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 신화
"잘 있어요?"
"갔다"
"아, 언제요?"
"열흘 안 됐지."
그렇구나.
그 친구는 내가 신규로 입사했을 때부터 늘 있던 애였다. 딱히 떠오르는 기억은 없다. 말을 못 했기 때문이다. 말도 못 하고 눈도 못 뜨고 움직이지도 못 했다. 나는 작년에 다른 병동으로 파견을 갔을 때 거기서 그 친구를 늘 봐주시던 간병인을 마주쳤다. 걔는 항상 입퇴원을 반복했다. 내가 다른 간호사들과 똑같은 유니폼을 입었어도 보호자들로부터 '학생이세요?' 소리를 듣던 때부터 '선생님은 잘 해주시잖아요' 같은 말을 드문드문 들을 수 있게 되기까지.
그 전 해 여름에는 이마에 엄청난 염증 덩어리를 달고 다시 입원했다. 1월에 다른 병원으로 전원을 가서도 치료가 잘 안 된 것 같았다. 잘 될 수가 없지. 이미 복용 중이던 약이 스무 개는 넘었을 텐데.
그 친구에게 경관유동식과 물을 시간 맞춰서 주고, 자세를 바꿔 주고, 스프레이를 뿌려 기저귀를 갈고, 또 갈고, 또 닦아 주고, 로션을 발라 주고 하던 사람이 그 여사님이었다. 장례식 가셨어요? 내 못 갔다, 그 다른 사람 봐 달라고 하는 거 대타를 못 구해가꼬, 안 됐지, 안 됐어.
동기들이랑은 그런 얘기를 했다. 걔는 깔쌈하잖아. 간병인이 잘 봐 주시니까. 그렇지. 몸이 점점 부어 카에 실려 입원을 올 때마다 놀라운 덩치가 되어 있던 그 친구는 참 깨끗했다. 정말로 그 분이 잘 돌봤기 때문이다.
우리 누구누구, 할미 안 보나, 응? 엄마아빠 온다카든데 할미는 인자 갈란다. 잘 있거라잉, 안 보고 싶겠나. 하면서 본인 아들인 것처럼, 어쩌면 다 커서 잘들 살고 있을 본인 아들딸보다 더 잘 돌봤다. 그 흔한 욕창도 안 생겼고 가까이 가도 냄새도 안 났다. 항상 있을 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알겠다. 그건 정말정말 대단한 거였다는 걸.
내가 퇴근하자마자 진탕 눈물을 짜고 친구를 만난 후에도 대성통곡을 한 탓인지, D는 그 다음다음주 쯤에 무사히 퇴원했다. 골수검사도 하고 항생제도 먹는 걸로 바꾸자마자 집에 갔다.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쓰여 있던 기록지에 햄버거와 양파튀김과 콜라가 적혀 있었다.
어차피 얼마 안 있어서 다시 입원하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나간 게 어디야. 나는 그 애가 죽을까 무서웠다. 몰랐을 땐 그런 재수없는 생각을 떠올리지도 않으려 했는데 나는 쓸데없이 너무 많이 알아버린 것 같았다. 아무튼 잘 갔다.
그의 엄마는 원래 그렇게 예민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두 해 입원한 친구도 아니었고 아주 어릴 때부터 병원을 들락거린 애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간호사들은 그의 엄마를 알았다.
그래서 '왜 벨 눌러도 빨리빨리 안 오고 열 난다는데 해열제 바로 안 달아주냐'며 화를 냈다고 했을 때는 모두가 어리둥절해했다. 어, 원래 잘 안 그러시지 않았어요? 그러게. 엄마 안 예민한데. 아니, 거기 복도 끝 방인데 어떻게 빨리 가요, 그것도 앞에서 가운 입고 마스크 쓰고 다 해야 하는데.
