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분면의 보더라인에서
"신규 때 뭐가 제일 힘들었어."
음..
"어.."
"그래, 그런 걸 잡아서 한 장씩 제출해서 발표하면 돼."
"발표요?"
"발표는 좀 거창하고, 나눈다는 거지. 신규 선생님들한테는 수혈 같은 걸 하도록 할 거고.."
"네네."
"그 윗년차들은 항암이나 진정치료 시에 조심하면 좋을 점들, 그 때 선생님이 하느라 힘들었던 것들을 찝어서 교육자료로 만들 수 있게."
"아하, 그런 거요. 네네 알겠습니다."
저는 신규 때 눈치를 보는 게 제일 힘들었는데요.
인간들이 제일 힘들었어요.
"연휴 끝나면 추합해서 모을 거예요. 교육전담팀이 편집할 수 있게. 알겠지?"
"네, 알겠습니당."
나는 얼굴로도 부드럽게, 진짜 예의바르게 웃었다. 정말이다.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은 깔아 입은 다문 채 미소를 지었다. 안 웃을 이유가 없었다. 퇴근할 거니까. 그리고 이제 연휴니까. 아무튼 환자수도 중증도도 내려갈 것 아닌가.
"고생했어요, 얼른 가."
"감사합니다."
근데, 저는 진짜 그게 제일 힘들었는데요. 무슨 디테일 타령이야. 그 땐 진짜 그게 힘들걸요? 어차피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는 시기라서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냥 투약에러 안 치고 칠 것 같으면 누구 불러서 코사인하고, 이게 다인데. 정말이라니까요? 뭘 모르는지 모르는 애들은 질문도 못 해. 머리에 든 게 없고 손에 익은 게 없는데 그 각도를 어떻게 틀고 뭐보다 뭘 어떻게 먼저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참. 나.
그냥 저 싸가지 없는 것들이 사라지면 될 일이다. 그런데.. 사실 그게 맹점이지. 아무도 안 그만둔다는 거. 그만두지 않은 이들은 고여서 더더더 진화한다는 거. 진화? 진화라면 진화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 나도 안 그만둔다는 거. 하아.
사람들이 특정 문장을 떠올리는 횟수를 어떻게든 다 집계해 낸다면, 병원에서, 간호사실에서 '저 새낀 언제 그만두지?'는 얼만큼의 통계치를 낼 수 있을까. 부서와 연차를 막론하고, 아무튼 궁금해지는 거지. 너넨 그 생각 얼마쯤 하니? 난 맨날맨날 하는데. 맨날맨날? 아냐, 매 순간? 에이. 이건 솔직히 과장이고, 근무마다 마주치는 그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하겠지? 당신들도 그래요? 그렇겠지?
공휴일을 지나 하루짜리 가짜 같은 평일을 지나면 모두가 즐거운 휴일이다. 나는 늦잠을 잤다. 세상이 무너졌으면 좋겠을 정도의 늦잠은 아니고.. 에이, 씨. 내가 그렇지 뭐 하는 정도의 늦잠. 그리고 오늘은 안 바쁠 거니까. 실제로 어떨지는 모르지만 이 가짜 평일이 낀 연휴를 목전에 두고 그저께까지의 내가 얼마나 뺑이를 쳐댔던가. 금요일에는 안 바쁘겠지, 하는 예감을 가져 마땅한 고생이었다.
퇴원을 준비하고 검사를 몰아서 보내느라 아주 고단했다. 괜히 억하심정이 들어 서두르지 않았다. 오늘은 안 바쁠 거니까. 반드시 그럴 거니까. 노는 날인 것처럼 일해야지. 택시를 탔다. 세상이 갑자기 너무 밝아서 체감 시각이 더 늦은 것 같았다. 아직 아름다운 봄이구나. 습하지 않고, 바람이 불고, 여섯 시 반의 햇빛이 신선하고, 이파리가 가득하고.
2만원의 택시비와 아름다운 날씨를 느끼는 그 만큼 딱 죽고 싶었다. 아니, 죽이고 싶었다. 조금은. 뭘? 나도 몰라. 그냥 출근하기가 싫었다는 말이다.
