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세상에도 심장은 뛴다
자신감일까, 무리수일까? 여름 성수기를 두고 대작들이 매주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인랑'(2018)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미션임파서블 : 폴아웃'와 정면대결을 선포했다. 먼저 관람한 '폴아웃'이 기대 이상의 퀄리티로 뽑힌 것을 눈으로 확인했기에, '인랑'에 대한 걱정이 다소 앞섰던 것이 사실이다. 원작 애니메이션 '인랑'을 본 건 아니지만 그 명성은 익히 들어왔다. 원작의 유명세와 소재의 무거움, 거대 예산의 부담감을 등에 업고 동시에 자신의 이야기로 재창조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김지운' 감독은 여러 난관을 이겨내고 자신의 색깔을 입히는데 성공한다. '김지운의 인랑'의 선택은, 무리수가 아니라 자신감이다.
'인랑'의 배경은 근미래의 대한민국이다. 남북이 통일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이를 반대하는 주변의 강대국들의 압박과 내부의 혼란이 지속된다. 통일을 반대하는 무장테러단체 '섹트'와 이들을 제압하기 위한 대통령 직속 경찰부대 '특기대', 그리고 정보기관 '안기부'가 이해 관계를 둘러싸고 얽히고 섥힌다. 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혼란의 시기에 개인의 존재는 조직과 단체의 이름 아래 묵살된다. '인랑'은 이런 야만의 시대에서도 인간다울 수 있을까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늑대처럼 살아가던 이들을 일깨워주는 건 총소리가 아니다. 서로를 속고 속이는 와중에도 숨길 수 없는 심장 소리는, 시대와 집단에 억눌러진 자아를 해방시킨다.
누구 하나 믿을 수 없는 상황을 직접 파헤쳐가는 '임중경'(강동원)을 중심으로, 첩보 영화를 방불케하는 기관들 간의 치열한 전쟁이 펼쳐진다. 놀라운 건 이런 암투를 말뿐만이 아닌 액션으로 직접 그려낸다는 점이다. 이는 '인랑'의 장점이자 단점이 된다. 복잡할 수 있는 이야기와 고뇌를 직접 몸으로 그려내면서 갈등을 시각화시키고, 이는 오락적인 쾌감과도 직결된다. 이는 동시에 '인랑'의 이야기에 개인의 이야기가 자리잡을 틈이 많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빨간 망토' 우화를 직접 끌어들이면서 이해를 쉽게 돕기는 하지만, 개개인의 심경 변화나 정체성의 발현에 대한 부분이 다소 가볍게 다뤄진 것이 아쉽다. 그럼에도 이런 단점을 상쇄시킬 장점이 있으니, 바로 액션이다.
'인랑'에서 보여주는 SF 액션은 '특기대'의 강화복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묵직한 맛이 일품이다. 벽에 부딪히면 튕겨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벽이 박살나는 이 무게감 넘치는 강화복을 입고 펼치는 묵직하면서도 세련된 총기 액션은 원작의 팬들도 만족시키기에 충분해보인다. 괜히 '인간병기'라는 별명을 달고 있는 것이 아니듯, 압도적인 액션을 보여주는 특기대와 그들의 강화복은 이후에도 꾸준히 회자되지 않을까 싶다. 미장센으로 유명한 김지운 감독답게, 현재와 별 다른 것 없어 보이면서도 핸드폰이나 버스 정류장에서 보이는 사소한 미래의 설정들이 돋보인다. 레트로 SF라고 해도 될만큼 올드한 감성으로 그려진 미래의 한국도 꽤나 흥미롭다. '인랑'은 이전의 김지운 감독의 영화들이 그러하듯이 쿨하다. 묵직하고 차가운 SF 영화에 멜로 한방울 떨어트리기는 하지만, 끓어오르지 않고 끝낸다. 오랜만에 나온 괜찮은 한국 SF 영화이기에, 여름 격전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