걔 안 좋아져서 그런 거 아니야? 그렇겠지. 근데 우리가 개인 비서도 아니고 어떻게 그렇게 바로 가요. 걔만 보냐고, 그럼 특실 가셔야지, 여기 말고. 이해해야지, 얼마나 무섭겠어.
많이 무섭겠지. 암 걸린 애들 엄마아빠들은 언젠가 보면 서로를 다 알고 있었다. 무슨 아파트 한 동 주민들처럼. 걔는 괜찮은지, 이식은 어떻게 됐는지, 어떤 약을 쓰는지 다 알았다. 아마 어디로 어떻게 입원하든 마주치게 되어 있어서, 그리고 대개는 커튼 하나를 놔두고 하루종일 공동생활을 해야 하니까 모르기가 더 힘들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 그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나, 그건 그 많은 애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잔뜩 보고도, 상대적으로 자기 아들이 멀쩡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다. 아닐 수도 있으나 당장은 괜찮으니까. 그 때는 아들이 선을 넘을까 무서웠던 거고.
물론 그건 내 자의적인 해석. 아무튼 우리는 한동안 그 방에 들어갈 때 엄청나게 조심했다. 딱히 엄청나게라고 할만큼 뭘 달리 한 건 아닌데 어쨌든 말 한 마디, 액팅 한 번이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했다.
애는 말을 잘 안 했다. 사춘기 남자애들 특이다. 간호사가 백 번 아프냐고 물어도 아프다고 안 하고 꼭 엄마랑 둘이 있을 때 사실 여기가 어떻게 어때, 라고 한다. 나는 가운을 벗고 손을 씻은 후 간호사실로 다시 들어와 앉자마자 다시 그 병실로 들어가야 했다. 얘가 말을 잘 못 해요, 어디 아프다는 걸. 그런들 어떻고 아닌들 어떡해. 아프다는데.
발열도 통증도 딱히 진척이 없었다. 애는 또 밤새 자는 척만 했을 것 같았다. 미안하기가 싫었는데 아무튼 미안했다. 계속 열 재러 들락거리고, 혈압 재고, 기록한다고 펌프 만져서 소리 나고, 이제 좀 자볼까 싶더니 와서 또 채혈한다고 하고. 밤은 생각보다 그렇게 길지 않은데, 그 길지 않은 어두운 시간 내내 아마 한두 시간이나 제대로 잤을까 싶다.
내가 들어오자 엄마는 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요, 했다. 그리고 가방에서 뭔가를 챙겨 머리를 넘겨 세수를 하고 뭘 바르고 옷을 갈아입었다. 입원한다는 건 정말 피곤한 일이구나. 이건 생활 공간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고. 외부인이 끊임없이 들락거리는 와중에 하루가 또 시작되고 끝났다. 이러면 언제 쉬지.
피붙이가 어떻게 될지 몰라 조바심이 나건 말건 삶은 진행 중이었다. 립밤, 스크럽, 클렌징폼, 핸드워시. 그리고 아들 몫일 멸균우유와 팩에 든 생수와 시리얼컵들.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는데 이제보니 참 많이도 생각했나봐, 나는.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신규 때 나를 가르친 프리셉터를 작년 10월쯤에 만났다. 피자랑 나초를 시켜 놓고 그녀는 내게 훈계인지 애정표현인지 모를 말들을 했다. 어쩌다 그 얘기들이 나왔다. 야, 가지마. 뭐하러 가. 그냥 가야 될 것 같아서요. 그런 게 어딨어. 너만 힘들어. 아, 저 힘들려고 가는 거 아니예요. 그게 뭔 말이야. 난 안 가. 왜요? 왜는, 간다는 건 걔들을 내 인간관계에 넣는다는 거잖아. 그건 그러네요.