그런 나에게 유튜브 뮤직은.. 'Highway to hell' 을 추천했다. 지옥? 지옥까지는 아닌데. 지옥 맞나? 에이. 그 정도는 아니야. 그런데 그런 기분이고는 싶었다. 출근하기 싫으니까. 그런 기분이고 싶은 내가 듣는 하이웨이 투 헬. 무서운 표정의 아저씨들이 부르는 것치고는 좀 웃겼고 신났다. 누가 지옥을 이렇게 미대륙 국도 타듯이 풀악셀로 가요. 누가? 내가? 거기가 지옥인가.
아냐. 지옥은 아닌데 있다 보면 지옥 같은 인간들은 있지. 그들을 닮아 가는 건 지옥이다. 그래서는 안 돼. 병원에서 닮아서 좋은 건 그 무엇도 없다. 그냥 가능한 적게, 짧게 있는 게 좋다. 그게 어떤 연유든. 그럼 지옥이 맞나? 맞지. 그럼 맞는 걸로 하자. 그렇게 나는 신나게 지옥으로 갔다. 그딴 게 지옥이라니, 이런 게 지옥 가는 목소리라니 웃기네요. 어이가 없어서 코가 벌렁거리며 웃음이 났다.
지옥 재직 기간이 3년을 넘겼다. 4년을 향해 달려간다. 지옥이 지옥인 줄 몰랐던 시절에 학교에서 배웠다. 인간에게는 네 가지 면이 있다고.
사분면을 그어서 보는 거지, 내가 알고 남도 아는 나. 나는 알지만 남은 모르는 나,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나, 나는 모르지만 남은 아는 나. 그러니까 사람이 둘 있으면 사실상 여덟 개의 인간상이 존재한다고 봐도 되는 거다. 왜 이렇게까지 생각하냐고? 그러게. 사랑스러운 친구와 있을 땐 이런 생각을 안 했는데 왜 나는 이십 몇 년을 살고서 병원에 들어와서야 이걸 다시 떠올리게 됐을까.
흥. 왜는 무슨 왜. 그만큼 다채롭게 개같기 때문이지. 뭐가? 이 인간들의 모든 면면들이. 아, 이 단순하지 못하고 참으로 다층적이라 아름다운 인간들이여, 가끔은 정말 언제 죽, 그래. 죽을 것까지는 없고, 그래서. 언제 그만두냐고요, 너는.
근데, 그러면 나는 어떨까? 나도 그렇게 다층적으로 봐줘야 하는 그 사람 중 하나일까? 당연하지. 뭐가 다르길 바라는 거야. 다를 거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틀려 먹은 건데? 내가 다를 이유가 있나? 하지만 좀 다르길 바랐다. 언제나 그랬어서 앞으로도 그러기만 할 줄 알았다. 그리고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한 가지 철칙이 있다.
윗년차에게 못할 말은 아랫연차에게도 하지 말 것.
내가 무슨 정의의 사도라서 그런 게 아니라 수많은 앞뒤 다른 간호사들을 보다가 속이 뒤틀릴 때마다 '나는 너같이 안 될 거야'라며 앞에서 기죽은 척하고 속으로 뒷담화를 까며 남긴 한 문장이다. 꼴에, 지보다 몇 달 일찍 들어온 쟤한테는 설설 기면서 나한테는 개지랄하네. 그래. 알았다. 너 되게 추해요, 알아? 추했다. 얼굴이 어떻게 생기고 화장이 어땠고 사복을 입은 모습이 어떻든 그냥 추했다. 그나마도 없던 간지가 다 떨어져나가서 사람이 우스워 보였다.
나는 그래서 그런 사람이 되지 말자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중에 연차는 차고 인내심은 똑같이 없을 나를 감히 장담하기 어려워서 사실은 한 번만 생각하고 싶었는데 자꾸자꾸 생각하게 만드는 일들이 생겼다.
급히 근무를 하루쯤 빼야 했다. 사유를 당연히 알리고 싶지 않았으나 아무튼 나 때문에 근무가 갑자기 바뀌게 된 것에 대해 양해는 구해야 했다. 그녀는 꽤 착한 선임이었다. 착하다는 말에는 어떤 비하의 의미도 없다. 사번으로 된 메일주소를 보고서야 그녀가 정말 왕고참인 것을 모두가 알았을 정도로 조금의 고압적인 태도도 꼰대 같은 자세도 없었다. 조금 후면 사학연금을 받는 게 가능한 연차였다. 어마어마했다.
