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닝이 끝나면 할 일

0. 다 때려부수기

by 이븐도





1. 신규 번호 찾아내서 전화하기

2. 2000kcal 먹기

3. 프리세덱스 쌔벼서 코에 쏘고 잠들기

4. 세상 모든 걸 하나하나 저주하기

5. 양치하기

6. 설거지하기

7. twentyonepilots 곡들 플레이리스트에 넣고 달리기

8. 쓰레기 버리기

9. 언제 그만두나 생각하기

10. 난 왜 이 모양일까 고민하기






"왜 아프다고 말 안 했어?"

".."

"말해요. 안 아파? 모르겠어?"

"머리아픈, 거랑, 배아픈, 게 더 커서, 몰랐,어요."

아, 씨.

"미안해, 화내서. 근데 나 화낸 거 아냐. 미안해. 여기 아파?"

애는, 얘를 이제 애라고 해야 하는게 맞는지도 모르는데.

"팔 올리고 있자. 또 아프면 아빠한테 말하거나 이거 눌러."



"줄이 좀 짧아서.."

"아버님. 이거, 아까 응급실에서 오셨을 때 주사 봐 준 사람 누구예요?"

"어.."

"키 크고 안경 쓴?"

"처음 보는 분이었는데."

맞네.

"아, 알겠습니다."

"아까도 이거, 바꿔 달라고 했는데 그냥 가시고 안 오셨어요."

"아, 네."



나는 내가 이렇게 정의로운 사람인 줄 몰랐다. 근데 정의의 사도들은 항상 처단을 하던데, 악의 무리 같은 걸. 처단이라.. 어떻게? 걔가 악인가? 그럼 난 선이야?

선생님, 얘 발달장애 있고 아프다는 거 티 못 내는 애인거 몰랐어요? 아니. 몰랐든 알았든 그럼 나한테 인계를 주든가. 몸 아프다고 비비 꼬는 애 이렇게 버려두고 간다고? 니가 하기 싫으면, 사정이 있으면 나한테 인계라도 했어야지. 장난해? 주말이잖아. 왜, 또 니 남친이 밑에서 기다리디?

아. 내가 이런 말을 떠올리는 날도 왔다.




저렇게 말한다면 나는 선한 편일 수가 없는데. 그리고 뭐 사정이 있었겠지. 그래. 없으면 어쩔 건데. 진짜 전화해서 지랄할 거 아니잖아. 그럼 나는 이 애매한 상태에서 바로 악한 쪽이 된다고. 아, 짜증나. 하필 또 말을 저렇게 어눌하게 하는 애가 아파서 더 신경 쓰였다. 죽을래, 진짜? 너 이런 애를 이렇게 놔두고 간 거야?


주사가 부은 수준이 아니고 윗팔 전체가 무슨 작은 풍선을 하나 넣은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보자마자 어이가 없었다. 장난하나, 정말. 거기다가, 응급실 지긋지긋한 것들이 대충 해 놓은 수액라인은 그 친구의 폴대까지는 너무 짧았다. 원래 자주 오는 애였다. 아니, 아버님. 그럼 아까 저 왔을 때 애 잔다고 하실 게 아니라 말을 하셨어야죠.






화가 잔뜩 났다. 바빠서? 소변 봉지 붙인 거 떼고 있는데 응급실에서 환자 와서 그거 주사기로 채취한 후에 옮겨 담지도 못하고 가서 입원 받는 데 합류해야 해서? 내 담당도 아닌 애들 보호자들이 자꾸 나 붙들고 뭐 시켜서? 혹시 애들 콧물약은 뭐 처방하나요, 하고 슬금슬금 묻는 의사가 짜증나서? 싸가지 없는 말투로 묻는 내 말에 혀가 묶인 것처럼 간신히 대답하는 쟤가 너무 가여워서?

글쎄. 모르겠고 물품준비실에서 새 펌프를 꺼내는데 정말 다 때려부수고 싶었다. 정말로. 이거 하나에 얼마랬더라. 부순다고 병원에서 나한테 물어내라고는 안 하겠지만.. 아. 진짜 개빡치긴 하네. 이거 세 대 해 봐야 내 한 달 월급이 안 돼.






