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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클

다시 맞물리기까지

by 이븐도





기훈이는 그 잘생긴 얼굴로 말한다.

.. 지구가 네모나기만 해도 도망쳐볼 텐데 말이야, 왜 하필이면 동그랗게 생겼냐고. 끝까지 도망쳐도 결국 돌아오잖아.


은조는 기훈이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도 모르고 그에게 같이 도망치자고 한다. 은조야, 네 아버지 쓰러지신 거 7할은 기훈이가 당긴 도화선 문일 텐데.. 하여튼 대비감보다는 단색이 잘 받는 건지 까만 티에 까만 자켓 같은 걸 입은 천정명은 그 장면에서 유독 잘생겼고, 매번 가자미눈이던 은조는 처량한 똥강아지 같은 눈을 하고서 쭈그려 앉아 있다.




은조야, 쟤가 어떤 앤 줄 알고 같이 가자 그래. 근데 너 반했지, 저기서? 아냐? 난 반한 듯. 아, 물론 반하기는 15년 전 엄마 옆에서 안 보는 척 보던 그때, 기훈이가 덜 재수 없던 극초반에 진작 반했지만 저 장면의 저 대사가 지금의 나를 치고 갔다. 이제 이 드라마는 이 장면을 위한 빌드업만으로도 볼 가치가 있다. 나한텐 그래.






왜 이런 환경에서 일을 해야 할까 몇 번은 짙게 생각했다. 죽어버린 애에게 입혀야 하는 새 환자복을 가지러 가는 복도를 걸을 때, 구멍을 채울 거즈를 찾으러 처치실로 갔을 때. 아픈데 못 쉴 때, 보호자들이 다른 사람을 응대하고 있는 나한테 말을 걸어 뭘 해달라고 할 때.

전자가 가장 강하긴 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드는 거지. 여긴 아픈 사람이 너무 많다. 왜 이렇게 다 아프지. 어떻게 이렇게 다 고장 나 있지. 근데.. 병원이었다. 당연한 거였다.


백설공주는 자꾸 산소포화도가 떨어졌다. 렁 케어가 잘 안 됐다. 폐 관리? 폐 관리라고 해야 하나. 가래가 폐에 가득 차서 엑스레이가 온통 하얬는데 진료과에서는 석션을 깊이 하지 말라고 했다. 내 팀 환자 옆에 프렙해 두던 하이플로우를 그 팀에서 급하게 당겨 갔고 당직 펠로우는 팔짱을 끼고서 열심히 석션을 하고 가슴을 두드리는 나와 선임 간호사와 그 모니터와 백설공주를 심각하게 쳐다봤다.

엄마는 등을 돌린 채 까만 생머리를 대충 묶고 앉아 있었다. 긴 회색 티셔츠에 거뭇한 얼굴. 그 낯빛과 표정 없음이 말했다. 절망. 눈알이 계속 흔들리고 초점은 없는 그 얼굴과 그녀의 이목구비가 너무 닮아 있어서 조금 슬펐다.




출근할 때, 4일간 가능한 모든 불행에서 떨어져 있겠다고 생각했다. 여행 계획이랄 걸 세우지도 못했는데 제발 오늘은 안 바쁘길 빌었다. 다행히도 많이 바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백설공주가 그럴 때마다 선임을 도와야 했기에 그렇게 여유롭지도 않았다. 새벽 두 시, 백설공주 옆에서 한 시간째 붙들려 있었다. 가래 냄새였구나, 이게. 정확히는 가래와 소변 찬 기저귀에서 나는 냄새가 섞인 것. 그거였다.


이전 병원에서 자주 맡았던 냄새. 병실 하나를 통으로 서브 ICU라고 불렀다. 중환자실에 자리가 없거나, 아니면 이쪽 환자인데 거기로 곧 가야 할 것 같은 환자를 보기 위해 쓰는 병실이었다. 거기서 났던 냄새였다. 대부분은 신경계 쪽으로 비가역적인 손상이 생긴 사람들이었다. 아무튼 죽음에 더 가까워진 사람들. 그녀는 고작 열여섯이었고, 아마 3개월 전까지는 멀쩡했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온몸에서 각질이 떨어지고 누군가 콧줄로 피딩을 해주지 않으면 먹을 수 없고 잔뜩 가래를 뽑아 줘야 했던 나이 든 아저씨들과 그녀가 다를 게 없어졌다. 느끼기 싫었지만 그랬다. 그 냄새가 그렇게 만들었다.