왜, 말 안 해 주면 나 안 바꿔 줄 건뎅, 무슨 일인데그랭, 응? 그녀는 반장난으로 물었다. 그래서 그냥 말했다. 보이스피싱을 당해서 좀 처리할 게 많습니다. 죄송해요. 어.. 진짜? 아이고, 야. 어떡해.
그리고 그녀는 그 바쁜 와중에도 나보고 괜찮니, 일이 눈에 들어와? 야, 수쌤은 이걸 알고도 출근을 시켰어? 진짜 너무하다, 하고 부탁하지도 않은 욕을 해 주고, 근무가 끝나자 커피를 한 잔 사 주었다. 나는 사분면에 대한 생각을 조금 접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어 며칠 후 택시를 타고 퇴근하던 새벽 두 시에, 나는 사분면을 접지 말아야 했다고 생각했다.
이브닝 인계는 열 시를 조금 넘어서다. 밤 열 시 십오 분까지 난 오더의 수행과 처리는 이브닝의 몫이고 그 이후의 것은 나이트번 담당이다. 그녀는 신규를 데리고 트레이닝을 시키면서 일을 해야 했다. 뭐, 그건 그거고. 오후 내내 요추천자를 하네 마네 했던 애기가 있었다. 천자 세트 등을 다 준비해 놨지만 결국 담당 교수는 오늘은 일단 하지 않겠다고 했다.
인계를 다 주고 컴퓨터에서 로그아웃하려는데, 메신저가 왔다. 선생님, 지금 태핑 준비해 주세요. 올라갈게요. 네? 아하. 네. 하라면 해야지. 교수는 그 환자의 나이트번이 누구인지까지는 모르고 알 필요도 없었다, 어쩌면.
열 시 반이었다. 나는 차팅을 한 줄 남기고 그녀에게 갔다. 선생님, 웅? 말해. 지금 태핑하신다는데요, 아. 지금? 뭐양.. 그랬다. 들어온 지 2주 된 그 옆의 신규는 허리를 곧게 펴고 서서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그렇지. 그거 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아무튼 나는 다시 병실로 들어가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만저만해서 교수님이 오실 거고 애는 처치실로 뺄 거고 동의서는 아까 받아 둔 대로.. 어쩌고. 그리고 자리로 돌아와 아까 준비해 둔 검체 바틀들과 용량들을 다시 확인했다. 어쨌건 하겠다는 말을 전달받은 장본인인 이상 뭐라도 하고는 있어야 했다.
열 시 사십 분, 나는 앉아서 오더를 보며 등짝으로 말했다. 선생님, 이제 선생님 차례인데요? 저한테 집에 가라고 하셔야죠, 내가 하겠다고. 그러나 그녀는 라벨지를 잔뜩 들고 신규에게 중얼중얼 설명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런.
처치실을 치워 베드를 들여 놓고 세트를 까서 필요한 것들을 무균적으로 넣었다. 내가 옷을 못 갈아입자 같이 일하던 이브닝번 동기도 떠나지를 못했다. 그녀와 내가 이런저런 준비를 하는 동안 교수는 계속 내게 메신저를 걸어 태핑 끝나자마자 안티 스타트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라고 했다. 거기다가, 저 말고 누구누구 선생님께 전달 부탁드립니다, 라고 누가 할 수 있을까. 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역시 MZ 야, 누구쌤 몰랐는데 MZ 인 면이 있었네? 같은 말이 내 뒤에서 반 년 또는 그 이상, 퇴사할 때까지 따라붙기를 원한다면? 글쎄, 나는 간이 종지만한 탓에 그럴 수 없었다.
교수가 오고, 우는 0살짜리 애를 새우등처럼 잔뜩 우그려 잡고, 안 나오는 척수를 뽑기 위해 서너 번을 찌를 동안, 그러니까 한 사십 분 동안, 나이트번인 그 선임은 처치실로 들어오지 않았다. 중간에 교수가 그랬다. AST는 됐어요?
