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향한 비행, 본질에 대한 깨달음
어느 날, 새를 좋아하는 아들이 높은 건물 옥상 위 뾰족한 철 구조물에 앉아있는 새를 찍어 보여준 적이 있다. 그 순간 문득 새들에게도 고소공포증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찾아보니, 새 역시 처음 날아오를 때는 경험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점이 흥미로워 그림책 수업에서 새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구상하게 되었다. 이야기에 어울리는 글과 그림을 준비하기 위해 참고할 책을 찾던 중, 다양한 비행의 모습과 새의 내면을 담은 <갈매기의 꿈>을 다시 펼치게 되었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
이 문장은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한 번쯤 들어봤을 만큼 유명하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을 남들보다 노력해 성공하라는 메시지를 담은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큰 기대 없이 읽기 시작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색채가 짙어지며 전혀 다른 깊이가 드러났다. 새롭게 추가된 4장까지 읽고 나니, 이 책은 카프카의 표현처럼 내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처럼 다가왔다.
이번에는 전에 보이지 않던 조나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먹이보다 비행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실패에 좌절하면서도 다시 도전하며, 자신의 길에 확신을 갖지 못해 갈등하는 모습. 그리고 그런 그를 걱정하는 부모의 시선까지. 조나단이 삶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은 우리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침내 천상계에 도달한 조나단은 챙과 설리번이라는 스승을 만나 완벽에 가까운 비행을 익힌다. 이후 자신을 추방했던 지상으로 돌아와 제자들에게 진실을 전하고, 가르침을 통해 사랑을 나눈다. 마치 예수나 부처가 그랬던 것처럼.
조나단은 결국 제자 플레처에게 공동체를 맡기고 빛 속으로 사라진다. 그의 놀라운 능력과 사랑은 다른 갈매기들에게 신화가 된다. 그러나 갈매기들은 반복과 인내가 필요한 연습 대신 조나단을 숭배하며, 그를 자신들과 다른 존재로 구분 짓는다. 이는 자신들의 실패를 정당화하기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어떤 종교든 이러한 함정에서 완전히 자유롭기 어렵다. 성자의 가르침보다 절차와 의식이 앞서는 종교계의 현실이 그렇다.
이런 흐름에 문제를 제기하는 갈매기가 바로 앤서니다. 그는 조나단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의례와 형식을 거부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삶을 끝내기 위해 죽음의 강하를 시도한다. 그 순간 아름답게 비행하는 조나단과 마주하며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앤서니는 또 다른 조나단이자, 나에게는 법정 스님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종교의 틀을 넘어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며 보여준 사랑과 절제는 본질로 향하는 길이다. 모든 얽힘에서 벗어난 자유가 해탈이라면, 의식을 거부하고 자신에게 정직해지려는 앤서니의 비행 또한 하나의 해탈일지 모른다.
날카로운 면도날은 밟고 가기 어렵나니,
현자가 이르기를 구원을 얻는 길
또한 이같이 어려우니라.
— 우파니샤드
<무소유> p.82
자유를 향한 조나단의 비행과 구원을 향한 수행자의 길은 결국 본질을 깨닫기 위한 같은 통로였다. 그 깨달음은 책 속에서만 머무는 사유가 아니라, 나의 삶 속에서 다시 질문이 되고 선택이 되었다.
<갈매기의 꿈>에서 시작된 나의 그림책 작업 역시 지루한 반복과 연습, 표현의 한계, 시간의 압박, 육체적 고통을 지나 비로소 하나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받은 도움과 시간은 단순한 결과 이상의 의미로 남아 있다. 공모전의 성패와 무관하게 이 이야기는 이미 나에게 충분한 완성이다. 가장 높이 날지 못하더라도, 한 번의 작은 날갯짓이 누군가의 마음에 닿아 잠시라도 용기와 위로가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결국 높이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어떤 방향을 향해 날고 있는지 아는 일이다.
된다!
“음, 당연히 되지, 존.
자신이 무얼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 때는
언제나 된다네.”
<갈매기의 꿈> p.72
챙이 조나단에게 건넨 이 말은 마치 지금의 나에게 들려주는 문장처럼 다가온다. 나의 방향을 잊지 않는다면, 비행의 속도나 높이는 중요하지 않다. 그 믿음이 오늘의 나를 다시 날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