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한 히어로의 품격있는 대관식
그저 흔한 슈퍼 히어로 영화로 치부하기엔, 이 영화 심상치가 않다. 국내에서도 설 연휴에 맞춰 개봉하면서 역대 발렌타이 데이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다고 하지만, 본고장인 북미에서의 예상 오프닝 수익은 더 무시무시하다. 야금야금 오르던 최종 성적 예상치도 이젠 끝을 쉽게 예상하기 힘들만큼 높아졌다. 단순히 인기가 좋은 마블의 히어로 영화라서가 아니다. 국내 포스터의 홍보 문구인 '가장 혁신적인 히어로'라는 문구는 사실 본고장인 미국에서 더 적합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이전에도 '웨슬리 스나입스'를 필두로 하는 코믹북 원작의 슈퍼 히어로 영화 '블레이드' 시리즈가 있었고, 원작 없이도 슈퍼 히어로 영화 못지 않는 티켓 파워를 선보이며 지구를 지키는 '윌 스미스'같은 슈퍼스타도 여전히 건재하다. 하지만 '블랙 팬서'는 그야말로 혁신적이다. 흑인이 각본을 쓰고 주연을 하고 감독을 한 2억불짜리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어쩌면 '블랙 팬서'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오락 영화 이상의 분기점이 될 가능성일지도 모르겠다. 진짜가 등장한 셈이다.
단순히 흑인들이 필두로 해서 만든 작품이라 대단하다는 것이 아니다. '블랙 팬서'는 블랙 필름의 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들의 문화와 정서, 그리고 역사가 온전히 녹아들어 있다. 한국 사람, 부산 사람으로서 부산에서 펼쳐지는 추격 시퀀스에 좀 더 관심이 가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지만, 진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그들이 싸우는 이유 그 자체이다. '블랙 팬서'는 하나의 슈퍼 히어로 영화이기도 하지만, 지구 상에 살아가고 있는 20억 흑인들에게 보내는 희망의 메시지이자 화합의 편지, 자부심의 근원으로 보이기도 한다.
'문라이트'에선 유색 인종으로서, 소수자로서 살아가는 개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고,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에서는 그 개인들이 구성해서 살아가는 거리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영화의 시작이 LA 폭동이 일어난 92년도인 점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죽는다'라는 거리의 삶을 너무 일찍 깨우쳐버린 에릭의 담담한 모습은 짧지만 묵직하게 다가온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만이 통용된다는 것을 몸소 느낀 그는 21세기의 말콤 엑스가 되고자 했고, 와칸다라는 조국만을 보호하려드는 마틴 루터 킹, 타칠라 '왕'에게 기쁜 마음으로 칼을 겨눈다.
영화는 흑인 운동의 역사를 2시간짜리 블록버스터 안에 유려하게 녹여낸다. 왕좌를 둘러싼 다툼이자 민족의 방향성과 자신의 정체성까지 쫓다보면 숨이 찰 법도 한데, 이전 마블 영화에서 자기 소개를 미리 해놓은 덕을 톡톡히 누린다. 타칠라에 대한 설명이나 로스나 클로와의 관계에 대한 설명을 굳이 안해도 되기에, 새로운 빌런인 에릭 킬몽거뿐만 아니라 오코예나 슈리, 나키아 같은 매력적인 조연들이 활약한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 마블의 슈퍼히어로 영화들은 개별 시리즈임에도 후속편이 이어질수록 어벤져스 멤버들이 너무 많이 연관되어 각자의 매력이 좀 희석된다고 느껴질 즈음에, '블랙 팬서'는 온전히 자신들만의 이야기만을 그린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그럼에도 얼마 뒤 공개될 '인피니티 워'로의 징검다리 역할로도 충분히 수행한다는 점도 훌륭하다.
블랙 팬서가 보여주는 날렵하고 역동적인 액션도 꽤나 박력넘친다. 그리고 여성 경호원들인 도라밀라제가 보여주는 육탄 액션은 시원시원한 타격감과 호쾌함을 선사하고, 슈리는 생각보다 진지한 영화의 씬스틸러이자 윤활유로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무엇보다 한국사람으로서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이 모든 인물들이 하나로 뭉치는 첫 장소가 '부산'이라는 것이다. 자갈치 시장, 광안대교 같은 부산의 랜드마크를 중심으로 영화의 신구 캐릭터들이 펼치는 활약상을 보는 것은 꽤 즐겁고 독특한 경험이었다.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가 비브라늄을 뜻하는 줄 누가 알았겠는가?
부산 이후에는 다시 와칸다로 넘어가서 본격적인 왕좌의 게임이 시작된다. 와칸다라는 장소는 굉장히 흥미롭게 묘사된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가상의 미래도시 같은 느낌이지만, 어디서 본 듯한 아프리카의 문화들과 현상황들이 공존하고 있는 특이한 장소이다. 화려하고 웅장한, 그러면서도 자연의 웅장함이 느껴지는 전통과 비브라늄을 필두로 하는 첨단 과학이 적절히 융합되어 살아가는걸 보면 일종의 유토피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가능성처럼도 보인다. 지금도 여전히 부족 간의 갈등과 군부의 독재로 신음하고 있는 현재의 아프리카이지만, 와칸다처럼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과 동력, 그리고 자원을 가진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블랙 팬서'는 일종의 자부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방향성을 제시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타칠라와 에릭은 서로가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과 반대되는 사상으로 인해 잃었지만, 그 목적은 모두 자신들의 뿌리와 민족, 미래를 향한 것이었다. 그래서 단순한 선과 악의 대립으로 보이지 않고, 자신들을 향한 시선과 자신들이 바라봐야할 곳에 대한 진지한 고민으로 다가온다. 폭력과 피로 얼룩진 아픔을 어떻게 닦아내고, 갈등과 대립보다는 어떻게 결속하고 또 나아가야할지, 마지막 타칠라 그리고 와칸다의 선택은 그래서 더 의미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