됐을 리가요. 저는 내내 여기 있었는데요. 혹시 모르죠. 바깥의, 원래 여기 계셔야 하는 나이트번 선생님께서 약국에 연락해 항생제를 빨리 올려받고 반응검사할 약물을 믹스해 놨을지. 라고는 말 안 했고, 아직 안 됐습니다. 했다. 교수는 한숨을 쉬었다. 왜 쉬세요. 그럼 저한테 말 걸지 마셨어야죠, 여기 계속 서 있던 거 안 보이세요? 애를 잡고 있느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소리쳐 요청했다. 혹시 10호 2번 AST 준비해주실 수 있어요?
그 목소리를 듣고 들어온 건 그 왕고참이 아니라 내 동기였다. 얘는, 너 왜 아직도 안 갔니? 그녀가 작디작은 그 주사기를 내밀었다. 아, 이것도 지금 이브닝번이 했다고. 지금 열한 시 사십오 분인데? 장난하나. 저기요.
그리고 그녀는 안티는 여기 믹스해놨어, 나 셔틀 늦어서.. 진짜 미안해. 오더는 봤는데 이거만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아, 라고 했다. 셔틀이고 나발이고 그녀는 남아 있을 이유도 그렇게 미안한 티를 낼 이유도 없었다. 아니야, 미안해. 빨리 가, 고마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다였다. 진짜 엄청 미안했다. 그리고? 그 나이트번 선임은 그 할 줄 아는 거 없는 신규를 옆에 세우고 카트를 끌고 처치실을 지나 간호사실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여기 나 이렇게 던져 놓고 라운딩은 그새 다 도셨구나. 오늘 이 팀 안 바쁜데, 아하. 그렇구나. 진짜 개빡쳤다. 와중에 교수는 여기 좀 이렇게 꽉 잡아 보세요, 하. 다른 분 더 불러 주실래요? 했다. 진짜로, 개빡쳤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지. 어떻게, 고개도 안 들이밀 수 있지?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선생님.
나는 일부러 받은 검체들을 11시 59분이 아닌 00시에 PDA로 찍었다. 몇 분 차이잖아. 열받는다고. 어떻게든 내가 그때까지 남아 있었다는 티를 내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복수는 그게 다였다. 역시나 허리를 꼿꼿이 세워 앉은 그 신규를 옆에 두고 그 선임은, 이건 냉장고에 넣었다가 내일 내려 달라고 인계를 주시면 되고.. 어쩌고 하는 내 말에, 너무 고마워. 니가 날 살렸어, 했다.
아, 네? 제가요? 아하. 죽을 뻔하셨구나. 전 안 죽었는데. 다만 택시를 타야 할 뿐. 나는 아니라고 말하고 웃었다. 내 웃음에 비틀린 분노나 짜증이 드러나지 않길 바라면서.
지하철이 다 끊겨서 택시를 타야 했다. 그렇게 검체 인계를 준다고 끝이 아니었고 정리할 것들이 많았다. 두 시. 내 일도 아닌 일을 하느라 쓴 2만원의 택시비. 그녀도 역시 보통의 썅년이었던 건지 골몰해 있다가 피곤하고 짜증나서 생각을 멈췄다. 그래. 쌤쌤인 거라 생각하자. 나도 갑자기 근무 바꿨잖아. 아니, 근데. 그래도.. 저렇게 내내 한 번을 안 들어온다고? 말이 안 되잖아. 뭐지, 진짜?
병원의 지랄같은 위치 탓인지 항상 택시는 더럽게 안 잡혔다. 나는 이해를 하려 했다 그래, 신규 가르치느라 그랬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걔. 씨. 일 못 하기만 해 봐, 나한테 죽었어, 이름 뭐라고? 유진?
추웠다. 텅 빈 밤공기가 써늘했고 배가 고픈 것 같았다. 그냥 헛헛해서 뭐가 먹고 싶었을 수도 있고. 그리고 나는 그 때 나도 악마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씹어뱉듯 떠올리다 스스로도 놀랐다. 망했다. 아닌데. 걔는 잘못이 없었다. 이게 어느 정도로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상황인지 아직 파악을 못 했고 그 때 뭘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는 더더 모르는 애였다. 입사한 지 2주니까 그냥 옷만 바꿔 입은 실습생이나 다름없었다.
