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치는 칼끝
밖에는 비인지 눈인지 모를 게 내린다. 춥고 차가웠다.
언제나 조금은 찝찝하고 불안한 상태로 인계를 준다. 그리고 대충 웃고 깔깔거리며 퇴근한다. 음악을 들으며 잊을 때도 있고, 좋아하는 아이돌 소식을 보며 잊기도 하고, 지인들과의 카톡을 하며 잊기도 하고. 원래 이렇게 퇴근길은 울적한 건가? 아마도. 사실 이마저도 많이 나아진 거 아닐까?
이곳은 나한테 뭘까, 직장이지.
일을 잘하고 싶지 않다. 잘하기 위한 노력을 별로 하고 싶지 않고, 별로 이곳에서 잘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어떤 작정도 없다는 말이 맞다. 고민하고 싶지 않고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계획을 짜서 이뤄내고 싶은 것도 없다. 어차피 나는 중요한 인력도 아니며, 없어서 안 되는 존재 같은 건 더더욱 아니다. 간호사가 병동에서 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으며 연차가 쌓일수록 해야 하는 일만 늘어난다. 보장되는 것도 혜택을 받는 것도 없다. 나는 뭘 더 노력해서 이뤄내거나 애쓰고 싶지 않다. 지금도 충분히 하고 있는 것 같아.
가끔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든다. 이게 내가 잘 하는 일이었으면 좋겠다고. 잘 하는 거, 잘 하는 건 뭘까. 그런데 아닐 때가 많다. 필요한 항목을 놓치고, 누군가의 실수를 잡아내지 못하고, 주치의에게 물었어야 했을 것을 챙기지 못한다. 전적으로 내 부주의였을 때도 있고, 도저히 여건이 되지 않았을 때도 있고.. 부차적인 설명은 많지만 그냥 거기서 거기다.
잘하고 싶지만 나는 잘할 수 없고, 잘하고 싶지 않다.
원래 세상 모든 일들은 형편없다고 했다. 남들의 모든 일이 내 일만큼이나 형편없었으면 좋겠다. 늘 불안하고, 스트레스에 젖어 있고, 나보다 덜 고통받지만 비슷하거나 더 버는 것 같은 모든 이들을 잔뜩 질투하고 미워했으면 좋겠다.
직장은 월급으로 내게 응답한다. 버티는 이에게는 경력도 쥐어진다. 소아과 경력은 물경력이다. 나는 여기서 뭘 얻어가야 할까. 왜 왔을까. 아마 안정적인 삶을 원해서. 취미생활이나 하면서, 이런저런 즐거운 시간낭비를 하거나, 간섭 또는 사랑에서 조금 떨어져 있기 위해서.
병원은 흥미롭고 슬프고 흥미로운 곳이다. 감정을 많이 요한다. 아무것에도 이입하고 싶지 않아도 금세 이입하고 있다.
자취를 시작했을 때, 동기들과 유니폼을 입고 찍은 이미지 사진을 냉장고에 붙여 놓았다. 이 집, 직장 모두 그 유니폼처럼 벗어 버리면 다 끝인 거라는 의미였다. 직업, 직장. 이 직장의 크기, 이곳이 내게 제공하는 복지, 월급 모두. 떠나면 사라진다. 나는 그때 그걸 붙여서 나에게 뭘 경고하고 싶었을까.
안주하지 말고 내실을 키우라는 그런 경각심이 몇 개의 논리를 뛰어 그 사진을 갖다붙인 거였을까, 정말.
서른 개가 넘는 글들. 어떤 것들은 공연히 슬프고 아팠다. 그것들을 쓸 때 나는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다시 집어드니 아픈 기억들이었다. 슬픈들, 울적해진들 아무 소용없는 그 일화들과 감정들. 이 모든 게 다 부질없을 때가 있다. 원래 다 그런데, 더 그렇다. 내가 아무것도 못 느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오늘이 그렇고 지난날들이 그런 것을 거듭해서 말하고 있었다. 나는 가끔 그런 방식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나를 가여워했던 건지도 모른다. 가엾지. 아니, 한심하지. 젊고 사지 멀쩡한 날, 즐거워하지는 못할망정 울적해하는 게.
