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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그리고 <이반 일리치의 죽음>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질문,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

by 박소형

책은 언제나 나를 유혹한다.

작가의 이름으로, 근사한 제목으로, 혹은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표지로. 때로는 책이 지닌 물리적인 두께감마저도 선택의 이유가 된다. 천 쪽이 훌쩍 넘는 압도적인 벽돌 책을 마주하는 순간, 저 책을 완독하고 나면 나 또한 그 두께만큼 더 단단해져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며 호기롭게 책을 집어 든다. 그러나 완독의 과정은 언제나 녹록지 않다. 읽어도 줄지 않는 쪽수를 바라보며 내용보다 내가 얼마나 읽었는지를 더 의식한 채 꾸역꾸역 페이지를 넘기는, 처음과는 사뭇 달라진 비루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1144쪽의 <나폴레옹>과 1088쪽의 단테의 <신곡>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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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번에 읽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달랐다.

1048쪽에 달하는 이 책은 마치 블랙홀처럼 나를 끌어당겼고,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읽게 만들었다. 각 장의 끝마다 막장 드라마의 예고편처럼 새로운 사건을 던져놓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치밀한 구성과 필력, 그리고 1860년대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2025년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독자의 감각으로 끌어와 준 번역가의 노력이 더해져, 이 벽돌 책은 부담이 아니라 즐거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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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나자 문득 작년 독서 모임에서 읽었던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떠올랐다. 독서 모임에서 읽은 책들은 대개 서평으로 남겨두는데, 유독 이 작품만은 그냥 흘려보냈던 기억이 있어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 러시아 문학의 두 거장,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삶과 작품을 함께 비교해 정리한다면 더 풍성한 글쓰기가 되리라는 생각에,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이 유난히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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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는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성장 배경과 경제적 조건, 그리고 인생을 뒤흔든 결정적 사건들은 극명하게 달랐다. 그리고 이 삶의 궤적은 그들의 작품 세계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하급 귀족 출신이었으나 평생 가난에 시달렸다. 빈민 병원의 의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사회의 밑바닥을 가까이에서 목격하며 성장했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도박 빚에 쫓겨 원고료를 선불로 받아가며 글을 써야 했다. 그 결과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돈 문제에 시달리고, 심리적으로 벼랑 끝에 몰려 있다.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 역시 예외가 아니다.



반면 톨스토이는 유서 깊은 백작 가문의 대지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었지만, 광활한 영지와 풍족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이러한 조건은 그가 개인의 삶을 넘어 사회 전체의 구조를 조망하는 거대한 서사를 써낼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풍요 속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질문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그의 단편 제목처럼, 인간 삶의 본질에 대한 물음은 그의 작품 전반을 관통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성공한 인물이 죽음 앞에서 비로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는 과정은, 풍족한 삶을 살았던 톨스토이 자신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도스토예프스키.jpg 도스토예프스키 초상화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사건은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인색했던 아버지가 농노들에게 살해당한 사건은 <죄와 벌>에서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살해하는 설정의 직접적인 영감이 되었다. 더 나아가 청년 시절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 직전 황제의 특사로 감형되어 시베리아 유형을 겪은 경험은 그의 작품 세계를 결정지었다. 죽음 직전의 체험은 인간의 극단적 심리 상태와 신앙을 통한 구원이라는 테마로 발전했고, 이는 라스콜니코프의 내면 묘사와 유형지의 장면들에 깊이 스며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인간의 광기와 어둠을 끝까지 파헤칠 수 있었던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톨스토이 역시 청년 시절 장교로 복무하며 코카서스 전쟁과 크림 전쟁을 직접 경험했다. 전쟁터에서 마주한 죽음은 그에게 현실과 생명의 무게를 가르쳤고, 이는 <전쟁과 평화>와 같은 사실주의 문학의 정점으로 이어졌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주인공의 모습 역시 이러한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톨스토이 초상화.png 톨스토이 초상화


두 작품 속으로 더 들어가 보면,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의 지적 오만함을 증명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 그는 스스로를 고립시키지만, 결국 소냐와 신 앞에 무릎을 꿇으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범죄 이후의 심리적 지옥을 집요하게 묘사하면서, 인간이 밑바닥에서 다시 위로 향하는 부활의 과정을 그려낸다.



반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주인공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판사로, 누구의 눈에도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죽음이 다가오자 그가 쌓아온 명성, 인맥, 재산이 모두 허위였음을 깨닫는다. 톨스토이는 사회적 가면이 벗겨지는 몰락을 통해, 오히려 죽음의 순간에 도달하는 영적인 깨달음을 보여준다. 이는 <죄와 벌>과 정반대로, 정점에서 밑바닥으로 내려가며 진실에 도달하는 서사다.


구원의 방식 또한 흥미롭다.

<죄와 벌>에서 구원은 고통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인정하고 고난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라스콜니코프는 소냐를 통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시베리아 유형이라는 고통을 감내하며 정화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이반 일리치는 하인 게라심과 아들의 진심 어린 연민을 통해 처음으로 타인을 향한 공감을 배운다.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더 이상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라고 외치는 마지막 순간, 그는 사회적 허위에서 벗어나 참된 평화에 이르며 부활한다.


결국 두 작품은 모두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범죄와 신앙을 통해 인간 영혼의 극한을 시험했고, 톨스토이는 일상과 죽음을 통해 삶의 본질을 성찰했다. <죄와 벌>이 인간의 오만을 꺾는 이야기라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치열한 반성의 기록일 것이다. 앞으로 알 수 없는 인간의 내면을 끝까지 파헤치고 싶을 때는 도스토예프스키를, 내 삶의 방향을 점검하고 싶은 순간에는 톨스토이를 찾게 될 것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길 위에서, 결국 같은 질문을 나에게 던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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