선임에게는 짜증을 못 내니까 그 바른 자세로 앉아 있던 그녀에게 분노가 향했던 것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일 못 하기만 해봐. 뭐? 못 하면 어쩔건데? 가서 왜 너 이브닝번이 태핑하는데 그렇게 멀뚱히 서 있었냐고 하게? 솔직히 말할까. 나는 택시를 기다리는 8분 동안 그런 장면의 시나리오를 다섯 개는 그렸다.
왜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지?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자세는 왜 그렇게 반듯하게 하고 있어, 나 빡치라고? 할 줄 아는 것도 없으면서 왜 붙어 있는 거야. 왜 쳐다봐, 나 퇴근도 못하고 그 지랄하는 거 보니까 신기해? 니 미래야. 니 선임은 올드라 그럴 일 없겠지만 넌 이제 시작이야. 다음부턴 그 따위로 쳐다보지 마세요. 정말로, 나는 사실 아직 이름도 모르는 그녀에게 잔뜩 화를 내는 상상을 했다. 나는 그 때, 스스로가 너무 싫어졌다. 그 선임만큼이나.
왜, 그 나이든 그녀를 대상으로는 그런 연극을 하지 않고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를 조연으로는 그 상상을 했을까. 그 머릿속에서조차 쫄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걸 알아 버린 이상, 이건 내가 알고 아직 남들은 모르는 내 모습이었다.
위험했다.
이전에는 남의 사분면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늘. 선생님 남자친구는 선생님이 그러는 거 아세요? 그 카톡 속 그 사람은 니가 그러는 거 아니? 찌질하게 혼자 비웃고 또 치졸하게 돌아서 잔뜩 씹고 앞에서 웃었다. 그런데 이제 조금 다른 국면이었다. 내가 그 사분면을 드러낼 때가 온 것 같았다. 드러낼? 드러내게 될? 아무튼 그랬다.
내가 만약 그 신규에게, 그 선임이 안 볼 때 '선생님, 태핑 할 때 뭐 해야 하는지 알아요? 이브닝 인계시간 몇 시예요? 아는구나. 근데 그 때 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렇게 앉아 있었어요? 몰라서?' 라고 했다면, 그건 몇 사분면의 나였을까. 내가 그러는 날, 나는 그게 '나도 몰랐던 나'의 일부였다고 할 수 있을까? 늘 저 새낀 왜 안 그만둘까, 하고 욕만 할 줄 알았지 정말로, 진짜 그 대상이 되기를 자처하는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
병동에는 어느새 나보다 한참 사번이 낮은, 얘 왜 이렇게 긴장했지, 싶은 신규들이 많아졌다. 내가 잡아먹니, 라고 말하던 그 선임들의 모습이 스쳐갔다. 선생님, 저쪽 복도에서 보호자들 나오면 선생님 팀 아니예요? 응대 좀 해요. 라는 말을 대체 어떻게 해야 덜 태우는 것 같을까 같은 고민을 잊을 만하면 했다. 이게 내가 물이 들고 짬이 생겨서 나오는 말인지 응당 해도 되는 말인지를 계속 생각하다 차라리 내가 하는 날이 늘었다.
인계는 연차에 따라 선이 너울거리는 보더라인이자 사분면의 축이었다. 왕고참인 그녀에게 그럴 사람은 많지 않았겠지만, 내가 그녀보다 더 선임이었다면 그녀는 나를 처치실에 던져 두고 나중에 '그 때 차지샘이 너 집에 안 보냈다고 엄청 혼냈어 ㅠ' 같은 메신저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후 '교수님한테 택시비 달라 하자' 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니까요 ㅠ 오후 내내 있다가 왜 갑자기 그 때 한다고 ㅜ 저 그 날 택시 탔어여 ㅠㅠㅠ 라는 말을 웃지도 않은 표정으로 일부러 보냈다. 그 말에 그녀는 나의 퇴근이 늦은 게 마치 교수 잘못인 것처럼 답장했다.
