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후기

파편처럼 부유하는 분노를 엮어내는 선명한 이미지들

by 조조할인

이창동 감독님이 원래 다작을 하시는 분이 아니시라지만, '시'(2010) 이후의 이번 공백은 유난히 길었다. 그래서 더 뜨거운 것이 아닌가 싶다. 현재 칸 영화제를 달구고 있는 '버닝'은 수상 여부를 떠나서, 그 등장만으로도 한국 영화계의 동력에 불을 지펴준다. '버닝'은 관람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영화와도 같다. 친절하지 않은 서사는 파편처럼 부유하는 분노들을 선명한 이미지로 엮어낸다. 이창동은 마치 소설책을 쓰듯이, 헛것들의 행간을 한장한장 눌러담는다.



'버닝'은 청춘 영화다. 그러나 여타 청춘 영화들과는 결과 속이 모두 다르다. 흔히 열정과 패기로 대변되는 청춘과는 달리, '버닝' 속 인물들은 방향을 잡지 못한 채 끝없이 배회한다. '종수'(유아인)는 분노한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그 분노가 무엇 때문인지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다. '벤'(스티븐 연)에 대한 계급적인 열등감인지, 아버지에 대한 근원적인 갈등인지, 아니면 한글자의 소설도 쓰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것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 주변을 맴돌 뿐이다. '종수'는 벌어지는 상황에 관찰자로 머물지만,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어림 짐작만 한다.



'종수'에게 주어진 정보들은 불분명하다. 고향 친구 '해미'(전종서)의 등장과 그들의 과거, 그녀가 키우는 고양이, 그리고 부유한 개츠비 '벤'의 등장처럼 '종수'에겐 미스테리한 사건들이 나열된다. 그리고 이 혼란은 '없다는 것을 잊고 살던' 종수의 가슴 속 베이스를 둥둥 울린다. 해미를 통해 자본에 대한 욕망으로 잠식당하는 종수이지만, 그는 끝내 그녀를 갖지 못한다. 그런 종수가 자본이라는 환영을 그나마 마주할 수 있는 것은 남산타워를 바라보고 자위를 할 때 뿐이다. 언젠가 해미의 자취방에서 봤던 남산 타워에 반사된 빛처럼, 스스로 발화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기득권들이 쥐어준 허상 속에서 발버둥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종수는 깨닫는다.



긴 터널의 끝에 있는 빛만을 보고 달렸는데, 그 끝에 답이 없다면 어떨까? 매일 아침 안개 속을 뛰며 헤매는 종수의 모습은 마치 답이 없다는 것을 잊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잠시나마 가졌다고 생각했던 순수했던 욕망을 끝없이 확인하던 종수는, 그 헛것들을 끝내 쥘 수 없음을 벤을 통해 알게 된다. 그리고 잠시나마 품었던 그 헛된 욕망을 분노로 태워버리고 스스로 가졌던 것들을 모두 내려놓은 채 영화는 끝난다. 이창동은 종수와 해미, 그리고 벤이라는 세명의 인물을 통해 방향을 잃은 채 허우적거리는 지금 대한민국의 청춘들의 모습을 씁쓸하면서도 예리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버닝'은 수많은 틈으로 꽉 차 있는 영화다. 메타포들을 배치는 하되 굳이 설명해주지 않고, 선명하게 새겨진 이미지들로 대체한다. 불투명한 진실은 불분명한 감정으로 혼란을 안겨주지만, 그래서 영화는 끝나고 더 풍성해진다. 영화에 주어진 이 수많은 행간들을 스스로가 어떻게 채우냐에 따라 '버닝'이라는 영화가 와닿는 정도도 다를 것이다. 뭉툭한듯 날카로운 것은 이창동 감독과 홍경표 촬영감독만이 아니다. 이전과는 또 다른 에너지로 스크린을 가득 채운 배우들의 열연에도 찬사를 보낸다. '버닝'이 지핀 이 열기와 흥분은, 한동안 쉽게 사그라들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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