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나의 엄마가 혼자 계시는 곳
앞으로도 혼자 지내야 하는 곳
며칠 동안 여동생과 함께 친정집에 머물렀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 집에는 엄마. 아빠 두 분의 공간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지금은 엄마만의 공간이 돼버렸다.
1년 사이에 그 공간의 기운이 많이 달라져버렸다. 웃음보다는 울음과 우울, 그리고 불안이 자리하기 시작했고 걷어내고 걷어내도 그 무거움은 공간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는 중이다.
오 남매가 있어도 그 분위기는 상쇄되지 않는다. 어쩌다 찾아 오는 방문자의 입장이기에 엄마 앞에 버티고 서있는 그것들을 힘이 너무 세서 우리의 마음은 늘 패잔병 신세가 되고 만다.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농사일을 조금 거드는 것뿐이었다.
깨를 털고, 깻단을 쌓고, 들깨를 심은 밭에서 풀을 뽑고, 박아 놓았던 막대기를 뽑고, 고추를 땄다.
하루 종일 앉았다 일어났다를 무한반복했다. 비가 와도, 해가 나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이어졌다.
첫날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덥고 힘들고 지치고 그 감정들만 계속 생산되었다. 그렇지만, 첫날이 지나고, 둘째 날이 지나고, 날이 갈수록 아버지의 노고가 피부에 와닿기 시작했다.
나는 고작해야 며칠 도와주는 시늉을 하면서 이렇게 힘든데 아버지는 삶 전부를 이곳에 저당 잡혀 지냈으리라.
밭 한가운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의 손길이고 정성의 결과라는 생각에 정말 죄송하고 죄송했다. 일하는 사이사이 여동생과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항상 똑같은 말을 했다.
왜 이제서야...
비록 며칠이었지만 허리를 땅에 구부리고 흙냄새를 맡으면서, 우리 곁을 떠난 지금에서야 아버지의 노고가 부모님의 고단함이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지 정말 죄송한 마음뿐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말을 마치고 우느라 고개를 떨구어야만 했다.
나보다 큰 들깨가 이런 모습을 가려주고 머리 위로 왔다 갔다 하면서 잎사귀로 토닥여주었다. 덕분에 엄마에게 우는 모습을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일이 끝나고 나면 근처에 있는 아버지를 찾아가서 온몸에 관절이 삐걱대고 있다고 어리광을 부려보았다.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 늦게 알게 되었다고 고해성사를 하는 나에게 119호 납골당의 사진 속 아버지는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해주는 것 같았다.
아버지 정말 보고 싶어요. 설마 그곳에서도 농사짓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