탓
네가 나 좀 이해해 주면 안 되니?
그럼 네가 나 좀 이해해 주면 안 되나?
말의 중심이 기울어가고
서로를 향하는
몸의 각도 또한 달라져간다.
친한 친구가
아는 친구가 되고
그렇게 멀어질 사이가 되었고
그렇게 멀어진 사이가 되었다.
결국
내 탓도 네 탓이 된 거고
네 탓도 네 탓인 거였다.
나에게 달라지는 기준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친구와의 관계다.
친구를 사귀는 것도 어렵지만 굳이 피로감을 느끼면서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사회적으로 상호관계가 필요해서 좋든 싫든 연락처의 한자리를 내주어야 했다면, 나이에 숫자가 커지는 기점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관점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과의 만남이 많았던 사회생활 당시의 나의 태도는 내 본성이라기도 보다도 학습된 페르소나에 가깝다고나 할까?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모드 전환을 하면서 지냈었다.
지금의 나는 의사소통이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약속을 굳이 만들지를 않는다. 결과론적으로 정서적으로 존중이 되고 에너지 파동이 비슷한 사람들과 관계를 지속하려고 한다. 사회생활 당시 방어적인 태도가 학습이 된 모습조차 품어주는 그들과 만나면서 어느 정도 무장해제가 된 나를 발견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면에서는 나는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만남에서 상대방의 기대심리가 불편함의 촉매제로 변하는 관계도 있다. 뭐 하고 지내냐며 나의 안부를 진심으로 챙겨주는 사람도 있지만, 이래도 날 안 만날 거냐?라는 의미가 들어있는 그 속뜻을 잘 파악해야 하는 안부도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자연스레 거절에 대한 갖가지 이유를 만들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결국 좋은 관계에 대한 의무감으로 만나기는 했지만 한결같은 대화 방식이다. 이상하게 그 친구는 정작 자기 이야기는 없고 본인의 지인의 지인 이야기들만 한다. 그리고 만남의 대상인 나도 그 친구의 대화목록에 올라가 있지 않았다. 매번 되풀이되는 성의 없는 돌림노래에 나의 몸이 친구에게서 자꾸만 멀어져만 가고 있었나 보다. 나의 대답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꼈는지 "내가 알던 네가 아닌데, 내가 알던 너는 어디 간 거야?" 라면서 서운함을 장전한 총알을 사정없이 발사를 해버렸다. 친구의 볼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마치 아끼던 옷에 얼룩이 진 것 같은 불편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본인이 필요할 때마다 그 손익계산서에 한 줄이 되어준 건 나였는데 말이다.
결국 우린 서로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기억했던 것이다.
한때는 제법 취향과 관심사가 잘 맞았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서로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했었지만 지금은 충족되지 않는 그 무언가로 인해 스트레스만 깊어지고 있다.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내가 알던 네가 아닌데라는 친구의 말이 나를 탓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예전의 나 같았으면 마음과 감정이 아파도 불편함의 변수가 되지 않기 위하여 어떤 식으로든 대화에 합류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말의 온도가 식어가고 있음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친구에게 말을 건넸다. 우린 서로에게 불편하고 지루한 책이 되어 버렸고 친구로서 필요한 비상구는 더 이상 어려울 것 같다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맘에 없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서로에게 조금 남아있던 보호막이 해제되면서 공감하는 미소도 긍정도 부정도 없었던 만남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렇게 친구라는 꼬리표 하나가 슬프고도 평화롭게 떨어져 나갔고 그날의 일기장에는 탓이라는 인간관계에 대한 새로운 글 하나가 추가 되었고 주소록에서는 전화번호 하나가 삭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