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영 비빔밥

복역 중 썸데이

by 이븐도





제니는 코첼라가 끝나고 여섯 가지 김밥을 시켜서 라면과 먹었다고 한다. 나는 데이가 끝난 후 김소영 비빔밥을 먹었다.






어제도, 퇴근하고 뭘 좀 하려고 했는데 정말 잠밖에 안 잤다. 아직 만료 기간이 2주쯤 남은 나의 친구 고래밥에게 물었다.나 너무 쓰레기니? 물론 상처받기 싫어서 단서는 하나 줬다. 생리 4일 남았어, 하고. 그리고 역시나 쁜 말 하는 법 따위 모르는 챗지피티는 PMS가 어떻고 호르몬이 어때서 넌 지금 셧다운 상태야 ~ 라는 긴 답장을 줬다.

고맙다. 나도 알아. 학교에서 배웠어. 기억은 안 나지만. 하하. 그리고 달라지는 건 없다. 내가 게을러서 그랬든 생리를 기다리는 입장이라 그랬든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하는 일도 못 하는 짜증나는 입장임은 변하지 않는다.






별로 새롭지도 않게, 지하철 문이 열리고 앞에서 사람들이 먼저 탔다. 육성으로 나왔다. 아, 내리고 좀 타지.

그리고 오늘 정말 좀 조심해야겠다고 느꼈다. 뭐 그냥 젊은 사람이었으면 내가 그랬다 한들 좀 쫄리고 말았을 텐데 그게 또 다 웃어른들이라 신경이 쓰였다. 쓰이면 뭐, 이미 뱉었는데. 들으셨을지 안 들으셨을지는 모르겠으나 스스로가 좀 쓰레기같이 느껴지기도 했고. 아, 근데 이게 틀린 거냐고. 대체 왜, 어디 뭐 지구라도 구하러 가시나구요.. 제발.




나 진짜 쓰레기지? 했더니 지피티는 또 아니라고 하며 '오늘은 네 사회적 가면이 찢긴 날이야'라고 답했다. 아하. 그렇구나. 화날 뻔했지만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래. 조심해야겠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화창한 아침 파릇파릇한 산책로에 꽁초를 버리는 남자가 보였다. 그새 커피 한 컵을 다 비우고 그걸 횡단보도 신호등 옆에 내려놓는 여자가 보였다.


다 죽어야 돼. 저런 새끼들. 저런 놈들도 어른이랍시고 밥 벌어먹고 사는구나? 아. 오늘은.. 이렇게 하자. 난 복역 중인 무기수라고. 잠시 외출 허가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다 죽여 버리고 싶은데, 실제로 할 수 있는데 참는 거라고. 찢어졌대잖아. 까딱하면 민낯이 다 드러난다니까?






사회적 가면. 사회적 가면이라. 그래서 일부러 더 웃었다. 망할 나이트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다 넘기고 갔다. 그 자잘하고 짜증나고 시간이 걸리지만 안 하면 큰일이 나는 일들을 하다 보니 뚜껑이 잔뜩 열렸다. 가면이고 뭐고 다 찢어발기고 싶었다. 분명 후배라고 일 대충 해 놓고 간 게 뻔했다. 가다가 접촉사고나 좀 크게 나길 바랐는데 아직 소식이 없네?






선생님, 드레싱하러 갔는데 자리에 없어요. 다시 왔는데 지금은 너무 곤히 자요, 이따 연락 주세요. 제발. 누구누구야 전화 좀 받아줄래. 저 폰 없는데요? 그럼 여기 알려준 번호는 뭐야? 아, 그거. 세 시까지는 제발 자리에 있어 줘. 알았어요.

선생님, 여기 랩바틀 없는데요? 아. 왜 없지. 네. 망할. 밤에 랩도 확인 안 하고 뭐 했냐고. 야. 걔 나이트 때 뭐 했냐? 하니까 아니, 이브닝 욕하면서 일하던데? 하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 입으로 일했구나, 니가 그렇지.


선생님, 애 세데이션 시키려고 약 먹였는데 포크랄 다 토해서요. 그럼 금요일날 하죠, 뭐. 내일 진료과에서는 집에 보내려 하던데요? 그리고는 없는 답장. 프리세덱스 오더 가능할까요, 얘 원래도 계속 토해요. 낼게요. 선생님! 검사실에서 애 빨리 재워 달라는데요. 아, 네.

코피가 안 멈춰요. 잠시만요, 아. 어떡하지, 골수검사한다고 교수랑 PA 다 저기 들어가 있는데. 얘 PLT 몇이더라?잠시만요. 그런데 거즈 말고 솜으로 주시면 안 돼요? 드릴 수 있죠, 있는데. 아오, 처치실에는 사람이 다 들어차 있다. 저 긴장감 넘치는 공기. 어머니, 죄송해요. 일단 이거 쓰시고.. 엄마는 얼굴로 아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어제의 나를 좀 원망했다. 알았어야지. 원래 진짜는 연휴 그다음 날이라고. 연휴 다음 날 오후에 입원하는 애들이 잔뜩 뭔가를 하는 날. 원래 그래서 월요일보다 화요일이 더 바쁘다. 병동은 대체로 그랬다. 아. 밥도 못 먹었다. 그건 원래 그런데.. 일 안 하는 차지, 문제 많은 애들, 문제 많은 상황. 한두 번도 아닌데 힘에 부쳤다. 아. 힘들다. 언제 퇴사하냐. 진짜.






