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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나 싫어해요?

눈 감고 출퇴근하기

by 이븐도





사실 내 글들은 전부 끔찍하게 길다.

거기다, 보잘것없는 신변잡기가 대부분인 주제에 답지 않은 당부와 결심과 희망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매번 엇비슷한 얘기를 줄줄줄 풀어서 중구난방으로 산만하게도 쏟아 놨다. 세 줄 요약까지 갈 것도 없이 한 줄 요약이면 충분하다. 마지막 문장만 읽어도 되고.

음. 근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읽어야 하나? 그 문장이 인생의 마스터키나 인류의 비밀도 아니며 내가 무슨 시대의 현인도 석학도 셀럽도 아닌데. 그치, 정말 그러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어 주시는 분들 정말 제가 늘 황송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 재밌었으면 좋겠는데.. 아하하하하..






연말에는 평가를 한다.

익명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진위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익명이 아니더라도 병원 측에서는 익명이라고 할 거고 실제로 익명이라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는다. 특정 직급의 사람들한테는 다 보인다는 말은 꾸준히 돈다.


작년에도 했다. 귀찮아서 미루다가 수선생님이 잔소리를 해대서 막판에 했다. 그녀가 내게 바가지를 긁자 병동의 모두가 아닌 척 나를 집중하는 게 느껴져서 대충 클릭으로 모두에게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줬다. 원하지 않는다면 코멘트를 따로 쓸 필요 없다.

물론, 이십 명 이상의 인원을 열몇 개씩의 항목을 거쳐 평가하는 것의 귀찮음을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나 증오가 뛰어넘는다면, 해 줘야지. 감사 또는 복수. 나는 그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동기들에게, 사랑행 너네는 항상 멋져 같은 말을 쓰고 싶었지만 어쨌든 키보드를 치는 소리가 나면 그 듀티의 모두가 그걸 슬쩍 기억할 듯해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그 평가들이 공개된 모양이었다.




".. 화가 많다고 써놨대요."

"그랬대? 근데 사실이잖아."

(정말이다. 어쩌면 그조차도 많이 순화한 표현인데?그만한 말이길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선생님 아니냐던데요?"

"뭐, 나? 그거 쓴 게?"

"네. 그래서 기분 나빴어요."

나도 덩달아 기분이 나쁘길 바라니, 참나. 왜 이런 걸 알려주는 거야. 샐쭉한 표정으로 보니 정말 좀 안타까운 것 같았지만 뭐, 얼마나 뭘 알 수 있겠어.

"나 아냐. 나 의심받을까 봐 아무 말도 안 썼는데?"

"그냥 쌤을 말하는 게 싫었어요."

"어, 그래. 고맙다. 근데 맞는 말인걸."

"크크크. 그러니까요."

"더한 말도 쓸 수 있었을 텐데. 착한데?"






아무튼 나 아니라고. 이씨. 나 아니라니까? 이거 뭐 나가서 저 아닙니다, 의심받을까봐 아무 말도 안 썼는걸요? 할 것도 아니고. 가불기잖아. 익명이라던 이 평가처럼. 이래도 안 믿고 저래도 안 믿을 거고. 말하는 게 더 이상해.

하여간 성격 더러운 티는 고루고루 내고 다녀. 그리고 이런 걸 왜 찾니? 찾지 말라고 익명으로 만들어 놔도 굳이 굳이 색출해 내는 인간들이 있어요.


아휴. 진짜.. 그렇다면 좀 그렇다고 받아들일 것이지. 그게 뭐 어떻다고. 왜 그러는 거야? 긁혔어? 지도 아나 보네. 같은 성질머리. 나냐고는 뭐 하러 떠들고 다니니, 누가 동조해 주길 바란 거야? 그래. 내가 그렇다 이거지. 아. 머리 아파. 괜찮아. 야, 걔가 병원장도 아니고. 월급 걔가 줘? 아니잖아. 뭐라 떠들든 뭘 더 할 수 있는데.



..


너 나 싫어? 어. 싫다고. 아하, 싫구나. 응, 나도 너 싫어.

음. 사실 개싫어.

왜, 긁혔어? 근데 그거 나 아닌데. 아, 긁혔구나. 그래. 근데 왜 신경 써? 성격 파탄난 건 사실이잖아. 알고는 있구나?

피차 비슷한 사람들끼리 그냥 못 본 척 살면 되지, 난 굳이 뭐 하러 끌어들여. 으휴.


, 하고 온갖 쿨한 척은 다 했다.

그리고 한쪽에서 열심히 생각했다. 누가 날 싫어하면 어떻게 했더라. 언제였지, 마지막이? 학교 다닐 때.. 고등학교? 아닌데. 중학교? 사실 없었나. 그럴 리는 없고. 기억도 안 나.

흠. 어땠더라?






어땠는지, 그때는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나긴 했는데 너무 오래됐다. 나는 현장체험학습 시즌이면 그 쪼끄만 속을 은은히 끓였다. 그래서 아예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부터는 스탠스를 바꿨다. 나를 포함해 '단짝'인 조합이 셋이면 그냥 내가 버스에 혼자 앉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니 대단하긴 하다.