아하. 이런 거구나. 나는 요추천자 때문에 퇴근이 늦은 날보다 그 메신저를 주고받은 그다음 날 그녀의 다른 면을 본 것 같았다. 모두에게 B-side 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할 때는 시간이 튀고 감정이 튀고 체력이 튄다. 다 튀어서 소진되고 남는 게 없다. 그 때 우리는 나이와 위계에 기대 악을 지른다. 윗년차, 동기들에게는 절대 못 할 말을 아랫연차에게 쏟는다. 왜 몰라요? 이거 왜 안 됐어요? 바빴어요? 일 왜 이렇게 해요? 이거 오더 지금 난 건데 나보고 하라고?
그리고 그런 말을 들은 나는, 난 절대 너 같은 인간은 안 될 거라 씹고 또 씹었다.
모두를 미워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언제든 비웃으며 고고한척 할 만반의 세팅을 해 놨었다. 그들의 뒷면들을 보고 남의 일이라고 잔뜩 넘겨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별다를 것 없이 나 역시 똑같았다. 단지 저 사람은 언제 그만둘까의 대상이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나와 남, 나이와 연차. 상관없이 똑같이 공존하려면 모든 일을 내가 떠안아야 했고 그럴 수는 없었다. 언제나 한결같은, 단면의 사람이고 싶었는데 이딴 복잡한 척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난 안 그만 둘 것 같은데. 당장은 그런데. 이미 나도 그 대상이 되어 있을까? 그리고 사실 다 알고 있는 거였을까? 내가 싸잡아 비웃은 것과 달리 다들 .. 본인들의 그 면면을 알고는 있었을까?
하이웨이 투 헬을 들으며 사실은 그 날을 떠올렸다. 다른 이유는 없다. 몇 주 전 그 때 마지막으로 택시를 탔기 때문이다.
입사 자격요건에 키를 추가한 건지 올해의 신규들은 정말로 다들 키가 컸다. 170을 넘거나 170중반이었다. 그만큼 어깨가 높은 신규들이 잔뜩 내 동기들의 옆에서 움츠려 앉아 '네' 한 마디만 해도 엄청나게 긴장한 티가 날 정도로 온 정신을 다해 떤다. 그 이목구비에 쓰여 있었다. 긴. 장.
못된 마음에 '선생님, 저한테 뭐 하실 말씀 없어요? 그 때 이브닝 때, 기억 안 나요?' 하는 장난을 치고 싶을 정도로 잔뜩 쫄아 있다. 나는 그들을 겁줄 생각도 뭐라고 할 생각도 없었다. 왜냐면 나는 쪽팔림을 아는 사람이거든. 연차가 차는 건 실수가 줄어드는 게 아니고 나한테 지랄하는 인간들의 수가 줄어든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신규는 1만큼 잘못해도 10만큼 잘못한 것처럼 보고서를 쓰고 쿠사리를 먹고 두고두고 회자됐으며 올드는 11만큼 잘못해도 2를 잘못한 것처럼 웃고 넘어갔다. 그런 거잖아, 원래. 이제 나는 그 어디메의 경계선에 걸쳐 있었다. 그래서 어려웠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대체 어떻게 해야 그런 악마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무의식에서조차 이미 그러고 있었잖아. 뼛속까지 이 시스템에, 뭣 같은 위계에 적응해 버린 탓에 내가 입을 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내 머릿속에서조차 그 올드가 아닌 신규를 데리고 연극을 했잖아. 이걸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왔다. 이렇게 지옥으로 가버리는 건가?
에휴, 어쩌겠냐, 하다가 진짜 지옥에 왔다. 택시 문을 열자 숨막히도록 많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본관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보다 출근이 늦은 탓이다. 어쩔 수 없었다. 어떡해. 해야지. 뭘, 출근? 했잖아. 아니, 그거 말고. 안 해야지. 안 하면 되지. 어떻게 안 하는데. X 된다고 생각해야지. 음.
원래 다 그런 거 아니야? 그 말 잘못하면 물리적으로 쳐맞는다는 생각을 해 봐. 걔가 얼굴에는 '아무튼 제가 죄송해요 제가 정말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라고 써 있는, 말을 걸면 'ㅠ네?!ㅠㅠㅜ' 하는 키 165에 몸무게 43쯤 나갈 것 같은 신규가 아니었다면, 몸은 정육면체인 것처럼 입체감 있는 근육질에, 눈에는 '님 뭐 돼요?' 라고 써놓은 사람이었다면, 성별을 불문하고 그런 사람이었다면 내가 그런 상상을 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멀리 갈 것도 없고, 그냥 좀 센 화장을 하고 다니는 나보다 다섯 살쯤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봐. 표상일 뿐인 그 얼굴 표정 말고 그 생김새 자체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라고. 표정은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는 거잖아.
