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설정들을 맵시있게 엮어내다
뭔가 '임수정' 배우를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진짜 오랜만이었다. '내 아내의 모든 것' 이후로 처음 그녀의 작품을 보게 된 것이니 무려 6년만이다. '은밀한 유혹', '시간이탈자' 등 최근 이어진 그녀의 스크린 활동은 사실 평가나 흥행이나 모두 아쉬웠었다. 이런 저런 점에서 힘빼고 돌아온 '당신의 부탁'이란 작품이 궁금했다. '어쩌다보니 죽은 남편의 전부인의 다 큰 아들을 키운다'라는 약간 아침드라마가 생각나는 내용임에도, 영화는 이를 진부하지 않고 맵시있게 잘 엮어낸다.
'당신의 부탁'은 어쩌면 TV 단막극에 어울릴법한 소소한 규모의 일상극이다. 어쩌다 갈등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대부분 보통의 일상을 담담히 담아낸다. 마치 친구와 카페에서 수다를 떠는 모습을 지켜보는 느낌이 들 정도다. 하지만 다루는 내용들의 무게는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다. 앞서 말했듯 죽은 남편의 전처가 낳은 아들을 키운다는 스토리도 그렇고, 미혼모나 입양 등을 다룬 곁가지 내용들도 그렇다. 그저 의도치 않게 한 지붕 아래에 살게 된 모자의 내용을 그린 줄 알았는데,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엄마'들의 모습도 눈에 띈다. 엄마로 살아온 사람, 엄마가 될 사람, 엄마가 된 사람, 엄마였던 사람 등등 말이다. 하지만 모든 인물들에게서 공통점이 있다면, 서로의 존재를 통해 서로의 빈틈을 채우고, 모두 변화하고 성장한다는 것이다.
너의 모습을 통해 나의 성장을 이뤄낸다. '당신의 부탁'은 이 단순하면서도 무거운 주제를 일상극으로 지루하지 않게 담아낸다. 굳이 이야기의 고리를 하나하나 다루려고 하지 않고, 인물들의 감정을 엮는데 더 공을 들인다. 그래서 뻔히 아는 내용을 뻔히 다루기보다, 생략하고 넘어가면서 그 빈틈에 스며든 감정을 더 잘 느끼게 만들어준다.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를 보러 갔다면 영화가 주는 의외의 무게감에 다소 놀랄지도 모르겠다. 눈물을 쥐어짜내는 부분은 없지만서도, 봄바람처럼 마음을 가볍게 흔들어주는데는 성공한다. 아, 그리고 임수정이라는 좋은 배우를 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내 자신을 다시 한번 반성해본다. 농익은 연기를 선보인 그녀의 다음 행보를 한번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