엄마 아빠가 다 몽골 사람인 27일짜리 애기는 엄청나게 울었다. 그래, 울어야 알지, 그럴 때잖아? 머리로는 이해하려 했지만 아무튼 우는 애 옆에 있는 건 나한테는 힘든 일이다.


몇 년 전 독서 모임에 나갔을 때 노키즈 존에 찬성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언쟁을 벌였던 게 생각났다. 나 그때 뭐라고 했더라. 아마 좀 착한 지성인이자 교양인인 척하고 싶어서 반대한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걸 묻는다면? 그때 거기서 만난 남자친구는 노키즈존에 찬성했다. 당시 나는 그를 좋게 보고 있었는데 딱히 굽히는 척도 안 하고 그 의견을 고수하길래 의외라고 느꼈다. 한시적 백수였던 나는, 역시 직장 짬 차서 찌든 사람은 어쩔 수 없나 생각했지.

아무튼 기세 좋게 우는 아기를 보며 그 주제 생각났다.




애들 우는 소리와 이런 불행으로부터 떨어져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우울한 생각도 하지 않겠다고. 그런데 안 됐다.

퇴근하는 버스에서 동기에게 카톡이 왔다. 수선생님 왔냐고. 글쎄, 그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건 봤는데 실제로 벌써 출근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여덟 시, 그녀는 이브닝 출근이었다. 지금 수선생님을 찾는다? 어디가 부러졌거나, 전염력이 있는 병에 걸렸거나, 누가 죽었거나. 아니면 뭐 나처럼 보이스피싱이라도 당했거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거였다. 그녀는 할아버지와 친했다. 옆집에 살면서 저녁마다 할아버지랑 술을 마신다고 했던 게 기억났다. 그게 작년이었다. 강릉으로 가는 차편을 바꾸려고 했는데 본인도 저녁 때나 장례식장에 갈 거라고 했다. 일정을 마치고는 가려 했는데 발인이 아침 7시라고 했다.




작년 하이라이트 두 번째 공연날, 다른 동기에게서 카톡이 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것 같은데 근무를 바꿔 줄 수 있냐고. 가을이었나 이브닝 근무를 하고 있을 때는 대학 동기에게 조모상을 알리는 카톡이 왔다. 친구의 할아버지는 작년 초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또 다른 병원 동기의 할머니도 아마 작년 여름쯤인가 돌아가셨다. 카톡방에 근무 조정을 알리는 공지가 떴던 게 기억난다.

친구는 격달에 한 번은 누군가의 결혼식이나 그 결혼으로 말미암은 집들이 같은 것에 간다. 시기가 그럴 때인 모양이다. 경사와 조사 모두가 잦아지기 시작하는 때.


올 초인가 인근 대학병원으로 할아버지가 가셨고, 거기서 할아버지를 잘 챙기지 않는 것에 동기가 불만을 표할 때, 나는 그냥.. 얼마 안 남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 CIC 해본 적 있어? 없는데, 왜. 했더니 할아버지가 쉬를 못 싸, 하는 말을 들었을 때 이 친구 할아버지 장례식에는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그럴 수 있잖아? 집도 가까웠고 그만큼 함께 같이 일했으니까. 그런데 못 갔다. 28일부터 30일까지 숙소를 잡았다. 어제 그냥 출발을 늦게 했어야 했던 걸까.






서울역으로 가는 길에 절반은 그 생각을 했다. 했다기보다는 내내 미안했다. 딱히 전달될 수도 없고 별로 효력도 없는 것.

도망은 이런 것을 다 벗어버리는 걸 뜻했다, 나한테.

개인적인 의미부여와 마음으로부터, 실효성 없는 것으로부터 다 떠나는 것. 나는 나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런 만큼 내가 좀 지겨웠고 우습기도 해서 벗어나고 싶었다. 환경이고 사람이고 사실 다 부차적인 거고 그냥 내가 문제니까. 자극받지 않으면, 영향받지 않으면 될 걸 신경 쓰고 있는 내가 싫었다.


