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한편에 고이 접어뒀던 편지 한 장
계절마다 생각나는 영화들이 있다. 꽃피는 봄에는 <건축학개론>이나 <초속 5㎝>가 떠오르고, 비가 내리는 여름에는 <지금 만나러 갑니다>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눈 내리는 겨울에는 <러브 액츄얼리>나 <러브레터>가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고 있지만, <윤희에게>라는 신흥강자에게도 이제 한자리를 내줘야 하지 싶다. <윤희에게>는 몰아치는 눈보라 같은 영화는 아니다. 대신 소복이 쌓인 눈 위를 한 발 한 발 내디디면서, 만년설 같은 중년의 사랑과 상처를 은은한 달빛처럼 어루만진다.
<윤희에게>는 감정의 여백을 말 대신 이미지로 대신한다. 시대의 한계에 부딪혀 헤어져야만 했던 상처를 굳이 강조하지 않고 덤덤히 지내는 일상을 통해 묵은 감정들을 조금씩 드러낸다. 윤희는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누군가의 아내, 엄마가 아닌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쥰과 그녀를 향한 마음을 마주한다. 엄숙했던 시대는 그녀의 꿈과 사랑을 짓밟았지만 그런 그녀를 연대를 통해 다시금 일으켜 세웠다는 점도 흥미롭다. 윤희의 딸 새봄과 새봄의 남자친구 경수, 그리고 쥰의 고모인 마사코의 노력은 지난 시절에 대한 반성과 앞으로의 발전을 엿볼 수 있는 작지만 큰 성장과도 같아 보인다.
윤희는 쥰의 꿈(dream)을 꾸었고, 또 그녀를 통해 다시 한 번 앞으로의 꿈(future)을 꾼다. 지난날의 상처는 시대와 세대의 연대와 화합을 통해 봉합해냈고, 사랑의 힘은 상흔을 딛고 다시 한 번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만든다. 흔한 키스 장면도 절절한 사랑 고백도 없지만, 영화가 깊은 여운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배우 김희애의 공도 크다. 김희애는 눈빛과 행동을 통해 지난 사랑의 회상과 잃어버린 시절에 대한 회한, 그리고 앞으로의 꿈꾸는 미래까지 담담히 담아낸다. 김희애, 그리고 <윤희에게>가 전해주는 이 따뜻한 기운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마음을 데워줄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