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50줄에 들어선 큰딸이 요즘 겪는 현상에 대해서 아버지에게 넋두리를 좀 하려고요. 나이 앞의 숫자가 커질수록 대화의 중심은 부모에 대한 돌봄 또는 건강, 그리고 우리들의 건강, 노후 등에 이야기로 화제가 점점 기울어가고 있답니다. 그에 따른 부차적인 감정으로, 빠르게 변하는 시스템 속에서 배제되고 있다는 사회적인 소외감 같은 맥락들의 이야기도 많아지고 있어요.
지인들이나 친구들을 만나면 빠지지 않는 대화의 소재가 있다면 첫 번째는 건강, 그다음이 디지컬 문명에서 적응하기 힘들다는 말들이에요. 물론 저도 그중에 한 명이기도 하고요.
제가 왜 이런 말들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시죠?
오전에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어떻게 하면 갱년기에 잘 적응할 수 있는지에 수다를 떨다가 근처에 있는 찻집에 가게 되었어요. 당연하다는 듯이 주문하는 방식은 키오스크였고, 저희는 각자 메뉴를 정하고 주문하기 위해서 머리를 맞댔어요. 오늘따라 커피 대신 차를 선택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마치 어려운 과제를 풀어야 하는 사람처럼 화면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결재를 진행했지요.
왜인지 모르지만 그 기계 앞에만 서면 혼잣말이 절로 나오곤 해요. 그렇지. 이거 아닌가. 메뉴가 너무 많아. 뭘 눌러야 하는 거지. 잘못 눌렀네. 이런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건가 등등이요. 어찌어찌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앉아서 대화를 이어가던 중이었는데, 종업원이 우리 쪽으로 오더니 주문 확인 한번 더 하겠다고 그러더군요.
"차 주문하신 거 맞으시죠? "
"네 그런데요"
"그럼 아이스가 아니고 따듯한 거 주문한 것도 맞으시죠?"
"그럼요. 차가 따듯한 거 아닌가요?"
"네, 키오스크로 주문하실 때 아이스를 선택하셔서 다시 한번 확인하는 거예요?"
" 아이스라고요? 저희 차 주문이어서 뜨거운 걸로 했는데"
"기계에서 아이스, 핫 선택 기능이 있는데 아이스로 하셨네요"
"아. 그런가요. 저희는 당연히 따듯한 거리 생각하고 확인을 하지 않았네요."
디지털로 변화되는 세상에서 살려면, 그 속도에 보조를 맞춰야 하겠지만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그런 일을 겪고 나면 그 안에서 부유물처럼 떠 나니는 존재가 되는 것 같아 불편한 감정들이 자꾸 생겨나곤 해요. 그런데 아버지, 과연 나이 드신 분들의 기준은 몇 살부터일까요? 궁금해서 사람 나이 기준으로 검색을 해봤어요.
사람 나이 구분에 대한 중년은 30-49세, 장년을 50-64세로 나누며 65세 이상을 노년으로 본다. 의료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중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나이 든 사람들이 처리속도가 늦고 때때로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데 더 오래 걸릴 수 있지만, 직업적인 삶은 더 쉽고 비상하게 헤쳐 나간다는 사실이 존재한다(출처 위키백과 중)
이 내용대로면 저는 장년에 해당이 되네요. 나이 드신 분들에 해당여부를 떠나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분명한데도 시스템과는 공존이 함께 안 되는 존재로 분류되는 느낌이 드네요. 무조건적인 존중을 바라는 것 아닌데 참 어렵네요.
돌아오는 길에도 그 잔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혼자 계속 중얼중얼하면서 걷고 있던 중이었는데, 글쎄 커피숍 밖의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못하고 쩔쩔매는 제 나이 또래의 남성분이 보이지 뭐예요. 그냥 지나치려 하다가 '도와드릴까요'라고 하고 말았지요.
그분은 그런 저에게 무조건 고맙다고 인사를 먼저 하더군요. 차근차근 주문하는 법을 일러드리고, 본인이 다시 한번 해보시라고 권해드렸어요. 주문을 마치고 나서는 그제야 웃음을 보이는 그분을 보면서 당황한 심장의 요동이 조금은 잦아들기를 바랬어요. 저역시 그 무시무시한 감정속 경험자의 한사람이니까요.
오늘의 이런 상황의 넋두리를 들어본 아버지는 어떠세요?
과연, 아날로그 세대인 아버지 큰딸이 디지털 세상 속의 변화에서
끼인 세대가 아닌 깨인 세대의 사람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