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몸이 힘들다고 아우성을 칠 때면 즐겨먹는 음식이 있다. 김치 콩나물국, 콩나물 죽, 콩나물 김치부침개, 콩나물 굴국밥 등이다. 바로 콩나물이 들어가는 음식들이다. 이중에 가장 많이 먹었던 것은 김치 콩나물국이다. 그것은 갱년기를 맞이한 지금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 중 하나다. 배추김치와 콩나물을 볼 때마다 그 옛날 엄마와 함께 했던 기억의 지도가 어김없이 나의 앞으로 나타나곤 한다.
어렸을 적 밥상에 가장 많이 등장했던 재료는 김치와 콩나물이었다. 농사일로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고등학교 입학 때까지 부엌은 엄마와 나의 작은 영토였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그 앞에서 땔감이 빗어내는 각가지 소리들을 벗 삼아 놀고는 했다. 타작을 마친 콩 대들을 태울 때 타다닥 소리와 함께 그들의 몸이 어느 정도 달구어졌을 때 벌어진 껍질 속에서 쉭하고 불 밖으로 탈출을 감행하는 콩들도 있었다. 용케도 쏟아지는 매 타작에서 살아남은 녀석들이다. 그때 탈출한 콩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아이들 재울 때마다 재미난 옛날이야기로 재소환되고는 했다.
시골에서는 콩나물을 직접 길렀는데 그렇게 길러낸 콩나물은 엄마의 손에서 무한 변신을 했다. 어느 날은 고춧가루를 입고, 어느 날은 간장을 , 또 어느 날은 김치와 함께 무대에 오르고는 했다. 나는 콩나물의 머리를 씹는 재미를 참 좋아했는데 도시에서 처음으로 먹어본 아귀찜에는 머리와 꼬리가 잘려나가 있어 놀랬던 적도 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좋아하는 나는 아직도 잔뿌리도 제거를 하지 않고 먹는다.
어제도 김치 콩나물국을 먹었는데 친구들과의 음주 탓도 있었지만 갱년기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몸과 마음의 열을 내리기 위해서 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 감기로 엄청 아팠던 적이 있었다. 그때 엄마가 김치 콩나물국을 수시로 해주었고 무릎배게를 해주면서 이마를 만져주던 엄마의 냄새는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유일하게 부모님을 독차지할 수 있는 때이기도 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몸에서 신호를 보내면 어느새 김치 콩나물국을 먹고 있었다. 어제도 식탁에 한 사발 담겨 있는 김치 콩나물국을 보면서 엄마가 생각이 났다. 갱년기 이전에는 그져 일부분의 추억일뿐이었는데 갱년기 이후에는 엄마와 함께 했던 모든 장면 장면 하나에 숨어있는 감정의 암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김치 콩나물국을 먹고 싶을 때도 아닐 때도 필요에 의해서 선택을 하는 환경에 있지만, 그 시절 엄마의 김치 콩나물국은 선택이 아닌 생존이었을 텐데...
나는 아프면 이렇게 침대에 눕기도 하고, 친구들의 위로를 받기도 하면서 나의 몸을 챙기는데 친정 엄마가 아플 때는 어떤 모습으로 견뎠으려나. 그리고 결혼 후 이사 온 그 동네에서 이야기를 나눌 친구는 있었는지 만약 없었다면 그 깊은 외로움을 어디에 의지했던 걸까.
결혼을 해서도 하루하루 먹고 사니즘에 쫓겨서 누구의 위로도 받지 못하면서 현실의 풍파를 고스란히 감내했을 나의 엄마.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감정들이 있다면 갱년기도 그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결혼 후 엄마라는 그리고 여성이라는 삶을 다른 듯 비슷하게 걸으면서 뒤늦게 그 감정을 헤아려 보는 중이다.
콩으로 시작해서 김치 콩나물국, 그리고 갱년기까지 이어졌던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날 것 같지만, 이 이야기의 주 소재 제공자인 엄마의 부엌과 엄마의 밥상은 오늘 하루도 안녕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아버지와의 이별로 계속 생성되고 있을 슬픔과 외로움의 암호들을 우리 5남매들이 잘 풀어 나갈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