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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장 수집가 Mar 08. 2022

그래서 지금은 써야만 한다.

부모였던 아빠의 울타리가 부서진 것이 아직도 꿈인것 같지만

글을 쓰고 싶었다. 그저 막연하게 늘 그렇게 생각만 했다. 쓰고 싶다고 해서 저절로 글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도 욕심만 부렸었다. 그런 나에게 글은 곁을 내줄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글을 써야만 했다. 다시 나만의 욕심으로 말이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로 나는 완벽하게 무너졌다. 아버지가 임종을 맞이하던 날에 내손으로 연명치료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사인을 했다. 가족들과 이미 논의는 마친 상태였지만 그 당사자가 내가 될 거라고는 생각을 미처 못했다. 아직도 종이 위에서 부들부들 떨던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화장실에서 한참을 울고 외로움과 무서움에 떨고 있을 아버지에게 웃는 얼굴로 가야만 했다. 아직도 나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그 자리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더라면 어땟을까 하는 생각을 참 많이도 했다. 그런다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 감정은 무서운 속도로  나를 계속 무너뜨렸다. 


이런 나의 마음은 가족을 떠나보내는 큰일을 같이 겪은 원가족들 누구에게도 깊이 닿지 못했다. 아버지 곁을 지킨 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 사이에는 절대로 합쳐질 수 없는 간극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떠나고 수개월의 시간이 흐른 지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무나 붙잡고 나의 슬픔을 일방적으로 퍼붓고 있었다. 같은 경험을 해도 그 결은 다를 텐데 정리되지 않은 내 감정을 쏟아내기에 바빴다. 


집에서도 남편과 아이들에게 입만 열면 아버지로 시작해서 아버지로 끝내는 일방통행의 연속이었다. 이런 나를 위해서 모두가 진심으로 위로를 해주었지만 그럴수록 어느 날은 고맙다가도 또 어느 날은 미안하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내 말을 들어줄 새로운 누군가를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흠짓 놀라기도 했다. 


그런 날들이 지속되던 날 밤에 아버지가 나의 꿈에 찾아왔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나를 안아주면서 토닥여주었다. 아마도 그만 멈추라는 의미였던 것 같다. 

아빠가 좋아했던 동백 꽃


그날 이후로 나는 사람들과의 만남보다 같은 경험을 글로 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주로 죽음과 돌봄이라는 주제가 담긴 내용들이었다. 어쩐 일인지 말로 나누는 감정보다 더 편안해져 왔다. 때로는 지면 속에서 만나는 그들이 나를 위로해줬고 때로는 나도 그들을 위로해줬다. 친구들과 대화에 죽음이라는 단어를 말하면서도 더 이상 내 슬픔을 말하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나의 감정을 알아차려야 하는 나만의 애도가 필요했던 것 같다. 아버지를 돌보는 동안 의료진이 말하는 몇 가지 되지 않는 선택지에서 나는 항상 무기력한 패배자였기에  내가 받은 상처를 인식하고 돌볼 시간이 없었다. 외로움과 두려움이 공존했던 그 시간 동안 무언가를 봉인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의 글을 통해 나는 봉인했던 감정과 마주했고 받아들이려 애쓰는 중이다.


병상일기지만 다른 의미로 아버지와 나누었던 문장을 정리하는 애도일기의 과정이기도 하다. 내가 나에게 무언가 해줄 수 있다면 그것은 마음의 소리를 적어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나에게 위로를 건네는 존재들과 함께 하고 싶다.  아마 아빠도 그러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은 써야만 한다. 아빠와 나눈 이야기가 기억에서 사라지기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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