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여자
이건 고흐도 뮤즈에 대한 것도 아니다.
그냥 애들 얘기다. 아이들. 어린이들.
그런데 아이들이나 어린이라고 쓸 만큼 나는 이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그냥 애들이라고 한다.
사실 어떤 이야기도 아니다. 그냥.. 그들에 대한 감상이다.
날씨가 애들 같다.
덜 부지런한 사람만 안전히 살아남을 수 있는 비바람과 기온이다. 패딩과 코트를 다 정리해 버린 이들은 무사할 수 없다. 애들은 날씨를 닮았다. 예측할 수 없고 제어할 수 없고 알 수 없어서 흥미롭다. 굴복할 수밖에 없다.
발령지가 병동 숫자로 되어 있어서 뭘 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검색해 보고서야 알았다. 소아청소년과요? 실습 때 애가 딱 한 명 입원해 있던 그 소아과? 그렇구나. 아니, 그렇구나가 아니잖아. 참으로 쌩뚱맞아서 웃음만 났다.
어쩌다 성인 환자들을 보게 되면 놀랍다. 아픈 정도와 부위에 대해서 이렇게나 유의미한 대화를 조용히 할 수 있다니. 이들이 말하는 모든 게 진실은 아닐 수 있지만 그래도 투약이나 치료 방향에 참고할 만한 쓸모 있는 사실이라는 것이 너무나 반갑다. 아닌 사람들도 많지만.. 대체로 그렇다.
이렇게나 물 흐르듯 대화 비슷한 것, 아니 그냥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이렇게나 알아서 가만히 있어 주신다니 매 환자가 신비롭다. 병실을 돌아 나와서 한 번 숨을 참아 본 적도 있다. 어떻게 이렇게 계실 수 있는지 낯설어서, 내가 혹시 못 잡아낸 기류 같은 게 있을까 봐. 물론 없다. 다 자는 게 아니고 모두가 깨어 있는데도 가끔은 그렇게나 조용하다.
애들은 대체로 시끄럽다. 시끄럽고 알 수 없고 시끄럽고 통통하고 귀엽다. 놀랍다. 스펀지가 든 커다란 난간 쉴드가 세 개 끼워진 침대, 안 끼워진 부분으로는 케이지처럼 높은 난간이 올라가 있다. 애들은 그 사이로 나를 신기한 생명체 보듯 본다. 나도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나 로비와 복도에서 보호자에게 안기거나 유모차에 누운 그들을 그런 눈으로 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왜 그렇게 빤히 보는지 모르겠어서.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우리는 영원히 서로를 모른 채로 본다. 그걸 인지하고 기억에 남길 건 나뿐이다.
그런 행동에는 아무 의미가 없지만 나는 그 순간이 좋다. 왜 좋은지는 모른다. 그냥 좋다. 지금 무슨 생각하냐고 내가 끝없이 묻는 것처럼 시선을 응시하는 순간이 좋다.
그들은 답하지 않는다.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며 뭘 하고 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딱히 피하지도 않는다.
어디선가 마주치는 애들. 수액 폴대가 없고 병원복이 아닌 알록달록한 치마나 드레스를 입고 작은 신발을 신은 그들. 어른들은 시선을 피하거나 휴대폰이나 그들 개개인의 인생을 바라보며 걷지만 그들은 그냥 쳐다보고, 웃는다. 뛰거나, 이것저것에 대해서 있는 대로 질문하고, 보잘것없는 것에 토를 달고 쫑알거린다. 신기하다.
왜 도망가거나 숨기지 않을까. 아닌 척하지 않고 괜찮은 척하지 않을까. 한다 해도 티가 난다. 알아주는 게 그들보다 덩치가 큰 내 몫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딱히 좋아할 이유가 없다. 애들을 좋아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은 어린이집 교사의 푸념을 들은 후에 대답해야 한다. 나는 우리를 탈출한 동물들마냥 틈만 나면 사방으로 퍼져 있거나 꼬물거리고 괴성을 지르며 움직이는 그들에게 뭔가를 가르치고 그들 각각이 다치지 않게 놀 수 있도록 돕고, 그들을 사랑하는 그 부모들을 상대하면서 직장생활까지 할 자신이 없다. 지금 받는 월급의 세 배를 준다고 하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배? 안 된다. 세 배도 사실 좀 모자라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처방을 사이에 두고 그들과 공존한다. 공존하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그들은 흥미롭다.