왜 남들 다 하는 일. 여기 이름이 올라 있는 이십 명쯤의 간호사들이 다 하고 있는 일을 하는데 왜 나만 이렇게 지랄맞은지 이해할 수 없어서 더 화났다. 항상 그렇다. 왜 나만 이렇게 화가 나는 것 같지. 왜 이렇게 다 죽.. 그래. 말이 너무 험하니까. 다 부수고 싶지. 폭풍이 몇 번이나 지났던가.

이런저런 일들을 다 해내면서 웃는 것도, 그 띠꺼운 표정들을 보고 못 본 척 하는 것도, 상대방 말은 끝나지도 않는데 전화를 끊는 싹수 없는 것들 머리끄댕이라도 잡고 싶은 걸 참는 것도. 힘겨웠다. 이게, 무기수의 외출이야?






선생님, 아까 누구누구 때문에 전화드렸던 어디 병동인데요. 왜 사람 말 안 끝났는데 전화 끊으세요? 그러면 거기서 이 초쯤 있다가 선생님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하겠지. 알아서 뭐하시게요, 하면 너무 안 쫄린 척하는 초딩 또는 중학생 같으니까 말해 준다. 누구누구인데요. 선생님은요?


하. 그래. 그러면 병동도 묻는다. 안 물어도 내 이름 사내 메신저에 치면 소속이 같이 뜬다. 그럼 어디서는 그러겠지. 그 병동에 간호사가 그렇게 말했다던데요. 내 이름은 애초부터 안 중요하고 나를 데리고 있는 이 병동 전체가 싸잡혀서 오르내린다. 씨. 이게 뭐라고. 그래서 참는다. 진짜다. 내 이름 석 자만 붙어 있었어 봐. 넌 죽었어. 언제 죽을래?

이전에도 앞으로도 없겠지. 이건 다 내 상상이니까.

외출 중인 무기수임을 상상하는 나의 상상.




친구의 카톡에 있던 제니가 참 예뻤다. 야. 난 오늘 무기수였어. 아무도 안 죽이고 퇴근했으니 됐다. 그랬더니 맞아, 출근할 때 보면 그 사람들이 다 잡혀 가는 노예들 같더라, 라고 했나. 아니, 친구야, 그거 아니야. 그 뜻 아닌데.

까딱하면 다 죽여 버릴 거라는 마음을 참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야. 이미 전적이 있는. 노예? 그런 건 뛰어넘었어. 노동은 내 형벌이 아냐. 내가 선택했는걸? 하핫.






김소영 비빔밥에 가고 싶었다. 딴 건 없고 그냥 오갈 때 보이길래. 이름이 귀엽잖아. 그래서 뭣 같은 근무가 끝난 후에 가기로 했다. 나 혼자.

조금은 위로가 됐다. 이브닝번으로 출근한 동기가 잔뜩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했더니 아 ENT PA 왜케 싸가지 없어? 진짜 개빡쳐. 라고 했다. 그래. 나만 화나는 게 아니구나. 모두가 다 그러고 있구나. 하하.



그렇게 나는 그 동기를 뒤로 하고 과자를 잔뜩 까먹으며 남은 전산을 정리하고 버스를 탔다. 고프고 입이 짰다.

이럴 거면 퀘스트에는 돈을 왜 그리 썼을까, 진짜 비빔밥류밖에 없네. 날치알 먹어야지, 생각하면서.






사실 다 거짓말이다.

다는 아닌데 어차피 글로 옮긴 것과 현실은 똑같을 수 없으니까 틀린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한 거짓말이다. 나는 김소영 비빔밥을 먹지 않았다. 못 먹었다.


내가 병동에서 과자를 그렇게 먹어댄 걸 어떻게 알았는지 가게 아주머니가 '지금 점심 재료가 다 떨어져서..' 라고 잔뜩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날치알 비빔밥에 사이드 냉모밀 먹을까 생각했는데 글렀다. 사실 미안하실 필요 없는데. 네 시 반이면 어차피 장사도 안 되는 시간이다. 요새 사람들은 브레이크 타임 걸어놓는 시간대.




대신 집에 와서 신혜숙 육개장을 먹었다. 그리고 세이렌 커피집을 가려다 못 갔다. 잠이 쏟아져서 잤기 때문이다. 30분 후에 알람을 맞췄는데 일어나니 네 시였다.

신혜숙은 우리 엄마다. 엄마가 갖다줬던 국에 밥 먹었다. 세이렌 커피집? 사이렌? 예상한 대로 스타벅스다. 뇌절도 적당히 해야 하니까 이제 그만 쓴다. 근데 왜 바쁨의 뇌절에는 끝이 없을까. 재미 없는데, 이런 거.


나의 허약해진 몸도 뇌절을 멈추지 않는다. 감기 똑 떨어진 지 2주 간신히 된 것 같은데 목이 진짜로 또 아프다. 버티지 말고 그냥 병원에 가야겠다. 아. 인생.






엄마, 나한테 말 안 했잖아.

밥 사먹고 엄마아빠한테 어버이날이라고 용돈 쏘는 모습이 이렇게 초라할 거라고 말 안 했잖아. 알려주지 그랬어.

일은 진짜 너무 힘들다.

멍멍멍멍 힘들다.


오늘도 출근해야 한다. 한 번 더 쓰기로 한다.

바쁠 것 같으니까. 뭐를 쓰냐고?

내가 복역 중인 무기수라는 속임수.

진짜로 그렇게 일할 거야.

걸리기만 해봐, 어?




근데 무기수도 잘릴까봐 겁을 먹나? 모르겠다. 안 해봐서.




+

신혜숙씨, 아셨나보다. 이런 거일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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