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처럼 달랑달랑
집에 오면 떡이 되어 잤다. 날씨가 선선해졌는데 복층은 벌써 약간 덥기 때문에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이리저리 생각해보다가 단어를 고른다. 이건 우울이다. 우울이 맞다. 사치스러운 현상. 무용하고 뒤처진 감정.
의도적으로 늘 피했던 것. 그래서 노는 날마다 차라리 일하러 가는 게 맞겠다는 생각을 했던 거였다.
사람들을 만나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을 듣고 에너지를 썼다. 최선을 다했다. 그게 예의잖아. 앉아 있다 보면 정말로 집중해서 듣게 되었지만 어쨌거나 내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피해를 주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무게를 얹어주고 싶지 않으니까.
상대가 공감한다고 해서 공감한 게 아닐 것이며 딱히 위로를 듣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정말 어쩌라고인 감정이다.
이게 바로 우울이다. 우울이 아니면 뭐라고 해. 짜증난다. 우울 맞다. 이럴 땐 뭘 하지. 소설이라도 써야 하나?
그래서 쓴다, 소설.
어떤 일로 오셨죠? 상담 받으려고요. 그러시구나.
힘드세요? 네. 조금. 뭐가요?
그냥요.
그냥? 그런 단어로는 상담을 해 드릴 수 없어요.
상담사라면서요. 제가 입 안 열어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니예요? 당연히 아니죠. 네.
뭐가 힘든데요.
힘든 건 아니고 그냥 생각을 지우기 힘들어요.
힘들다고 하신 건데.
생각을 지우기 어려워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라.
우울이라고 불러요, 이걸?
그래도 되죠.
우울은 짜증나는 단어니까 그냥 저렇게 말할게요. 생각을 지우기 힘들다.
무슨 생각을 지우기 힘드신데요?
음.
비웃지 않으신다고 약속해요.
제가 왜 비웃어요. 상담사인데.
다 잊어버리시겠다고 하세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저는 로봇이 아니예요. 이건 월급 받고 하는 일이라 그렇게 의미를 둬서 제가 기억할 이유가 없어요.
그렇네. 맞아요.
이제 말하시나요?
밑밥을 너무 많이 깔았네.
그걸 이제야 아셨다니. 뭔데요?
애들이 죽어서 슬퍼요.
애들이 죽어서 슬프시군요.
네.
아이가 있으신가요?
아니요.
임신 계획이 있으세요?
미혼입니다.
아하.
사고 같은 걸 목격하셨나요?
아니요.
어디서 보셨죠, 그런 걸?
병원에서요.
자주 보세요?
아니요.
언제 마지막으로 보셨죠?
아마 작년 11월이요. 12월인가. 11월이 맞나. 올해인가.
처음이신가요?
아니요.
근데 왜 오셨죠.
상담받으러 왔다니까요.
그게 왜 슬퍼요.
그래서 온 거예요. 제가 싫어서.
자기혐오라, 그럼 처음부터 그 얘길 하셨어야죠.
유치하잖아요. 애도 아니고.
그건 그렇죠.
왜 오셨다구요?
애들이 죽어서 슬프고 그걸 여지껏 붙들고 있는 제가 싫어요.
그렇군요.
제가 좀 남의 불행을 사랑하나요?
그럴 수도 있죠. 시간이 많으면?
요근래만 그랬던 것도 아니예요. 종종 했어요.
뭘요.
그런 생각.
무슨 생각요.
애들 생각.
언제 하셨는데요, 또?
올초에 추울 때, 판교에서 버스 기다리다가요. 고아원 봉사활동을 찾아본 적 있어요.
가시려고요?
아니요.
근데 그걸 왜 찾아봤어요.
그냥 무슨 빚진 기분이 들었던 것 같아요.
무슨 빚이요. 애도 없으시다면서요.
그러니까요. 그래서 열받는다고요.
열받아요?
네.
빚을 왜 갚지. 직업이 어떻게 되시죠?
간호사요.
애들을 봐요?
네.
취직한 지 얼마 안 되셨어요?
내 친구랑 똑같은 말 하시네. 뭘 모르시는 것 같은데. 하하.
제가 뭘 모르는데요.
막 들어갔으면 그런 생각 못 해요. 일하기 바빠서. 실습처럼 옆에서 일하는 거 구경하는 수준에서나 그런 생각 하지.
왜 그렇게 말해요.
제가 그랬으니까요.
아.
사고 치면 친절이고 연민이고 없어요. 있는 일 똑바로 하는 게 친절입니다.
그러시군요. 이제 잘 하시나요, 일은?
몰라요. 뭘 더 어떻게 하라구요. 못 해요.
네에.
힘들어요.
힘드시군요.
지겨워요.
지겨워요?
불행이 너무 많아요.
누구한테 이런 말 하세요?
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는데 잘 안 하죠.
하기 힘든가요?
지하철이 붐벼서 빡쳤다는 사람 앞에서 병든 애들이 가여워 울었다고 하면, 내가 뭐가 돼요?
그건 그렇죠.
그냥 대화가 망해요. 인간관계도요. 몰라서 물어요?
맨날 참아요, 그런 걸?
네.
왜 참아요.
말했잖아요. 맨날맨날 나만 불행하다는 것처럼 굳이 티내요, 그럼? 다 저러고 살 텐데.
그건 그렇죠.
저 퇴근하고도 몇 번 울었어요.
왜 그러셨어요.
저도 몰라요.
일할 때 울어요?
아니요.
누가 알아 줬으면 좋겠어요?
그럼 그 알아 줬으면 좋겠는 사람에게 가서 떠들었겠죠. 문 닫고 나오면 끝나는 여기가 아니라.
그만두실 수 있어요?
