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백수
외향적이면서도 내향적인 모순 그대로, 여행을 잘 다니면서도 안 다니는 편이다. 국내와 해외의 낯선 곳들. 가면 좋을 것 같다 생각하면서도 꼭 가야 할 필요를 못 느꼈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것이 좋아서 다녔지 그 장소에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신들과 함께라면 그 어디라도 좋아. 이게 나의 여행 철학이었다.
그럼에도 제주도에는 환장을 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으로 처음 가본 제주도는 나에게 지상 낙원, 영혼의 고향으로 자리매김했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힌다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 이해했다. 검은 현무암 절벽을 따라 코발트빛 바닷물이 찰랑이는 해안과 연녹빛 초원이 끝없이 펼쳐지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에서 자신을 갈무리하는 오름들. 모르는 풍경인데 아늑하고 황홀했다.
성인이 되어 다시 제주를 찾은 것은 병 때문이었다. 이상하게 제주에 가야 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6일간의 짧은 방문이었지만 덕분에 기운을 차렸다. 그 해부터 없는 기회 있는 기회를 다 만들어 매년 제주를 방문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언젠가는 제주에서 살고 싶다 막연히 생각했었다.
아버지와의 일은 막연한 미래를 단번에 압축시켰다. 신장 이식을 해주고 난 후에도 삶을 살아야 한다면 제주도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죽는 것이 최선이고 다음이 제주도. 나에게 그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아버지와 나의 일인데 이상하게도 최종 결정권은 어머니에게 있었다. 신장이식 적합 판정을 받아왔지만 어머니가 반대했기에 못했다. 아버지가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고 내가 하자고 해도 어머니가 아니었기에 아니었다. 거의 반년을 이 문제로 씨름하면서도 어머니는 방파제처럼 변함없이 내 앞에 우뚝 서서 '절대 안 돼'를 외쳤다.
아버지는 성난 해일이 되어 결국 방파제를 넘었다. 아버지가 자살소동을 벌인 그 주 주말, 어머니가 나에게 신장 주는 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그럼 나 제주도 가서 살래요.”
“무슨 소리야 그게. 몸도 안 좋을 텐데 어떻게 거길 가.”
“몸 회복하고 나서 말이에요. 독립자금 조금만 주시면 나갈게요.”
“어떻게 그래. 엄마 아빠랑 살아야지. 너를 혼자 어떻게 보내니.”
“신장 뗘주는데 그것도 못 바라? 내가 원하는 걸 들어줘야 저도 흔쾌히 아버지 이식을 해드리죠. 안 그럼 안 해 줄 거야.”
기계적으로 말하는 나와 분노와 비참함으로 뒤범벅이 된 어머니가 언성을 높였다.
그래, 당신이 나 사랑하는 거 알아. 사랑하는 만큼 내가 아프면 당신도 아프다는 거 알아. 당신을 아프지 않게 하기 위해 나는 마음대로 아프지도 못해. 이식 수술을 끝낸 후에도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살아야 당신 마음이 놓이겠다고 협박하는 중이라는 것도 안다고.
어머니가 제주도에 가서 살게 해주겠다고 확답을 했다. 그날 밤, 신장 이식 하자는 나의 말에 아버지는 투석을 시작했다. 신장을 받지 않으셨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일상을 유지해온지 만 1년. 회사를 때려치웠고 제주행 비행기표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