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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장 수집가 Dec 06. 2022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가족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전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버님의 상태는 지금 당장을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2021년 4월 16일 집 근처의 의료원에서 상급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말과 함께 129차를 타고 대학병원으로 이송되어 왔던 날이었다. 응급실에서 의사의 기계적인 음성을 듣던 그 순간부터 나의 사고는 모두 정지되어 버렸다.


그때부터였나 보다. 나의 혼잣말이 “하나님 제발”이란 말로 온통 채워지기 시작했던 때가 말이다. 이런 상황을 아무것도 모르는 아빠는 그저 큰딸이 곁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언제나 그랬듯이 환하게 웃으면서 나의 손을 꼭 붙잡고 반겨주셨다. 그동안 지방의료원에서 보호자 없이 혼자 있는 게 너무 외로웠다며 네가 왔으니 되었다 이제 되었다 라면서 긴장의 끈을 조금은 풀고 있을 무렵이었다. 의사가 잠시 밖에서 보자며 나를 불렀다.


그동안의 아버지 삶에 대한 질문을 하는 의사에게 나는 아무것도 정확하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광부의 일을 몇 년 동안 했는지 담배는 언제까지 피웠고 언제 끊었는지 어떤 병원에 다녔고 현재 어떤 약을 먹고 있는지 수술을 했다면 언제 어떤 수술이었는지에 대한 물음들이었다.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나의 기억 속에서 답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엄마 역시 제대로 된 답은 줄 수가 없었다. 형제들 역시 정확한 기간을 알고 있지 못했고 다들 그게 그때 아니었나?라는 쓸모없이 들쑥 날쑥한 기억들만 들추고 있었다.


당사자인 아빠도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광부의 일을 했었구나" 하면서 고단했던 그 시절을 꺼내는걸 고통스러워했다. 그곳만 다니지 않았어도 지금처럼 낯선 응급실에 누워있지 않았을 것이다.


더듬거리는 말로 의사의 눈치를 보던 나에게 몇 가지 추가 검사를 하고 결과를 알려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승냥이 떼처럼 달려드는 간호사들에게 아버지는 몸 여기저기서 피를 뽑혀야만 했다. 나중에는 기준치만큼 나오지를 않아서 몇 번에 걸쳐 채혈을 해야만 했다. 온갖 검사와 많은 양의 피를 뽑혀야만 했던 아버지는 “무슨 피를 이렇게나 많이 뽑아간다니? 나 괜찮은 거니?" 하는 목소리에는 불안이 들어있었다. 살려고 들어온 병원이니까 아무 걱정 마시라는 나를 보며 큰딸 덕에 이렇게 큰 병원도 오고 아버지 호강한다고 억지로 웃는 얼굴에 주름들이 접혔다. 79세 아버지의 세월이다. 나이 들어가는 부모님을 지켜보는 일을 너무 게을리하고 말았다. 이제부터라도 잘해드려야지 라는 이상한 다짐을 했지만 그다음은 영영 오지 않았다. 아버지와 나에게 다음이란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믹스커피 마시고 싶다는 말에 그제야 편의점에서 호박죽과 캔커피를 사서 드리고 급한 대로 소변통, 휴지, 물티슈를 사서 어설프게 보호자 역할을 시작할 때였다. 유리문 밖에서 의사가 나오라는 손짓을 하는 게 보였다. 나에게 환자와의 관계를 묻고 이제 됐다 싶은 만큼의 거리로 이동한 다음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 자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세요.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나머지 가족분들에게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아버님은 지금 바이러스성 폐렴이 의심되는 상황이며 전원 당시 차트를 보면 상당히 위독한 상태로 보입니다. 현재 염증 수치가 너무 높아서 중환자실로 이동해 집중치료를 할 예정이지만 결과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이분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그 순간 나는 벼락을 맞아 두쪽으로 갈라진 나무처럼 정신이 분리돼버렸다. “저기요 선생님 아버지가 일주일 전에도 일상생활에 아무 문제가 없었고 지방의료원에서도 심각하다고 안 했는데 지금 이 상황이 납득할 수가 없네요. 그럴 리가 없어요 선생님" 하는 나에게 일주일 전 이야기는 지금 이 상황하고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고 그런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중환자실 자리가 나면 그때 다시 알려주겠다며 차가운 공기만 남긴 채 자리를 떠났다.


