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감동을 싣고
*스포일러 있습니다
2008년 <아이언맨>으로 시작으로 11년간 이어져 온 '인피니티 사가'가 <어벤져스 : 엔드게임>을 마지막으로 드디어 대장정의 막을 내린다. 물론 MCU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어지겠지만, 22편의 영화를 통해 쌓아 온 추억과 기억들을 보내주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엔드게임>은 모두에게 최선일 결말에 대해 고심한 흔적이 진하게 묻어난다. 무려 3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그동안 싸워온 영웅들에 대한 헌사와 이전 작품에 대한 애정,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까지 부지런히 그려낸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엔드 게임>은 최고의 영화는 아닐지 몰라도 11년 여정에 대한 최고의 결말임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라 생각한다.
쉽게 말해 <엔드게임>은 이제까지 MCU의 총집결 편이자 하나의 팬서비스 무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객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작품이니만큼 내용을 둘러싼 온갖 루머와 추측들로 시끌벅적했는데, 지난해 전 세계를 충격에 빠트린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의 마지막을 떠올려 본다면 그럴 수 밖에 없긴 하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엔드게임>은 의외의 허술함과 아쉬움을 남긴다. <앤트맨과 와스프>나 촬영장 파파라치 샷을 통해 양자 영역과 시간 여행이 <엔드게임>의 히든카드가 될 것임을 예상하긴 했지만, 그 과정이 상당히 싱겁다. 토니 스타크가 몇 번 뚝딱뚝딱하니 포털이고 시간 여행 장치고 다 만들어지고(무려 건틀렛까지!), 심지어 영화 내에서 시간 여행에 대한 설정 충돌도 일어난다. 극 중에서도 <빽 투 더 퓨처> 시리즈로 예를 들어주기는 했지만 뭔가 좀 얼렁뚱땅 넘어가는 느낌이다.
<인피니티 워>에는 필요한 내용을 정말 꽉꽉 채워 넣은 느낌이었다면, <엔드게임>은 굳이 필요 없는 장면은 들어있고 정작 필요한 장면은 없는 그런 분위기다. 긴 러닝타임이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인피니티 워>만큼의 밀도 높은 이야기나 긴장감을 찾아보긴 힘들다. 전개 또한 듬성듬성 구멍을 보이는 곳이 눈에 띈다. 그리고 원년 멤버들의 퇴장을 다루다 보니 아무래도 극이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에 치중된다. 그에 비해 '헐크'와 '블랙 위도우'에 대한 실망스러운 대우는 감동적인 결말의 발목을 잡을 정도이고, 개그 캐로 전락한 '토르'의 캐릭터 붕괴도(멘탈이 부서졌다는 것을 감안해도) 상당히 놀랍다. <인피니티 워>에서 역대급 빌런의 모습을 보여준 '타노스'의 캐릭터도 <엔드게임>에서 많이 희석되는 느낌이다. 물론 전개를 위해 적절히 밸런스를 잘 맞췄다는 생각도 들지만, <인피니티 워>의 완성도에 비하면 <엔드게임>은 아쉬운 부분이 여럿 존재한다.
그럼에도 <엔드게임>을 외면하기 힘든 이유는 바로 MCU 그 자체에 있다. 각 시간대에 흩어져있는 인피니티 스톤을 찾기 위해 어벤져스 멤버들은 팀을 나눠 시간 여행을 하는데, 여기서부터 <엔드게임>의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 <어벤져스>, <토르 : 다크 월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시간대로 이동한 인물들을 통해 이전 작품들과 캐릭터들에 대한 애정과 헌사를 그리며 이제까지 MCU(+코믹스 +드라마까지!)를 챙겨본 팬들에게 소소한 감동과 웃음을 자아낸다. 무엇보다 과거로 이동한 히어로들이 그들 각자의 삶에 영향을 미친 인물들과 또 마주하면서 다시 한번 각성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엔드게임>의 결말에 대한 그들 각자의 결심을 굳힌다는 것도 뜻깊다.
<엔드게임>은 이처럼 러닝타임 대부분을 드라마에 소비하지만, 마지막 회심의 카운터 펀치 또한 잊지 않는다.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토르로 상징되는 MCU 트리니티가 타노스와 결전을 벌이는 장면은 처절하면서도 멋들어지게 그려지며 전반부 액션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을 시원하게 날린다. 무엇보다도 사라졌던 히어로들과 전투원들이 모두 집결해 캡틴 아메리카가 '어벤져스 어셈블'을 외치는 장면은, MCU 통틀어 아니 역대 히어로 영화 중에서도 가장 멋지고 감동적인 장면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장엄하면서도 웅장한 대규모 전투는 마치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이나 <레디 플레이어 원>을 떠올리게 할 정도다. 사상 최고의 팬서비스가 아닐까 싶을 만큼 엄청난 물량 규모 속에서도 빛나는 캐릭터들은, MCU가 그동안 허투루 캐릭터들을 구축해온 것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준다.
비장한 전투와 숭고한 희생 끝에 <엔드게임>은 '인피니티 사가'의 막을 내린다. 무엇보다 이제까지 MCU의 메인 서사를 지탱해온 두 캐릭터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의 퇴장은 오랫동안 이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관객들에게 복잡 미묘한 감정을 선사한다. 자기밖에 몰랐던 인물이 대의를 위해 몸을 던지고, 한 평생 대의를 위해 살아오며 자신을 잃었던 청년은 비로소 사랑하는 여인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엔드게임>은 단순히 하나의 영화로만 평가하기 힘들 만큼(수많은 단점과 허점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동안 MCU를 통해 농축된 감정의 결실과도 같다. 앞으로도 MCU를 비롯해서 수많은 히어로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겠지만, '인피니티 사가'의 서사와 감동을 쉽게 접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지금 이 순간이 딱 3000만큼 그립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