대의 일종이라서 우리가 의지대로 조작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성대 주변의 근육을 움직여서 성대를 조절해야 하는데, 이 근육도 불수의근이라서 직접 조작이 되지 않습니다. 결국 인대 주변 근육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 근육과 신경이 연결된 얼굴 각부의 근육을 움직여서 특정 음색, 음질, 음정을 만들어냅니다. 이것이 개그맨이 성대모사를 할 때 그 사람의 표정까지 따라 하는 이유이며, 성악가가 특정 음계를 발성하기 위해 특정 방법으로 얼굴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이유입니다.


즉, 특정한 목소리를 내거나, 특정한 표정을 짓기 위해서는 특정한 안면 근육을 사용해야 합니다. 따라서 특정 감정을 목소리와 표정을 통해 반복적으로 표출하면 특정 근육이 발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로 드러낸 감정은 표정으로 현출 되면서 특정 얼굴 근육의 발달에 영향을 주어 외관상 도드라져 보이며, 그 근육의 반복적 사용은 안면의 피부에 주름으로 켜켜이 쌓이게 됩니다.


또한 자신의 통제력이 가장 긴밀하게 작용하는 것이 식습관과 행동 패턴이므로 체형과 얼굴의 피하지방도에 직접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따라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가 체형과 얼굴에 나이테처럼 남게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사람의 기질과 성격이 살아가면서 실제로 얼굴에 반영된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프랑스 작가인 오노레 드 발자크가 "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풍경이다. 한 권의 책이다. 얼굴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고 그렇게 단호하게 말했던 것은 그가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하게 만듭니다..


물론 지금 들으신 이 가설은, 저희 모임의 공식적인 '덕트멘터리'는 아닙니다. 아직 소모임에서 발제조차 되지 않은, 제가 개인적으로 '관상은 과학'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 약간 다듬어 본 생각일 뿐이죠. 제가 참여하고 있는 소모임에서 요즘 한참 논의 중인 가설은 따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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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글의 모든 등장인물, 사건은 픽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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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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