그때는 휴대폰도 없고 이어폰으로 들을 만한 뭔가도 없을 땐데. 아마 책을 가져갔던 것 같다. 그러면 누구도 싸우거나 은근히 감정이 상하는 일 없이 소풍을 종료할 수 있었다.

애들은, 내가 고독을 씹으며 소풍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며칠 전에 밝히면 ㅠㅠㅠ혼자 가두 돼? ㅠㅠ 했다. 그러면서도 거부는 하지 않았다. 둘은 나란히 앞자리에 앉고 나는 혼자 뒤에 앉았다. 출발하면 그들은, 안전벨트를 풀고 무릎으로 일어나 나를 향해 등을 돌리고 왕꿈틀이를 먹고 컵에 부어놓은 아우터를 씹고 그랬다. 그러면 다녀와서도 똑같이 교환일기를 쓰고 가슈가룬 스티커를 공유하고 좋아하는 남자애 얘기도 하는 등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사이가 어찌저찌하다 틀어진 적? 있었다. 누가 말을 그 사이에서 이상하게 옮겼던가. 쟤 그때 급식실에서 니 뒷담화했어, 라고 했는지 나한테는 장문의 쪽지 같은 게 왔었던 것 같기도 하고. 절교장이었나. 맞아, 그 거였다.

아휴, 콩알만한 때도 그런 짓을 하는 애들이 있었다. 복잡한 세상 편하게 좀 살자, 아직도 그러고 살려나.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그 애기들. 여하튼 그런 일이 있고서 그녀의 냉대에 나는 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여차해서 아빠를 따라 두 달간 떠나 버렸다. 물론 걔들이 이간질해서는 아니었고.


돌아오니 가을이었고 나는 그냥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 같고 새 친구가 또 생겼다. 그러고? 4학년, 5학년 다 재밌었다. 6학년도. 그러니까, 기억이 안 나. 울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건.. 뭐 마음이 복잡했겠구나, 정도.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알아내고 싶었는데 너무 오래된 일이었고 생각도 안 난다. 대응 방책.. 없었잖아? 도망갔네, 엄마아빠동생이랑 햇빛이 아름답고 땅이 넓은 지구 반대편으로. 아하하.




그렇다고 지금 이렇게 도망갈 순 없지. 아. 내가 왜 도망가. 어디로 가게, 뭐 하게, 가서. 걔가 월급 줘? 걔가 너 잘랐어? 아. 어떻게 이렇게 변하는 게 없냐. 학교 다닐 땐 반이라도 바뀌지 직장에서 이런 인간들을 마주치니 답이 없다. 정말.


반배정? 반배정은 얼어 죽을, 쟤 연차 차서 떠나기 전에 내가 퇴사할지 어떻게 알아. 아휴. 별로 안 바쁜 저녁, 별의별 생각을 다 하느라 골이 땡겼다. 짜증나. 이건 짜증나는 거야.

에휴. 지겨워. 일찐이야? 만약 나라면 어쩌게? 왜. 찾아와서 너.. 나보고 화가 많다고 그랫서?? 하고 머리끄댕이라도 잡게? 차라리 그게 낫다. 개싸움이라도 대놓고 하는 게.






나에게 그 소식을 전해준, 도무지 의중을 알 수 없으나 아무튼 나를 좋아하는 것만은 꽤 확실한 그 후배와 올해 들어온 신규와 이 병원에서 거의 9년을 있던 선임 선생님과 함께 퇴근했다. 신규는 1층에서 내리지 않았다. 새로 지어진 기숙사로 가려면 여기서 내려 쭉 걷는 게 빠르다고 했다.


아하, 그렇구나. 2인실이 30만 원이라는데요? 진짜? 병원 진짜 양아치다. 편의점 같은 것도 없대요, 그래서 애들 다 여기서 뭐 먹을 거 사가던데. 1인실은 50만 원이라고 들었던 것 같아요. 야.. 너무한다. 그러게요. 사실 좀 더 일찍 지었어도 됐을 텐데, 이제야 지어 놓고 비싸기까지 하네. 그래도 가깝기는 하다. 아, 저 정도로 가까운 건 너무 별로지 않아요?




난 진짜 싫은데. 퇴근해서도, 퇴근하는 중에도, 현관문을 닫고 들어가서도, 일어나서도, 출근하는 중에도 보이는 이 건물. 너무너무 싫을 것 같은데. 나는 그래서 그 커다랗게 조성된 하천변을 안 갔다. 이름 바꿔야 한다. 병원 이름 붙여서 그 이름으로 다시 등록해도 안 이상할 정도로 병원은 하천을 잔뜩 굽어보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너무 열이 받아서 (사실 무섭고 쫄려서) 이 동네에서 일 년 사는 동안 호수공원은 백 번을 갔지만 거기 2년 살면서는 다섯 번도 그 주변을 걷지 않았다. 그냥 병원이 있는 동네 자체가 싫었다. 어쩌다 노는 날 그 역에서 환승이라도 해야 하면 즉시 기분이.. 잡쳤다.




