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모르지만 시인 예찬
글을 업으로 삼는 이들을 우리는 ‘작가’라 부른다. 작가는 다시 소설가, 수필가, 시인, 극작가, 방송작가, 시나리오 작가, 평론가, 카피라이터 등으로 나뉜다. 이렇게 나만의 언어로 세상을 해석하고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직업 중 가장 극한 직업은 역시 시인이 아닐까.
시인은 압축된 문장 속에서 대중의 감정과 자신의 독창성을 동시에 드러내야 한다. 본질적으로 ‘공감’이라는 대중성과 ‘개성’이라는 독창성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직업이다. 시가 독자에게 가치를 가지려면, 시인의 사적인 언어가 보편적 감정과 이어져야 한다. 동시에 그 감정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느냐가 시인의 존재 이유가 된다.
우리가 사랑하는 시는 언제나 대중적인 주제를 독창적인 방식으로 다룬 시다. 대중성만 좇으면 흔하고 뻔한 시가 되고, 독창성만 추구하면 난해해져 독자와 멀어진다. 이 두 축의 균형이 무너질 때 시는 예술성과 독자성을 잃는다.
이런 균형의 문제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이상 시인의 <오감도>다. “제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라는 문장이 숫자만 달리하며 반복되는 이 시는, 내가 읽은 시 중 가장 난해했다. 이상 시인은 독창성을 극단까지 밀어붙여 형식적 한계를 넘어섰지만, 그만큼 당시 독자들과는 멀어졌다. 그의 시는 대중적 공감보다는 문학사적 혁신에 방점을 둔 작품이었다.
이처럼 독창적인 시 앞에서 나 역시 시와 점점 거리가 생겼다. 시가 어렵다는 이유로, 혹은 내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나는 시와 멀어졌다. 그런데 이번 주 독서 모임에서 읽은 박웅현 작가의 <천천히 다정하게> 덕분에 그 거리가 한층 가까워졌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카피라이터인 저자가 사랑하는 시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하면서 첫 페이지를 펼쳤다. 저자는 김사인 시인의 말을 빌려 시는 글자로 읽는 것이 아니라 내 몸 크기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종이 위의 시를 ‘등신대’처럼 세우듯 내 감정을 시 안으로 밀어 넣어 읽으니, 시는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책 제목처럼, 시는 천천히, 그리고 다정하게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시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일상이 새롭게 보였다. 시인의 관점이 우리 안에 차곡차곡 쌓이면, 평범한 하루 속에서도 예술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가을 낙엽에도 감사하는 시인의 마음은 얼마나 풍요로운가. 시인은 비물질적 세계에 사는 백만장자다.
묘사,
일시적인 것에 대한 연민,
소멸적인 것에 대한 구원
— 밀란 쿤데라
쿤데라의 말처럼 묘사는 찰나를 붙잡아 영원으로 만드는 힘을 가진다. 사라지는 순간을 시인이 정제된 언어로 붙잡는 순간, 그 찰나는 독자의 마음속에서 반복해 살아난다. 시는 소멸하는 것을 다시 살려내는 구원의 언어다.
꽃, 나무, 바람, 별, 달, 해, 구름, 하늘….
시인들이 자연을 사랑하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자연을 누리는 일이 밥벌이와 직접 연결되지 않아 무용하다고 생각하지만, 시인에게 자연은, 잊고 있던 본질을 드러내는 영감의 원천이다. 시인은 자연을 관조하고, 그 관조를 언어로 승화시키는 존재다.
결국 시인들이 자연을 묘사하고 독특한 시선을 펼쳐 보이는 이유는 그 안에 인생을 담기 위해서다. 인간의 삶과 진리를 포착해 언어로 영속화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깨달음을 얻는다. 시는 문학 장르를 넘어 삶을 응축하고 해석하는 하나의 사유 방식이다. 시는 감정으로 빚은 철학이며, 시인은 정서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철학자다.
한 주 동안 여러 시를 읽으며 감동하다 보니, 자연스레 ‘시인 예찬문’이 되었다. 결국 시인은 사람과 자연을 재료로 삼아, 정제된 언어와 섬세한 묘사라는 도구로, 인생이라는 음식을 ‘시’라는 그릇에 담아 우리에게 건네고 있었다. 시인이 요리한 인생에서 삶의 진미를 발견하며, 내 인생을 음미하고 싶다. 더 천천히 다정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