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사를 정사처럼 다루는 '불쾌한 골짜기'
벌써 중복도 지나고, 각 회사의 자존심을 건 한국 텐트폴 영화들이 하나둘 공개되는 걸 보면 여름은 여름인가보다. <나랏말싸미>는 이런 여름 성수기에 가장 먼저 출사표를 던진 영화다. <사도>로 호흡을 맞췄던 조철현 감독과 송강호가 이번에는 세종대왕과 한글 창제라는 소재로 다시 한번 손을 잡았다. 사실 여름 시장에 맞지 않는 무거운 영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끌릴 만한 내용과 송강호와 박해일이라는 든든한 투톱은 시기를 막론하고 흥행할 만한 카드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랏말싸미>는 야사를 정사처럼 그려내며,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함만 안겨주며 제 꾀에 제가 넘어가고 만다.
<나랏말싸미>라는 영화를 처음 접하면 누구나 품는 합리적인 의심이 있다. 바로 왜 한글을 다루는 영화인데도 한글날이 아니라 굳이 여름 시장에 이 영화를 꺼냈을까 라는 질문이다. 당연하게도 영화는 이 답을 가지고 있다. <나랏말싸미>는 신미 스님이 한글을 창제했다는 한낱 야사에 불과한 이야기를 굉장히 진지한 톤으로 그려낸다. 개봉과 동시에 영화의 역사왜곡에 대한 이야기가 슬슬 나오는 판국에, 만약 한글날에 개봉했다면 뒷감당이 안 될 만큼 엄청난 비난을 들었을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시작부터 한글 창제에 대한 가설들 중 하나를 바탕으로 만들었음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유독 이 영화에 반감이 드는 이유는, <미인도>나 <광해 : 왕이 된 남자>처럼 설정만 비튼 팩션이 아니라, 마치 자신들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 진짜인 것처럼 묘사하는 진지한 태도 때문이다.
영화는 세종대왕의 조력자로 신미 스님이 활약한 것이 아니라 신미 스님의 주도적인 지휘 아래, 아니 엄청난 하드 캐리로 한글이 창제된 것처럼 그린다. 게다가 당장 훈민정음 해례본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한글 창제 원리는 많이 헐거워 보인다. 과학적으로 시작하나 싶더니 곧 우연과 재치로 한글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고 있으면, 저게 경복궁에서 창틀보고 한글 만들었다는 무허가 조선족 가이드들과 무슨 차이가 있나 싶을 정도다. 그리고 <나랏말싸미> 속 세종은 무르다 못해 무능해 보일 지경이고, 신미 스님은 까칠하다 못해 간이 배 밖에 나온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건방지다. 세종 바로 이전 왕인 태종이 어떤 왕인지만 떠올려봐도 신미 스님과 신하들의 태도는 영화적 허용이라고 하기에도 선을 많이 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역사왜곡보다 더 아쉬운 건 이 황당한 가설을 제외하곤 영화에 그리 남는 것이 없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세종과 신미 두 사람이 한글을 창제하는 동기가 잘 와 닿지 않는다. 각자 애민정신과 불교 정신을 계속 되뇌나, 두 사람의 인간적인 모습이나 깊은 고뇌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나마 세종은 소헌왕후가 옆에 있었기에 다른 면모를 조금 엿볼 수 있었지만 신미 스님의 딱딱한 모습은 끝내 영화의 가설 마냥 그리 큰 설득력과 이해를 안겨주지 못한다. 이처럼 <나랏말싸미>는 한글 창제에 대한 흥미로운 야사 그 이상의 무언가를 제대로 그려내지 못하며 어설픈 웃음과 설익은 감정만을 남긴 채 왜곡에 대한 불편함에 대해서 곱씹게만 만들 뿐이다.
세종대왕은 이순신과 더불어 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받고 또 가장 잘 알려진 위인들인데 <나랏말싸미>는 어쩌면 한국사에서 건들면 안되는 역린을 건드려서 더 화를 자초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국뽕으로 풀어도 모자랄 판국에, 세종대왕의 업적을 깎아내리면서 무리하게 야사를 메인으로 집어넣은 <나랏말싸미>의 시도는 실패로 보인다. 교육용 영화로는 비교육적이고, 오락 영화로는 지루한 <나랏말싸미>과 과연 어떤 성적을 거둘지 내심 기대가 되긴 한다. 그리고 올해 세종대왕님은 <천문 : 하늘에 묻는다>로 다시 한번 스크린 나들이를 할 예정인데, 이 영화는 또 어떤 평가를 받을지 벌써 궁금해진다.
P.S. - 이러다 '사실은 정의공주가 한글 만들었다'라는 영화가 나오는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