주말인데, 왜 이런 날도 바쁠까. 동기들의 표현을 빌리면, 찌글찌글하게 바빴다. 검사도 없고 시술도 없고 입원도 적은데 하나같이 다 열이 나거나 주사에 문제가 생기거나 토했다. 주치의가 바뀐 이런 월초의 경우, 금요일의 다른 사람이 잘못 내고 간 오더를 바꿔 달라고 닦달까지 해야 했다.

아. 그건 그렇고 정말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 싶었다. 일 하나가 끝나기도 전에 자꾸 다른 할 일이 끼어들어서 너무 화가 났다. 늘 그렇잖아? 근데 새삼스럽게 짜증이 잔뜩 났다.

저녁, 먹었다. 다섯 시에 식당 열자마자 내려가서 먹었다. 주말이니까. 그리고 그 이후로 나는 쭉 짜증이 나고 화가 났다.




나이트에게 인계를 줬다. 주사 붓기 심해서 뺀 거고 네 시에 갔을 때 이미 저랬다고. 왜, 신규 탓을 하는 게 아니라, 나도 말은 해야 하잖아. 주사 잘 부으니까 잘 봐야 할 것 같다고. 쟤는 응급실에서 올라온 몇 시간 동안의 수액을 다 혈관이 아닌 다른 조직으로 주입받은 거잖아.


어차피 누가 했느니 어쩌니 말 안 해도 안다. 다른 사람들도. 교대근무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은폐? 웬만해서는 어렵다. 누군가는 찾아내게 되어 있고 용의자는 한정되어 있다. 나는 정말로 고민했다. 신규 때 맨날 겪던 것처럼, 인계장에 써 놓을까. 며칠자 데이 선생님 응급실에서 환자 올라오면 주사 제대로 봐 주세요. 이상한 거 있으면 뒷턴한테 인계 주시고요.

그리고 그걸 걔가 본다면? 그 때쯤의 내 차팅과 본인 시간대 근무를 떠올리며 뭘 잘못했는지 추론하겠지. 하, 씨. 안 했다.






0번은 당연히 하지 않았고 1번도 안 했다. 하고 싶었지만 안 했다. 잘한 일이다. 정말 우스워지기 좋은 일이니까. 2번은 별로 하고 싶던 일이 아니었으나 하게 됐다. 유니폼 벗기 전 병동 탈의실에서 게메즈에낙 세 봉지, 퇴근하는 길에 병원 지하 편의점에서 큰 삼각김밥 한 개, 버스에서 내려 파리바게트에서 작지만 당류가 엄청난 무슨 만주 같은 거랑 통바게트 하나. 도합 2000kcal 정도가 될 거다.

짜증나. 왜 나만 이렇게 손해야? 근데 안 먹을 수가 없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삼각김밥을 먹는데 신규 때 참 많이 이랬다는 게 떠올랐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우적우적 길거리에 서서 먹는 거. 스트레스를 도로 쑤셔넣듯이 먹는 거.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이라면.. 그래. 그만큼 적응했으니까 이게 오랜만이라는 거잖아? 씨. 당연한 건데, 어쩌면.




3번.. 애들 재울 때 쓰는 약. 농담 반 진담 반, 사실 백 프로 농담 대화를 종종 나눈다. 집 가서 저거 뿌리고 자.

나이트 끝나고는 계속 깨서 피곤하다 동료들과 떠들었다. 이 병동의 환자들은 그 약 한 병을 다 쓸 수가 없을 정도로 작은 애들이 태반이었다. 위험한 효능에 비해 관리가 빡세지 않은 약물인 탓에 반납 지시가 누락되거나 하면 한두 개씩은 항상 돌아다니는 약이었다. 물론 당연히 그래서는 안 되지.


근데 필요는 있다고. 당장 써야 하는데 오더는 방금 내 놓고 처방을 내면 약이 어디서 몇 초만에 튀어나오는 줄 아는 멍청한 인간들이 왜 약 안 줘요? 같은 열 받는 소리를 하는 걸 막아줬다. 그냥 그거 꺼내서 쓰면 되니까. 아무튼 수선생님이, 차지 선생이 한 번씩 병동을 까뒤집어 다 수거해 폐기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잔해를 다 소탕할 수는 없었다.