상당히 유치한데, 자취방에 있는 다이어리들을 가져와 강릉에 버리고 올까 생각했다. 더 개인적인 의미부여인데, 3년 전 3월 30일에 이 병원 사원증을 받았다. 좋다고 찍어놓은 사진을 보니 날짜가 그랬다. 가져와서 바다에 던져 버릴까 생각했다. 막상 와보니 아무튼 쓰레기 투척이니까 가져왔어도 못 했겠다 싶긴 해. 하여튼, 관둘 것도 아닌데 그냥 던져 버리고 올까 생각했다. 그러고 다시 발급받는 거지.






캐리어에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들을 넣는데 묘하게 긴장되고 에너지가 넘쳤다. 돌아보니 정말 졸린 상태에서 각성이 이상하게 되면 그런 것 같다. 그 상태로 어제 혼자 찬바람을 맞으며 쏘다닌 텅 빈 강릉 시내는 추웠다. 이 여행이 마음에 들지 않아지려고 하는 것 같을 때 저 말을 떠올렸다. 어차피 도망은 없다고. 도망쳐봤자 다시 돌아올 거라고.


완벽한 여행, 일상. 뭐 그런 건 없는 것처럼 도망도 없나 봐. 이제 나한테는 그렇다. 맥락은 같을지라도 다른 표현을 찾고 싶다. 계획이 싫지만 결국 계획이 필요한 나와, 지하철이 아닌 버스를 타야만 하는 환경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나와, 내 안의 사람들의 이야기와 뭐 그런 것들에서 아예 유리되는 건 불가능해서. 정말로 안 되는 일이잖아. 하고 싶어도 못 한다.





그리고, 너무 나를 나약하게 만들잖아. 내가 할 수 없는 건 따로 있는데, 나를 공연히 약하게 만들잖아. 도망치려 할수록, 사실은 쫓아오는 실체는 없는데 나 혼자 토끼려고 하는 거였을 때 그 대상은 더 선명해지기도 하잖아. 인간의 의식은 그 정도로는 안 멍청하니까. 다행히도, 불행히도.

그러니까, 그냥 공존하기로 했다. 지겨운 나와 벗어날 수 없는 사연들과 이야기들과. 다시 말해 이런 소중한 것들과.


혹은 갖다 버리든가. 같이 살 게 아니면.

끌어안기에 너무 아프면 이불이라도 둘둘 둘러놓고, 더러우면 씻기고. 안 되겠으면 어디 맡겨서 고쳐 보고.

사는 법이 그렇다. 그래야 할 것 같다.








드라마는 2010년에 방영된 신데렐라 언니, 다.

이어 기훈이가 말한다.


".. 다신, 그런 말 하지 마. 도망치자고? 그래, 가자. 도망쳐버리자. 이 세상 끝까지 가서, 아무도 모르는 데로 꽁꽁 숨어 버리자, 내가 이렇게 나오면 어떡할래, 너? 내가 가자 그러면 정말, 갈 거야? 나랑 같이? 니가 그렇게 괴로우면, 난 대체 어떡하란 말이야! "


이걸 그때는 박력이라고 표현했을까. 징징거린 사람 위로는 못해줄 망정 왜 본인이 성질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였어도 딱히 저 이상의 말을 못 했을 것 같아서 할 말이 없다. 안타까운 걸 어떡해. 그런데 해줄 수 없는 건 어떡해. 참나, 기훈아. 너 대체.. 그 얼굴 아니었으면 어떡하려 그래.


은조한테 잘해 줘라. 알겠니. 다시는 저 따위로 말하지 말고. 딱히 은조가 상처받았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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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돌고 돌아 다시 만날 거잖아. 너는 은조의 그런 모습과 계속해서 마주칠 거잖아. 잘난 입으로 말했듯 지구가 둥그니까. 안 그래?


가능한 다정하고 싶다. 그래야만 하는데, 쉽지 않은가 봐.

너도, 나도. 어쩌면 우리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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