그러자 답이 나왔다. 나는 마동석 같은 신규에게 그런 말을 무의식적으로 할 수 없었다. 아니면 뭐.. 내가 외양을 보고서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무서워하고 거리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들. 나는 그런 이들에게 '이걸 왜 이따위로 해요? 내 말이 말 같지 않아요?' 라고 할 수 없었다. 이렇게 간단하다니. 모두가 헐크이고 미친놈이고 마동석임을 (자꾸 언급되어서 괜히 죄송한 일이지만 아무튼 내 기준 가장 겉보기에 강한 인물이라 어쩔 수 없다) 기억하는 거.
그래. 말이 너무 어려웠다. 윗사람, 아랫사람? 그 철칙은 애초에 나같이 꼰대식 위계에 완벽히 적응한 사람에게는, 내가 꼰대가 되어도 되는 단계에 진입하자마자 스스로에게 필연적으로 고뇌를 안길 수밖에 없었다. 단어를 바꾸기로 했다.
마동석에게 할 수 없는 말은 아랫사람에게도 하지 말자.
참 쉬웠다. 물론 내가 그를 위시한 수많은 강해 보이는 인물들에게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다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하지만 그런 날은 이곳을 나갈 날까지 웬만해서는 안 올 것 같았다. 음. 나쁘지 않은데? 그치?
엘리베이터에 올라 가방을 뒤적이고 있자니 다른 버전도 생각났다. 사원증 뒤에 꽂아놓은 그들의 티켓. 하이라이트.
윤두준 양요섭 이기광 손동운에게 못할 말들은 그들에게도 하지 말자. 그래, 그래서 꽂아 놨잖아. 그 돈 벌어서 덕질하니까 부끄럽게 살지 말자고. 그랬었다. 그래. 그러니까 이해가 더 쉬웠다. 정말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어떻게? 모르겠고. 이유를 뛰어넘어 그냥 납득할 수 있었다. 주먹과 사랑 앞에 이유가 어딨어. 사분면이고 나발이고 그냥 무작정 수그릴 뿐이다. 겸허히 움츠리든 웅크려 그 품 안으로 뛰어들든.
"선생님."
"넵."
"하실 말씀 없어요, 저한테?"
".."
"정말 없어?"
"어.."
"미안, 장난이야."
너무 짓궂었나, 라고는 생각 안 했다. 신규는 그 큰 어깨에서 힘을 빼고.. 아.. 만 했다. 미안해, 사실 예전부터 너무 해 보고 싶었어.
그래서 오늘은 경계를 걸었다. 잘. 나에게 네 명 남짓한 폐렴 애와 두 명의 감염분과 애들 인계를 주기로 되어 있던 172짜리 선생님에게 장난을 쳤다. 항상 더더더 쫄아 있던 애였다. 그냥 잘 적응하기를 바란다. 왜 갑자기 이런 훈훈한 척 혼자만 즐거운 꼰대 모드냐고? 왜. 그럴 수도 있지, 난 악마 안 할 거니까. 진짜 안 할 거거든. 마동석에게도 저런 장난은 칠 수 있다고. 그래서 쳤다, 장난.
그리고 말했듯 가짜 평일이잖아. 기분이 좋았다고. 퇴근하는 그녀는 정말로 웃으면서 내게 인사했다. 그래. 표정은 믿을 게 못 되지. 아무튼 나는 켕기는 짓은 안 했어, 잘 가.
나는 집에 갈 즈음에 미치게 바빴다. 결국 내 퇴근은 완벽히 늦었다. 이래서 병원의 하루를 예측해서는 안 된다. 그래도 지옥의 악마는 안 됐다. 다행히도. 앞으로도 안 될 거다. 얼마나 어떻게 고이든 내가 아는 선에서는 절대. 마동석과 사원증 뒤의 그들을 보며 했던 생각을 잊지 않을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