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바라보는 순간, 시간은 잠시 멈춘다.
일출의 황홀한 순간부터 태양이 높아져 윤슬이 반짝이는 한낮, 그리고 온 세상을 금빛으로 물들이며 사라지는 일몰까지. 해무가 감싸는 바다도, 눈을 품은 겨울 바다도, 폭풍 속 거칠게 일렁이는 바다도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다. 바다는 그렇게 매 순간 아름답다.
바다의 아름다움은 거리를 둔 여백 속에서만 느낄 수 있다. 바다에 가까이 다가설수록, 우리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다. 차가운 물결은 체온을 서서히 빼앗고, 깊고 어두운 심해는 우리를 집어삼킬 듯하며, 거친 파도는 마음과 몸을 흔들어 놓는다.
인생이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듯, 바다도 그러하다. 우리의 인생과 바다는 닮아있다. 인생의 중간 항로에 선 나에게 자서전 쓰기 프로그램은 지나온 항로를 점검하고 나를 다시 바라보는 기회를 주었다. 나의 몸에 조심스레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감정에도 집중해 보았다. 기억 속에 없는 나 자신의 탄생 순간을 상상해보기도 하고, 세상에서 하나뿐인 인생 연대표를 작성해 보기도 했다. 인생의 그늘진 순간을 담담히 떠올리며 그 속에서 나를 지켜주던 사랑을 찾기도 했고, 내 인생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기 위해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기도 했다. 한 편의 영화처럼 8살의 나를 만나 대화도 나눠보고, 꿈꾸던 노년의 삶을 살아가는 미래의 나에게 기분 좋은 편지 한 통도 받아 보았다.
그 여정 속 감정들은 바다의 표정처럼 다양했다. 어린 시절의 연약함, 사춘기의 외로움, 청춘의 아쉬움이 있었다, 첫사랑의 설렘과 뱃속에 품었던 아기들을 만나는 기쁨도 있었다. 갑작스러운 병으로 슬픔이 드리웠던 시간도 있었고, 새로운 길을 발견하며 품었던 기대도 있었다. 독서 모임 속에서는 마음의 불안을 가라앉히고 평온을 느꼈다.
그 모든 감정 뒤에는 늘 얼굴들이 있었다. 어린 시절 나약함 뒤에는 나를 보듬어준 엄마의 얼굴이, 사춘기의 외로움 뒤엔 내 맘과 같지 않았던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청춘을 살아가는 딸아이의 얼굴에서 내 청춘의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고, 두근두근 설레던 첫사랑의 얼굴에서 끝 사랑의 얼굴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품에 안았던 아이들은 어느새 내가 올려다보아야 하는 얼굴이 되었다. 슬픔으로 물든 시간 뒤에는 내 곁을 든든하게 지켜준 남편의 얼굴이 있었고, 나의 변화된 삶에 기대해 주고 격려해 주는 지인들의 얼굴도 있었다. 마음의 평온함을 찾아준 독서 모임 뒤에는 여러 선배님의 선한 얼굴이 보였다.
인생은 되돌릴 수 없는 항해다. 끝을 알 수 없는 바다에서, 우리는 자신이라는 배의 단 한 명의 선장이 되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그 여정에서 만난 얼굴들 덕분에 나의 항해는 외롭지 않았다. 때로는 말없이 건네는 손길이 힘이 되었고, 가만히 곁을 지켜주는 존재가 항해의 날들을 단단하게 채워주었다. 누군가는 바람이 되어 돛을 밀어주었고, 누군가는 잔잔한 물결이 되어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그 소중한 동행들 덕분에, 내 바다는 언제나 외로움보다 온기가 더 많았다.
태풍이 한 번도 불지 않는 바다는 생명의 힘을 잃는다고 한다. 태풍이 없는 바다는 잔잔하고 평온해 보이지만, 바닷속 뜨거워진 물결은 더 뜨거워지고, 영양분은 갇혀 생명들은 서서히 힘을 잃는다. 거친 바람이 물을 뒤흔들어야 깊은 곳의 차가운 물과 풍부한 영양이 떠올라, 바다는 다시 숨을 쉰다.
나의 삶도 그러했다. 30대에 암이라는 태풍이 찾아왔고, 몸과 마음은 깊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슬픔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집 밖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고, 평소처럼 행동하려 했다. 아픔을 인정하는 순간 무너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걱정 어린 시선과 따뜻한 위로조차 견디기 어려워, 나는 조용히 세상에서 한발 물러나 스스로를 철저히 고립시켰다. 그 시기, 말없이 곁을 지키는 사람이 있었다. 남편이었다. 차갑고 어두운 물결 속에서 헤매던 나를 그는 묵묵히 잡아주었고, 그의 온기가 다시 숨을 고르고 수면 위로 떠오를 힘을 만들어주었다.
우리는 종종 변화와 흔들림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 거친 순간들이 마음의 바닥을 뒤집고, 닿지 않았던 숨결을 끌어올린다. 태풍이 지나간 바다가 더 깊어지듯, 시련을 통과한 인생도 이전보다 넓고 깊어진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는 건, 다시 살아갈 힘이 깨어난다는 신호라는 것을.
거센 바람도, 잔잔한 바람도 결국 나를 이곳까지 데려왔다. 바람은 파도를 일으키고, 인생은 그 파도 위를 오르내리며 나아간다.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는 바다처럼 오르내리는 인생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나의 항로다. 앞으로도 나는 이 배를 믿고, 나 자신을 믿으며, 또 다른 지평선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