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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 Oct 24. 2017

법환포구에 서서

제주일기

[제주일기]
2017. 7. 30. 
4. 법환포구에 서서
 



  집에서 조금 걸어 나가면 나타나는 바다. 제주살이에서 가장 기대한 부분이었다. 조금 아니고 꽤 많이 걸어야 하지만 법환포구가 가까이에 있었다. 심심하면 나가서 바다를 봤다. 법환마을은 잠녀마을로 해녀가 가장 많은 마을이라고 한다. 바닷가 근처에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예나 지금이나 역시 집은 일터와 가까운 게 좋구나 싶었다.


담장에 자라는 잡초는 선인장 

산책하면서 만난 늙은 말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우면 습관처럼 생각하곤 했다. 냉동인간처럼 전부 멈췄으면 좋겠다고. 인간관계도, 일도 전부 멈추고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고 싶다고. 위장에서 음식물이 사라져 배가 고파지는 것도 멈췄으면 좋겠다고. 실제로 가능하지 않을까. 조금의 노력이 들겠지만. 숨 쉬지 않고 밥 먹지 않으려면 죽으면 된다. 하지만 죽으려면 큰 노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삶을 멈추는 건 어떨까. 아무도 안 만나고 아무 일도 안 하고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공백기, 아무것도 아닌 시기, 멈춘 시기, 시간이 진공으로 사라진 시기.


  제주생활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삶에서 나를 지워버리고 싶어서. 이유와 목적, 미래 따위 어찌 되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리라. 그렇게 법환포구에 섰다.



  방파제와 작은 등대, 배들이 드나드는 포구. 검은 현무암으로 뒤덮인 바닷가. 바다는 맑은 날에는 찰랑찰랑 왈츠를 추듯 우아하지만 흐린 날에는 집채만 한 입을 벌려 성난 울음을 터뜨린다. 찌푸린 날, 바람이 심상치 않았고 파도도 더 크게 몰려왔다. ‘바다’ 하면 항상 그대로 있는 고정된 무언가를 떠올렸는데, 아니었다. 바다가 멈췄으면 싶었다. 뒤따르는 의문. 바람과 조류, 바다 전체를 움직이는 거대한 흐름을 잠시 아주 잠깐이라도 멈출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가둬 놓은 물이 아니니 바다에 멈춤은 없다. 잠잠한 바다라도 미미한 움직임은 계속된다. 대기의 움직임으로 이는 바람, 구름, 거대한 조류와 물살, 파도. 어느 것 하나 멈춤은 없다. 나무와 바위조차 저마다의 움직임을 가지고 있다. 다양한 리듬으로 움직이는. 자연은 고정된 무언가가 아니라 흐름이었다.



  먼 바다에서부터 일어나 엄청난 높이와 속도로 해안을 강타하는 파도. 아무리 무서워해봤자 이 파도를 멈추게 할 수는 없다. 파도의 흐름을 잘 타는 것만이 있을 뿐. 박자를 못 맞추면 코와 입으로 물이 들어와 금방이라도 빠져 죽을 것 같다. 그 순간 공포가 몰려온다. 하지만 흐름을 잘 타면 재미있고 신난다. 마음대로 파도를 가지고 놀 수 있는 방법도 터득해 이것저것 해볼 수 있다. 그럴 때면 뿌듯함으로 가득 찬다.


  죽음 외에 삶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죽음조차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 금방이라도 빠져 죽을 것 같이 불안한 시기에는 괜찮다고 다독일 수밖에 없다. 무서움이 가실 때까지 파도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파도를 즐길 수 있을 때가 올 것이다. 두려움과 즐거움, 지루함과 안도. 감정도 시시각각 변하고 삶도 그렇게 흘러간다. 멈춰있는 것이 아니다. 굉음을 내는 파도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왔다.




2017. 7. 30.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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