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착하면서도 뜨겁고, 건조하면서도 팽팽한 이야기의 힘
올 여름 한국 텐트폴 영화들 중 그 마지막을 장식할 '공작'이 드디어 뚜껑을 열었다. '드디어'라는 단어를 쓸만큼 후반 작업이 길었던 영화인데, 작년 여름 크랭크업 이후로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이보다 더 흥미로울 수 없는 현재의 남북 관계는 자연스레 '공작'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진다. 북으로 갔던 공작원 '흑금성'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공작'은 기대 이상의 퀄리티로 놀라움을 선사한다. 총 한번 쏘지 않고도 손에 땀을 쥐게 만들고,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으면서도 마음을 움직인다. 발광하는 현대사를 건조하면서도 침착한 텐션과 템포로 그려가는 '공작'은, 올 한해 한국 상업 영화의 몇 안되는 성취이자 절정이다.
'공동경비구역 JSA'이 나온지 18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꽃미남 북한 특수 요원과 남한 공무원 아저씨들로 밖에 이야기를 만들지 못하는 충무로가 답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작'은 주먹다짐 속에서 꽃피는 남자들의 우정에서 벗어나, 밀도 높은 '이야기'로 승부수를 띄운다. 드디어 한국에서도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나 '스파이 브릿지'같은 영화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반갑다. '공작'이 놀라운 이유는, 10여년 동안 일어난 이야기를 2시간 20분에 가까운 러닝타임 안에 매우 효율적으로 담아내면서도 그 사이에 긴장감과 재미, 유머까지 놓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긴 이야기를 적절한 각색과 가지치기를 통해 늘어짐 없는 속도감과 흡입력으로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2018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미 이 이야기의 과정과 결말을 알고 있지만, 알고도 당하게 만드는 팽팽한 서스펜스가 일품이다.
처음부터 서로를 속이고 속인 줄 알았지만, 알고보니 끝까지 진심이었다. 각자의 굳건한 신념과 믿음은 오히려 색깔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를 보게 만든다. 그들 각자의 목적은 달랐어도 진심은 같았기에 서로를 누구보다 이해한다. 이 과정에서 충분히 총 한발 쏘게 만들고 눈물 한방울 짜내게 만들 수 있었지만, 영화는 다행히도 한눈을 팔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의적절한 영화 속 이야기는 끝나고 나서 의외로 뭉클한 감동과 묵직한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이처럼 한국 첩보 영화의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멱살 쥐고 끌고가는 이야기의 힘도 뛰어나지만, 그 밖의 요소들도 빛난다.
주조연 배우들의 불꽃 튀는 연기는 누구 하나 구멍없이 살벌하게도 잘해냈지만, 그 중에서도 이성민 배우의 존재감은 그야말로 후덜덜하다. 영화의 전체 축을 지탱하는 연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를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감탄을 자아낸다. 속내를 알 수 없었던 '리명운'이라는 인물의 진심을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던 건 그이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비슷한 시기 개봉한 '신과 함께 - 인과 연'으로 누구보다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주지훈'도 밀도 높은 이야기와 선배 연기자들의 팽팽한 기싸움에도 눌리지 않고 날선 연기를 선보이며 자신의 존재감을 내뿜는다. 영화 속의 미술이나 CG도 긴 후반작업 기간이 이해갈만큼 놀라운 수준을 자랑한다. 특히 이제까지 북한 내부를 그린 영화들 중에서는 역대 최고이지 않을까 싶을만큼 생생히 재현해낸다. 작품성으로보나 의상이나 미술로 보나 올 연말 시상식에서 꽤나 사랑받을 영화가 될 것 같은데, 우선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