의사의 그 말, 듣고 싶지 않은 말, 들어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말,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 의사의 입에서 나온 그 한마디로 인하여 아버지의 생명 숫자는 100으로 가는 게 아니라 예고된 그 시간 0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응급실은 죽음을 빨아들이는 스펀지였다. 두려움이 습격했고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죽음의 방문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다음날 새벽 중환자실에 자리가 났다는 안내와 함께 이동을 서둘렀다. 침대에 누워서 오로지 나의 손을 의지한 채 어딘지 모르는 복도를 통과하는 동안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한참 후의 일이긴 하지만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수술을 하기 위해서 병실에서 수술실을 향하는 침대에서 들었던 생각은 불안함이었다. 나의 손을 잡고 함께 이동하던 남편에게 온 마음을 다해 의지를 했었다. 아버지도 그런 마음이었을까? 수많은 걱정들로 뒤범벅이 된 채 당도한 입구에서 불안함과 외로움의 세계인 중환자실로 아버지를 보내야만 했다. 잠시 기다리라고 한다. 난생처음 마주한 중환자 대기실 앞은 한산했다. 소파 몇 개와 다른 병실로 연결되어있는 문들이 보였다. 투명한 출입문 사이로 걷고 있는 환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그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을 사이에 두고 문밖의 나는 걷고 있는 환자들을 문안의 환자들은 그런 나를 쳐다보았다. 눈을 고정한 채로 한참을 서있었다. 혼자서도 잘 움직이는 그들이 너무 부러웠다. 아버지가 산소 줄이 없이 움직일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어디선가 메아리가 들려온다. 아빠의 이름이 로비에서 보호자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억지로 정신을 차려보았다. 담당 간호사로부터 중환자실 입원 기간 동안 필요한 물품과 각종 절차에 대한 안내가 시작되었다. 조직검사, 섬망, 응급상황, 이 모든 단어가 아득하게 들려온다. 낯설다. 다 처음 듣는 의료용어들 뿐이다. 비대면 진료여서 담당의사가 전화로 경과를 안내할 예정이라고 했다. 설명을 들었다는 종이에 사인을 하라고 한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 들었으면서 사인을 하고 말았다. 매일같이 벌어지고 사라지는 이런 모습들이 중환자실의 간호사들에게는 익숙한 것일까? 나의 어깨를 감싸며 기운을 내라면서 아버지의 소지품을 건네준다. 파란 비닐봉지 속 아버지의 소지품들이 나 좀 살려달라고 꺼내 달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나는 봉투를 열고 한참 동안 앉아있었다. 조금이라도 숨을 쉴 수 있도록 그 안에 공기를 채워야 할 것 같았다.


코로나로 면회도 불가하고 의사와 대면도 안 되는 상황에서 비대면으로만 상담이 이루어졌다. 기관지 폐포세 적술 예정입니다. 무슨 무슨 검사 예정입니다. 섬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경과가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동의하십니까?라는 말을 계속 듣고 답을 해야만 했다. 그것도 전화로 말이다. 그러면 좋아질 수 있나요?라는 물음에 현재 예상되는 병명에 대해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떨리는 손으로 검색한 내용 중에 '기대수명 3년에서 5년 폐이식도 가능하지만 65세 미만인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더 이상 다른 내용은 읽는다는 것은 무의미할 뿐이었다. 나의 정신은 희망조차 품지 못하게 되돌아오는 의사의 말로 실어증 비슷한 증상을 겪어야만 했다. 그로 인해 가족들에게 아무 말도 전할 수 없었다. 제대로 전할 수도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었고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었다. 수일의 시간이 흐르고 최종 진단명 난치병(특발성 폐섬유화증)이란 말을 듣고 난 후로 모든 말의 의미는 아버지에게도 우리에게도 아픔이 돼버리고 말았다.


보통의 일이었던 평범한 날들이 아버지의 입원 이후 우리 가족에게는 큰일이 돼버리고 말았다.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이 그렇게 큰 욕심이냐고 원망을 했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원망이 애원으로 변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정말 다행히도 투여한 치료제가 차도를 보여 일단은 일반병실로 옮겨도 된다는 연락이 왔다. 일단은이라는 전제조건이 붙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고마움과 안도감으로 미친 사람처럼 집안 온구석을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일반병실 배정을 안내받고 한참을 서성이던 중환자실 문이 열리던 그날, 아버지를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초점 없이 헤매는 눈동자를 보면서 희망은 결국 곁을 내어주지 않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병실에서 환자복을 갈아입히면서 보게 되었던 멍투성이의 아버지의 몸, 다시 한번 절망을 해야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검사를 위해 피를 수없이 뽑혀야만 했던 아버지에게 ‘조금만 참으세요’라는 말 대신 ‘참지 말고 소리 지르세요’라고 말을 할걸 왜 나는 그러지 못했을까? 모든 게 다 후회스러웠다. 시작도 하기 전에 절망이라니 자석처럼 붙어있던 모든 희망이 하나둘씩 접착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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