아니요.
취미가 뭔가요.
가끔 뭐 쓰기도 하고, 근데 그건 취미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달리기를 하긴 하는데 뭐 그렇게나 매일 하는 것도 아니라.
뭘 좋아하세요?
하이라이트요.
그게 뭔데요.
연예인이요. 비스트.
아하. 아이돌.
그래서 우울할 시간 없어요. 봐야 할 비하인드 영상도 콘서트 영상도 많아요.
그렇죠. 그러고 있기에는 시간이 없죠.
맞아요.
잘 아시면서 왜.
그래서 왔잖아요. 상담.
아하.
네.
또 하실 말씀 없어요?
저는 이러고 있는 제가 싫어요.
왜요?
그 큰 병원에서 나만 일하고 있는 것처럼 유난을 떠니까요.
그럴 수 있죠.
이게 정당한 거면, 제가 기만을 하고 있거나 걔들 불행을 소비하고 있는 게 아니면, 당연한 거라면. 다른 사람들도 이러고 있어야 하거든요. 근데 없어 보여요, 나 말곤.
그렇게 느끼실 수 있죠.
아, 안 보이는 건가.
네. 어디 써붙이고 다니지 않으니까요.
그러네.
너도 이마에 나 슬퍼요 붙여놓진 않았잖아요?
그렇죠.
그래도 괜찮아요.
괜찮은가요?
네.
괜찮죠. 다들 안 보이는 데서는 그러고 있을 건데.
그렇죠.
또.. 그거 아니더라도, 어차피 사람은 다 스스로 싫어하는 모습을 다 가지고 살던데요.
아. 많이 보셨겠구나.
네.
음.
좀 싫어해도 돼요. 싫어하시다가 지치면 그 모습이 사라질 수도 있고, 그냥 또 익숙해지실 수도 있고.
그래요.
혼자 사시나요?
네.
어머니 아버지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마지막으로 그런 걸 말한 게 언젠지 기억이 안 나네.
그만두실 건가요?
아니요.
언제 출근이시죠?
내일도요.
뭐 하고 싶으세요.
이따 친구 만날 건데 그냥 잔뜩 마시고 안 일어나고 싶어요.
하시면 되죠.
집에 와야죠.
흠.
골때리죠? 어쩌란 건지.
괜찮아요. 다 그러고 살아요.
다행이네요.
정말이에요.
그래요.
밥 잘 챙겨드세요. 잘 주무시고.
네.
그게 결국 다예요.
운동 하시고.
네.
지금도 괜찮고, 앞으로도 괜찮을 겁니다.
네.
그럼.
다들 이렇게 살죠?
종류가 달라서 그렇지 다 비슷합니다.
너도 그래요?
저요?
네.
네. 약해빠진 사람들이 와서 하루종일 징징대다가 가거든요.
그러네.
근데 너도 그럴 거 아니야. 뭐 달라요?
그렇죠. 똑같아요.
그럼 괜찮네요.
네. 그래서 괜찮아요.
됐어요, 그럼.
끝인가요?
넵. 가보겠습니다.
네. 안녕히 가세요.
아픔, 또 그 비슷한 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설명을 해야 했다. 그 설명을 하고 있을 스스로가 싫었고 시간이 아까웠다. 지금도 그렇다. 아빠가, 본인이 전시에 죽여야 하는 사람들의 가족들이나 친지들이나 그들이 고통에 떨 모습을 상상했다면 그 자리에 오래 있지 못했을 것이다. 아빠나 군대에 몸담은 모든 이들이 냉혈한이거나 뭐 그래서가 아니라.. 그냥 그건 그런 영역과는 약간 비껴나 있는 거였다.
직업. 어쩌다 하게 된 일. 어쩌다가, 시간을 많이 보내고 인생에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일. 하루 24시간 중 열 시간 넘게를 쓴다면 그건 인생이 맞다. 싫고 좋은 것과는 별개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라고. 구태여 위선이니 가식이니 붙이지 않아도 뭐 이런 모습을 끌어안고 있다가 보면 떨어져 나가고 싶은 순간이 오겠지. 그 자세로 있는 게 너무 불편하거나, 이제 다른 인형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거나.
오늘의 그.. 지우지 못한 생각은 위베어 베어스의 그리즐리 키링이다. 흐걍, 하는 입모양과 표정으로 가방에 달려 있다. 박스 하나를 다 채운 열쇠고리들. 작은 인형들. 나는 그걸 내 우울 또는 꼴보기 싫은 모습의 형상화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달고 다닐 거, 지울 수 없고 다 갖다버릴 수 없는 것. 그냥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거려니 생각할 수도 있고 귀엽기도 하잖아. 이건 생각의 흐름이 내 마음이나 머릿속 어딘가에서 발원한 중요한 생각라는 걸, 아주아주 부정하기로 했다. 내가 그렇다는데 뭐 어쩔 것인가.
하루치의 그 지우지 못한 생각들이 지겨워지면 또 다른 것으로 바꿔 달고. 상자를 뒤져 또 마음에 드는 것을 찾고.
나는 내 생존과 안위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귀중한 쉬는 날에 저런 생각을 하고, 당장 씻고 즐거워해도 모자랄 퇴근 후에 그러고 있다는 건 그런 키링이 필요하다는 반증이다.
당장의 내 삶에서 그 두 가지가 모두 충족되어 다른 유희거리가 필요한 것. 나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눈물도 짜고 혼자 슬퍼하기도 했다. 적당한 불행을 마시고 싶었던 것이다.
곰이 나를 보며 입을 헤벌리고 있다. 지겨워지면, 재미없어지면 알아서 그만 달고 다닐 것.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인 것. 지금의 그 생각은, 근래의 감정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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