잊기 위해 썼고 기억하기 위해 썼다. 지난날들이니 그것으로 됐다. 그날의 감정들을 접고 다음날로 떠나 오늘에 도달했잖아. 그날들이 얼만큼의 부피였든 그게 중요하다. 오늘로 왔다는 것. 다행스럽게도 내일이 있다는 것. 그냥 내일이 있다는 것 그 자체로도.
퇴근하는 신분당선 역사에서, 가끔은 뭐 이대로 죽어도 아쉬울 게 없다는 생각이 스친다. 더 이상 기대할 것도 바라는 것도 없는, 아쉬움조차 없는 상태. 여기서는 배울 게 없다는 동기들의 말, 대학원, 경력 관리, 평간호사, 이직, 뭐. 그런 거. 추상적인 단어와 실현되지 않을 강한 표현으로 덮었지만 결국은 이런 평범한 어구들로 나열할 수 있는 고민들.
예전에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던 생각과 목표는 이제 효력을 다 했다. 이런 배부른 감상을 잡고 늘어지는 것을 보면.
오피스텔 창 밖으로 계속 빗방울이 떨어지고 맺힌다. 내가 반쯤 독립해 혼자 있을 수 있게 된 이 공간.
이걸 나중의 내가 본다면 뭐라고 생각할까, 며칠, 몇 달쯤 떨어져 있는 나는 이걸 보고 어떤 것이라고 그제서야 알려줄까.
평범한 직장인의 비애, 권태, 돼먹지 못한 날씨에 따른 적당한 우울감, 아니면.. 뭐 어떤 터닝포인트?
그건 그때의 내가 어디서 뭘 어떻게 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뭐 하니, 너 지금?
직장이다. 직장이라.
제2의 학교. 가끔 인정받고 싶고, 함께 지내는 사람들이 내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누군가의 나보다 나은 능력이나 결과물을 보고 꽁한 마음이 들고, 가끔은 더 잘하고 싶게 만드는 곳. 나를 사회인이라 불리게 한 곳, 퇴사하면 그만이나 어쨌거나 당장의 안정을 주는 곳. 그래서 그렇다. 이 선택이 나에게 최선이었기를 바란다. 여기에 나의 가까운 과거와 현재와 또 가까운 미래가 있으니까. 이런 고민은 당연히 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냥 칭찬이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그랬던 것처럼. 뭘 잘해서가 아니고 그냥 칭찬. 잘했어요, 찍히는 그런 도장 같은 것. 이런저런 긴 말들로 짜낸 특별한 코멘트 말고, 그냥 그 한 마디. 잘했어요.
뭘? 뭘 잘했어요? 나도 몰라. 별로 알고 싶지 않다. 그냥 그런 말이 듣고 싶어. 4월에 눈발이 날리는 이 날씨처럼, 앞뒤없이 그 말이 듣고 싶을 수도 있지. 잘한 게 없어도, 앞으로도 딱히 잘할 수 없을지 몰라도, 어차피 나는 월급으로 응답받는다고 해도 그런 걸 그냥 듣고 싶을 수도 있는 거잖아.
빗방울이 찼다. 바람이 불어 비를 맞았다. 하지만 실제로 피할 수 없던 건 매일의 퇴근길에 눙쳐 놓은 이 고민들이다. 괜한 생각들로 덮고 잊으려 했던 것.
끊기지 않는 고민이라고 해서 생각할 가치가 없는 건 아니다. 언젠가 한 번은 짚었어야 했다.
그래도 이런 성격의 나를 끌고 여기까지 왔다.
그럼 그런 나를 조금 칭찬해 줘야겠다.
그리고, 따신 물로 씻고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