어떤 존재길래 부모들의 저런 비이성적인 면들이 나오는 건지도 흥미롭다. 어느 순간 어떤 보호자는 작은 것에도 엄청나게 화를 내며 예민하게 굴었다. 커튼을 열고 처치를 하려 할 때마다 특정 질환 사람들이 모인 온라인 카페 글을 잔뜩 읽고 있다. 애 몸에 기계가 삽입되어 있으니 응급실에서부터 모든 의료진에게 워치를 빼라고 한 보호자도 있다.
입원을 준비하던 동기가 그 코멘트를 읽고 애플 커뮤니티에 그것을 검색했다. 딱히 영향이 없다는 응답을 그녀가 읽었다. 당직이던 주치의는 한숨을 쉬고 우리는 웃었다. 야, 설명드려, 그럼. 이건 이러이러해서 상관없다고. 그리고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 보호자는 본인이 자리를 비우면 영상통화를 켜 놓은 휴대폰과 기기들을 침상과 캐비닛에 올려 두었다.
애가 많이 아프다는 건 어떤 걸까. 우리는 예측한다. 어떤 증명된 근거나 논리적인 설명도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거라고. 공연히 누군가를 말이 통하지 않는 이로 치부하는 건 절대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없으나.. 뭐가 어떤 전자파를 보내서 교란을 일으키고 특정 음식을 먹고 먹지 않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은 이미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을 거라는 가설을 대충 세웠기 때문이다. 딱히 더 명확한 이유를 댈 수는 없다. 그냥. 그렇게 느껴진다.
그들이 뭐길래 그들은 그렇게 보호하려 들까. 흥미로운 일이다. 자기가 낳았기 때문에? 약하기 때문에? 본인이 낳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그렇게 애들을 싸고돌 때가 있다. 그 애정의 방향이 비틀려 있든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올바르든 아무튼 궁금한 일이다.
애정을 주어도 그들은 가만있거나 뚝딱 일어나서 나에게 맛있는 것을 해 주거나 알아서 슈퍼에서 먹을 것을 사 와 배고픔을 채우고 이를 닦고 잠들지 않는다. 신기한 일이다. 왜지. 오히려 항상 낮은 의자를 찾아 주거나 손을 잡고 다니며 아무런 일이 없는지 아래를 내려다보며 계속 신경을 써야 하고, 나는 한숨도 자지 못할지라도 밤새 빽빽 울어대는 것의 원인을 찾아 해결해 줘야 한다.
왜 배척하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왜지? 정말 인류의 대가 끊기면 안 돼서? 정말 신기한 일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이 귀찮고 악마 같고 손이 많이 가며 아웃풋도 없는 나약하기만 한 것들을 우리는 왜 지금껏 보필해 성장시키려 했을까.
미술에 문외한이다. 다른 분야들처럼 역시나 모른다. 진짜 모른다. 고흐가 여자의 초상화도 그렸다는 걸 전시장에서 처음 알았다. 이태리 여인, 이라는 제목이었다. 애인이었겠거니 생각했다. 대충 맞았고 뮤즈였다고 한다. 그렇구나. 고흐와 관련된 사람은 고갱밖에 몰라서 아마 그 사람이 고흐 인생 전반의 정서적인 지지 같은 걸 책임진 줄 알았다. 비슷하지만 다른 존재가 하나 더 있었군.
그 여자는 고흐에게 뭐였을까. 돈도 안 되는 그림을 그렇게 그리는 가난한 삶을 사는 그에게 그녀는 어떤 존재였을까. 어느 것으로 보나 그 무엇으로부터 딱히 유의미한 도움은 못 받은 생 같은데. 그녀에게도 마찬가지고.
아마 질문을 많이 주는 존재였을까. 흥미롭고 궁금하고 뭐 그런. 애들은 내 뮤즈가 아니다. 나한테 뮤즈는 무슨.
낳아 본 적도 이 병원이 아니었다면 이렇게나 많이 볼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특별한 경험이다. 양육자도 그 무엇도 아닌 입장에서 이렇게 애들을 잔뜩 볼 수 있다는 것은.
얕은 경험은 언제나 흥미롭다. 애들이, 어린애들을 보는 지금이 가끔, 자주 내게는 그렇다. 그들은 정말 흥미롭다. 예보처럼 예상하더라도 막상 불어닥치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산을 들거나 두꺼운 옷을 껴입는 것처럼 맞춘 대처를 해야 한다. 날씨는 잘못이 없다. 애들도 그렇다.
엄청난 변수 덩어리들이다. fascinating.
그런 존재며 경험이다. 이들을 보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