그러게. 왜 그렇게 애들 장례식을 다녔나 생각했는데, 시작은, 정말로 그 애가 죽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그 영정사진과 빈소에 꽂힌 이름을 봐야 할 것 같아서. 정말 그거였다. 당연히 정말 하늘나라로 간 게 맞았다. 그 이후 언젠가는, 내가 가고 싶어서였다. 다분히 감상적인 표현이지만, 가야 내가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앞뒤 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보내줬는지는 모른다. 그 프리셉터 말마따나 그들과 나는 언제나 남이었는걸.
지금 생각하면 그나마 납득이 되는 이유는, 그 애들이 죽기 전에 제일 많이 있던 게 병원이니까. 거기서 우리랑 정말 많이 마주쳤으니까. 그래서였다. 그 비대한 자의식에 그렇게 선물을 사들고 갔고 어차피 살아 있을 때도 전한 적 없던 말들을 잔뜩 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혼자 드라마 아닌 드라마를 찍었다, 고 하고 싶은데.. 빈소에는 나만 서 있던 게 아니라 그들의 일가족과 친척들까지 다 서서 울고 있었어서 그렇게는 말 못 하겠다. 여하간 영영 남인 내가 그제야 할 수 있는 생쇼는 다 하고 왔다.
복도 끝에서 울던 보호자들이 있었다. 앞으로도 있겠지. 그 보호자들 앞을 배식차와 회진을 도는 교수와 의사와 사원님과 청소 여사님들이 지나갔다. 나는 그들이 세상에서 제일 외로운 사람 같았다.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그래서 뭐?
내가 그걸 그렇게 느낀다고 뭐가 달라지는데?1초, 2초쯤 봐버린 그 장면들을 영원히 붙들고 있는다고 한들 대체 뭐가 달라지는데? 불행히도 봐 버렸고, 계속 보이고, 가끔 생각난다. 나, 생각보다 병원을 너무 좋아하나? 어쩌면 이건 내 성장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왜 쌩신규때는 보이지도 않던 것들을 이렇게 오래도록 남겨두고 있는가.
여유가 생겨서 그렇다. 정말이다. 선임들 눈치 보고 액팅 쳐내느라 죽을 것 같던 내게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이다. 지금은 살만해졌다는 뜻이겠지. 틀린 추론도 아니라 짜증이 난다. 그러네, 정말로.
혹부리 영감이 되어서 왔다가 결국은 떠난 그 친구와 D, 그리고 많은 다른 애들, 아니. 환자들을 생각해 보면 내 연민은 도무지 쓸모가 없었다. 그 간병인처럼 애를 훌륭하게 관리해서 감염의 확률을 줄여준 것도 아니며, 아침의 채혈 후부터 그날 저녁 닭갈비집에 이르기까지 내내 그 생각을 하며 앉아 있었다고 해서 D가 나아진 것도 아니었다.
파견을 다녀온 게 이제 일 년이 훌쩍 지났고 그 이후로는 그 여사님도 뵌 적이 없다. 이제야 실감한다. 내 연민은 도무지 쓸데가 없는 것이었음을. 나는 항상 늦었다. 환자가 하나 죽을 때마다 내가 울어댔던 건, 동기들과 병동 사람들에게 내가 생각보다는 말랑한 사람임을 주지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그것만은 순기능이었다. 근데 그거 말고는 이로울 게 없었다.
언젠가 생각했던 것 같다. 언제까지 이렇게 장례식장에 가야 하지? 안 갈 거다. 이제 안 간다. 애초 누가 가라고 종용한 것도 부추긴 것도 아니었다. 이유를 만들어내 구태여 간 건 나였다. 어차피 없던 기능, 그나마 내 이미지 쇄신이라도 했으면 다 한 거다. 이제는 그런 마음을 굳이 갖지 않도록 한다. 쓸모가 없거든. 이제 알았거든.
이건 일이고, 그들은 그랬어야 하는 환자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알아도, 몰라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늘.
그들을 살린 것은 약제와 검사와 간병인의 손길이지 내가 아니었거든. 늦게나마 알았으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