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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장 수집가 Apr 03. 2024

흰머리가 입장하셨습니다.

2019

퇴사를 했지만 나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업주부라는 이름표가 추가되었고 흰머리, 갱년기, 건망증,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 역할에 더 가까워졌을 뿐이었다. 그래도 문밖을 나서는 빈도가 줄면서 염색을 하러 미용실에 가지 않아도 돼서 좋았고 시간에 상관없이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 그 또한 좋았다. 무엇보다도 연령대가 같은 친구들과 내 나이에 맞는 단어로 이야기를 해서 안심하고 그 자리를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


30대에 만나서 40대와 50대를 함께 넘어가고 있는 동안 우리의 대화 주제는 늘 풍요로웠다. 어느 시점부터는 우스개 소리로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먹어야 하는 영양제의 숫자가 늘어가는 것이고, 건망증과 밀당을 해야 하는 것, 그리고 갱년기와 불같은 연애를 해야 하는 것이라며 웃고 또 웃었지만 말이다.     

  

거기까지는 딱 그랬다.     

 

내가 생각하기에 친구들 대화에 갱년기와 건망증의 이야기는 여전한 것 같은데,  언제부터인가 나만 유독 되풀이하는 단어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수다 목록 1순위가 갱년기에서 흰머리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나름 최소한의 동선으로 움직였다고 생각 나와  다르게 사람들의 눈에내가 아닌 흰머리가 노출이 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크고 작은 관심들이 자석처럼 나에게 모여들었고 흰머리 때문에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나와 동행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미용실, 카페, 지하철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를 따라다니는 에피소드로 급기야 만담의 일종처럼 친구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기에 이르렀다. 흰머리로 겪는 에피소드들이 갱년기나 건망증보다 많아지면서, 저절로 이야기의 흐름은 내가 아닌 흰머리가 주인공이 돼버렸다.


모임이 있는 날이면 친구들은 내가 아닌 에피소드를 더 궁금해했고, 다 듣고 난 후에는 웃을 일은 아닌데 너무 재미있어서 웃기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면서 결코 동의하고 싶지 않은 말들을 해줬다.


그리고는 재미있게 말한 나는 유죄이고
재미있게 들어준 본인들은 무죄라는 말을 했다.

      

좋든 싫든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발생하는 에피소드들을 막을 방법은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필연인 듯 아닌 듯 이미 정해져 있는 수순처럼 말이다. 흰머리를 허락한 적도 없고, 받아 들일수 없다고 몸부림쳐 봤지만 그 에피소들을 앞장 세워서 흰머리가 나를 포함하여 친구들의 세계 속으로 입장을 했다.


그것도 아주 당당하고 거침 없이 말이다. 부디 그런 흰머리와 함께 평화롭게 살기에 성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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