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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 Oct 24. 2017

흙탕물이 된 표선

제주일기

[제주일기] 

2017. 07. 31.

5. 흙탕물이 된 표선 



  제주 동부에 호우경보라는 재난안내문자가 왔다. 새벽부터 퍼붓던 비가 잦아들고 있어 비가 멈출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나니 역시 해가 쨍쨍 났다. 표선 해수욕장에 가보기로 했다.


  701번 동일주 버스를 타고 한참 가고 있는데 위미항을 지나면서 차츰 흐려지더니 남원에 들어서자 빗물이 창문을 때리기 시작했다. 제주의 날씨는 종잡을 수 없다. 제발 지나가는 소나기이길, 표선에는 비가 오지 않길. 열심히 기도했지만, 내려야 할 곳에 가까워질수록 그칠 줄 모르고 거세졌다. 표선초등학교 정류장. 우산이 없었다. 내리지 말고 그대로 버스 안에 있어야하나 고민을 했지만 별로 안 좋은 생각인 것 같았다. 10초 안에 속옷까지 쫄딱 젖을 세찬 폭우. 정류장에 덩그러니 서서 우산을 살 수 있는 편의점이나 슈퍼를 찾아봤다. 적어도 10분 거리에 있었다. 가는 동안 다 젖을 텐데 그 때 우산이 무슨 소용일까.


  반대편 정류장에서 다시 집 가는 버스를 탈까 고민을 했다. 하지만 한 시간이나 버스 타고 온 게 아까웠다. 계속 정류장에 서 있기가 뭐해서 일단 해변 근처 카페로 가야겠다 싶었다. 가져온 겉옷을 뒤집어쓰고 조심스럽게 뛰었다. 가다가 처마 밑이 넉넉한 집을 발견했다. 처마 밑으로 쏙 들어가 빗물을 털고 한 숨을 돌렸다. 바다에서 정말 가까운 집이어서 표선 해수욕장이 배꼼 보였다. 집 주인에게 우산을 빌려서 편의점까지만 쓰고 돌려드릴까, 카페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뛰어갈까. 별별 생각이 다 드는 순간,

  번쩍, 우르르 쾅쾅!


  깜짝 놀라 생각도 행동도 멈춰버렸다. 빗속을 뚫고 갈 생각이 싹 사라졌다. 번개와 천둥의 간격이 점점 짧아지기 시작하더니 거의 동시에 내려치기 시작했다. 바로 앞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은 굉음. 바다 위로 하늘이 찢어지고 비를 쏟았다. 하늘과 바다가 대화하고 있었다.


  어느덧 마당에는 강이 생겨 흐르고 있었다. 이러다가 홍수가 나는 것이 아닌가 걱정 될 정도로. 빗물이 들이치지 않는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었다. 밖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천둥번개와 비를 보는 것은 처음 이었다. 그것도 남의 집 처마에서.


  어젯밤, 알고 지내던 언니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연락은 자주 못해도 SNS를 통해 잘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던 언니였는데. 당황스러워 급히 연락을 했다. 언니의 가족들로부터 부고가 진짜라는 확인을 받았다.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위로의 말만 건네고 아무 것도 물어보지 못했다. 어쩌다가 왜 그랬는지. 인천에 올라갈까 밤새 고민을 했지만 결국 제주에 남았다.


  왜 죽었는지 이유를 알게 되면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분노, 복수, 슬픔. 살아있는 이들이 할 수 있는 것. 안타깝고 어처구니없고 한탄스럽다. 언니의 죽음으로 내 안에서 무엇이 사라졌는가를 보았다. 구름이 흘러가면서 천둥번개도 비도 지나갔다. 세차게 약하게 빠르게 천천히 갖은 모양으로 내렸던 비가 멈췄다. 나 또한 이제 이 처마 밑을 떠날 것이다. 언니가 잠시 이곳에 머물다 떠난 것처럼.


  저녁이 가까워지자 비가 완전히 그쳤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쏟아지던 비가. 구름들 사이로 햇살이 찢겨져 쏟아지는 해변을 걸었다. 들판 같이 넓은 모래사장이 푹 젖었다. 저 멀리서 바닷물이 달려오고 있었다. 만조가 되면 이 모래사장이 전부 잠긴다고 한다. 흙탕물이 된 표선 바다. 


2017. 7. 3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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