에이, 그래도. 이 거리면 그냥 눈뜨고 병동까지 오는 거 10분이면 되겠다. 지각을 할래야 할 수가 없지,라고 9년 일한 그 선임이 말했다.

아이, 그래도요. 절대 싫어요. 돈 주고 살라고 하면 모를까.

너 한 달에 교통비 얼마 쓰는데.

한 20 쓰죠. 하하.

야, 나 같으면 저기 산다. 얼마나 좋아, 가깝고.

이래야 9년을 다닐 수 있나, 생각하는 찰나에 그녀는 버스 등받이에 몸을 잔뜩 기대면서 말했다.


"싫지. 그러면 눈 감아. 눈 감고 걸어버리면 되지. "

"네?"

"회피해, 그냥. 나는 다 회피하는뎅."

"아이, 그게 눈 감는다고 안 보여요? 이 정도면 퇴근하고서도 하루 종일 보여요."

"티비 봐~ 집갈 때 눈 감고 가서는 티비 틀면 되지. 안 그래?"

나는 사실 그전부터 슬슬 끅끅거리면서 웃고 있었다. 그러게. 눈 감고 걸으면 되지. 보기 싫으면 안 보면 되지.

"너 집에서 계속 창문만 쳐다봐? 냉부해 보고 나는솔로랑 신들린연애 봐. 야, 신들린연애 재밌더라, 봤니?"






아니, 안 보는데요. 사실 웃느라 대답을 못 했다. 그 단순한 말이 왜 그렇게까지 웃겼는지 나는 허리가 아플 정도로 웃었다. 얘 왜 이래, 너 오늘 많이 힘들었니? 왜. 안 바빴잖아. 어우, 시끄러. 넌 봐? 그거 재밌지. 야, 솔지보다 그게 더 재밌어. 신박하지 않냐? 무서운데 재밌다니까.


눈을 감고 어떻게 걸어요, 아니. 뭐 부딪히면 어떡하냐고.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눈을 왜 감고 걸어. 나는 눈을 감고 뒷걸음질로 출근하고 퇴근하는 나를 상상했다. 퇴근하고? 그렇지, 그냥 비스트 하이라이트 영상이나 보고 어쩌다 보이는 저 건물이 꼴보기 싫으면 에라이, 씨. 하면 되지. 아니, 사실 그녀라면 여기까지도 안 갈 것 같았다. 눈감고 걸어~ 아, 오늘 냉터뷰 재밌던데, 이러고 만다는 거 아냐. 그런데 맞는 말이잖아. 뭘 더 할 수 있지? 정말 없었다.






나는 지하철역에 내려서도 웃었다. 그 후배가, 뭐가 그렇게 웃겨용? 했다. 아니, 저 말이 너무 웃기잖아. 눈 감고 걸으라고. 그게.. 웃기긴 하죠. 야, 다치면 어떡해. 이 계단도 못 내려가. 아니, 쌤 내일 오프예요?너무 좋아하네. 아니거든. 그냥 그게 웃겨. 넌 안 웃기니.

아무튼 잔뜩 웃어서 기분이 좀 나아졌다. 반대편으로 가는 후배와 찢어져 지하철에 오르자 뭐 그리 골머리를 싸매며 방법을 찾고 거진 이십 년 전 일을 회상했나, 싶었다.

눈 감으면 되는데. 진짜잖아?






해결책은 때로 아주 간단하군. 길게 써서 분석하고 뭔 이런저런 같잖은 결론을 내고 할 것도 없이. 그런 문제를 깊이 파고들어 봐야 진짜.. 대가리만 아프다. 이런 곳에 머리를 쓰는 건 그런 표현이 적합하다.


비장하게 소리칠 것도 없고. 그냥, 눈 감고 걸으면 되는 거 아닌가. 안 보면 되지, 싫으면. 어떻게 안 보는데?

간단하다. 눈을 감는다. 그러면 될 걸 뭘 그리 쓰잘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참, 나. 웃어서 배가 아픈 만큼 괜찮아졌다. 그래. 난 뭐 인생의 중대한 문제를 마주했던 게 아니고 그냥 기분이 언짢은 거였다. 이렇게나 쉬운 걸.




집에 가서는 내일 무슨 샌드위치를 먹을지, 아니면 밥을 먹을지만 생각했다. 사실 프링글스나 왕창 먹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위장이 바깥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속 안 불편하게 잘 수 있잖아, 그렇게 먹고도.


이어서 5년 전의 내게 말해 줬다.

다이어트 생각 작작 하고 더 먹고 더 자라고.

이젠 탈 날까 봐 야식 생각도 안, 아니 못 한다고. 여전히 남들한테 잔뜩 쫄아. 쫄보인 것만은 똑같지만.

맛있는 거나 많이 먹으라고, 콘칩이랑 프링글스 먹고 꼬들한 라면에 밥 먹어라, 많이. 라고 조언해 줬다.






그리고 그녀가 다음날 병동에서 보이자 눈을 감았다.

속으로 많이 감았다. 안 보인다, 안 보인다.

나 눈 감았다,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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