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정기
인사동 어느 건물
1층 미술용품 판매점
2층 전시장
3층 권명희 작업실
4층 이숙희 작업실
5층 이부열 작업실
권명희와 이부열은 미대 동기, 이숙희는 같은 학교 미대 후배다. 어느 날, 건물 청소하는 여사가 이번에 새로 화실로 입주한 차숙희의 그림을 보고 감탄한다.
"인상파 화가의 색감과 야수파 화가의 선을 사용하시네요."
"어머, 어떻게 아세요?"
"요즈음 이름난 화가들 작품일수록 볼품없더라고요. 이름이 나기 전까지는 죽어라 그리다가, 이름이 난 후에는 대충 그리거든요. 대부분 노인들은 관광버스 타고 쿵작 거리며 국내 나들이를 하지만 저는 노인연금 탄 것과 일해서 저축한 걸로 세계 각국을 다녀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갔을 때 본 그림과 비슷해서요."
"그렇게 세계 여행을 다니시는 분이 청소는 왜?...."
"청소하는 사람도 있어야죠. 세상에는 주변을 더럽히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나부터라도 청소를 해야죠. 깨끗하면 정신이 맑아지잖아요. 나이가 들어도 나처럼 움직여야 용돈도 벌고 건강도 유지하죠."
차숙희는 미대 졸업 후 34년 만에 다시 그림을 그리고 있다. 5층 화실 이부열과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지만, 차숙희를 짝사랑한 어느 남학생의 자살 사건이 발생하자, 그녀는 죽음도 불사한 남학생의 마음에 감동받아 이부열과 헤어져 그 남자와 프랑스로 떠났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차숙희를 죽으라고 사랑한 그 남학생은 의처증이 심했다. 결국 그녀는 이혼을 하고 얼마 후 다시 만난 김형진이라는 사업가와 결혼해 아이도 낳고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다.
어느 날 5층 화실을 방문 한 차숙희에게 이부열이 자신의 100호 그림을 보여준다.
"어머 이건 34년 전 제 모습?"
그 그림은 34년 전 차숙희 전신 그림이다.
"아직도 저를...." 두 사람 입술이 가까워진다.
"선배 가슴엔 키스하지 마세요. 왜 아래로 가요? 거긴...." 격정적인 음악이 흐르고 두 사람 옷매무새를 고친다.
"선배. 나 이제 어떡해요? 솔직하게 얘기할게요. 나 너무 좋아요. 내 평생 이런 느낌 처음이에요."
시간이 지나 차숙희의 전시회 날.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차숙희의 남편 김형진과 차숙희가 손님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순서에 따라 이부열 화백의 축사와 차숙희의 답사가 이어지고 전시는 무사히 마쳤다.
홍천 가는 국도 위.
차숙희가 운전을 하고 이부열이 옆에 앉아 묻는다. "우리 어디 가요?" "팔봉산 근처 홍천에 있는 별장으로 가요."
같은 시간 홍천 가는 국도 위.
김형진이 운전하고 옆에 권명희가 앉아 있다. "형진 씨 우리 어디 가요?" 권명희는 차숙희의 남편 김형진이 화실을 찾아왔을 때 반해버렸다. "팔봉산 근처 홍천에 있는 우리 별장이 있어요. 권 여사는 음성도 고우시고 말씀하시면 노랫소리 보다 더 듣기 좋습니다. 입술도 어쩌면 그리 섹시하십니까?"
"정말요? 진짜 섹시해 보여요? 그럼 키스해 주시겠어요?"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제가 키스를 하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입술이라서요."
"오, 나이가 들고도 멋지고 젠틀한 남자를 만나기가 어려웠는데, 김 선생님이야말로 정말 젠틀하신 분이세요. 함께 드라이브를 하는 게. 이처럼 즐겁고 행복한 마음이 들 줄은 생각하지 못했어요. 저 김 선생님 사랑하게 될 것 같아요."
같은 시각. 차숙희와 이부열.
"선배 나 행복해요. 이렇게 행복해 보기가 처음인 것 같아요." "나도 행복하오." 얼마 후 별장에 도착한 차숙희와 이부열이 차에서 내리고 뒤따라 온 김형진과 권명희도 차에서 내린다.
"아니 여보? 언니? 어떻게 여길?"
"이부열 선배님이 그림 그릴 장소를 찾으신다기에."
"권명희 여사도 그림 그릴 장소를 찾으신다기에."
"아 그래서 오신 거죠? 저희도 그래서 왔어요."
잠시 후, 김형진이 큰 소리로 말한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나는 모든 걸 알고 있었어요. 나는 내 처의 불륜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요. 나는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 아내의 미세한 행동까지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내의 숨소리와 심장의 고동소리 하나까지도 민감하게 감지하고 있었다고요. 그런데 어느 날인가, 아내에게서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번뇌와 희열이 동시에 나타나면서, 내 아내는 괴로워하면서도 또 환희에 젖었습니다. 나는 아내의 불륜 사실을 눈치챘죠. 그리고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까지 했습니다.
저는 놀라고, 배신감에 사로잡혀, 아내를 중오하고, 하늘을 저주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내를 미워하면 할수록 아내가 더욱 예뻐 보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이 내가 부족해서 생긴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아니에요. 당신은 부족한 데가 없는 분이에요. 내게 너무 과분한 사람이에요. 정말이에요."
여하튼 내가 부족해서 생긴 일이니, 아내를 더 사랑하고 아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면, 나도 좋아하고, 사랑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겁니다. 아내의 불륜까지도 사랑해야, 완전한 사랑이고 영원한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완전한 사랑이 우리의 도덕이나 윤리를 초월한 사랑이라고 해도 각자의 영혼
까지 더럽히는 행위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물론 영혼은 그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존재하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영혼이 벌 받을 짓까지 범해서야 되겠습니까?
여보! 내가 잘못했어요! 꿇어앉는다.
김 선생! 제가 잘못했습니다! 꿇어앉는다.
나도요. 꿇어앉는다.
왜들 이러십니까? 일어서십시오!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앞으로는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면 됩니다. 영혼을 생각해서라도요. 자 그 얘기는 그만하기로 하고, 이렇게 제 별장까지 오셨으니, 안으로 들어가시죠.
정원 앞에는 홍천 강이 흐르고 별장 뒤로는 팔봉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어, 파티를 하면, 신선놀음을 하는 것 같을 것입니다. 자~ 우리 모두 파티 장에서 신선이 한번 되어보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