야, 못 일어나면 어떡해, 디새츄돼서 못 깨면 어떡해, 라는 말에 듣고 있던 선임은 야, 너 그 때 걔 못 봤어? 그렇게 써도 안 잤잖아. 아니면 적정 용량보다 더 적게 쏘면 되지. 했다. 위험하고 달콤한 농담이다. 근데 할 거면 못 일어나야돼. 까딱하면 잘린다. 아, 알죠. 아하핫.

상상은 했다. 그런데 그러려면 1층에서 해야 하는데. 딱딱한 바닥에 누워서 그러긴 싫은데? 는 2층에서 자는데.

2층? 나는 저 약에 취한 상태가 아닐 때도 내려오다가 접질린 적이 있다. 한 달 내내 깁스를 하고 다녔다. 진정제를 썼다가 깨는 애들은 본인이 제정신인지 아닌지를 분간을 못 했다. 나도 그렇겠지. 아, 출근해야지, 화장실 가야지, 역시 효과가 좋군, 하면서 일어났다가는 발목이 아닌 목이나 척추가 나갈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된 사람들? 병원에서 많이 봤잖아?



잘 깨도 안 깨도 문제다. 약효가 좋았다면? 내가 저걸 한 번으로 멈출 수 있을까? 안 될걸?

못 깬다면. 사인이 허술히 관리된 약품을 오남용해서였음이 드러나면?그런 게 뉴스에 나면? 엄마아빠는 얼굴 어떻게 들고 살지?그걸로 또 온갖 쓸데없고 귀찮기만 한 일들이 추가되어 고통받을 병원 사람들은?그래서 3번은 깔끔히 기각.






4번. 많이 했다. 다 짜증났다. 지하철에 앉아서 그 빵을 먹고 있자니 다 짜증이 났다. 그러다가 1/4쯤 남은 빵을 떨어뜨렸다. 이 새끼까지 나를? 그만 먹으라 이거지. 다 짜증났다. 이런 식욕을 못 참는 나도. 하얀 가루가 입가에 묻었을 그 모양새도, 구태여 떨어진 빵쪼가리도. 그걸 슬쩍 본 다른 사람들도. 사실은 아무도 신경 안 썼을 그 장면이 쪽팔렸을 나도. 그냥 다 짜증났다.


그래서 9번과 10번을 같이 했다. 9번. 둘의 공통점은 거의 맨날 하지만 영영 답이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몰라, 몰라. 모른다고. 어쩌라고. 모른다니까?

집가서 달리기나 해야겠다, 생각했다. 너무 많이 먹었어. 근데 그거 한다고 안 빠져. 너 살 빼려고 러닝하는 거 아니잖아. 아. 맞는데 아이씨. 아무튼. 고등학생 때, 제일 스트레스 받던 시기에 엄청 많이 들었다. 다시 들어도 좋았다. Vessel. 정말 명반이다.




한편으로는 이게 내 인생 앨범 같은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느꼈다. 이런 게 10년간 인생 명반이면.. 좀 잘못 산 거일 수도 있잖아. 내 삶을 돌아보면 그래. 그렇게나 불만 많고 짜증만 내야 하는 인생을 살진 않았다. 랬다면 내 문제라고.






양치를 하면 기분이 좀 낫다. 집에 와서 5번을 했다. 설거지도 하면 좀 기분이 나아진다. 근데 설거지할 게 없었다. 그렇게 6번은 기각. 7번, 8번도 기각됐다.

당이 확 올라서 그랬는지 그냥 바닥에 누워서 잤기 때문이다.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그냥 혼자 성질내다가 잔뜩 먹고 잔 사람이 됐다. 새벽에, 올라가서 자자, 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은데.. 그냥 깨 보니 해가 좀 떠 있었고 몸이 부은 것 같았고 기분이 역시 몹시 나빴다.


그래서 또 9번, 10번 했다. 0번, 1번 안 해서 다행이라고 또 생각했다. 그래서 또 9번, 10번 했다.

왜 이렇게 고통받아야 해? 어?


왜 이렇게 살아야 되냐고.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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