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븐도 Dec 24. 2024

아름다운 그대들과, 2024

1/2. 사고가 좀 났어요. 덕통사고.






그런 말이 있다. 덕후는 원래 묻지 않은 것에 대해 떠든다고.

그리고 나는 '덕후'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되어 반가운 사람 중 하나다. 빠순이보단 어감이 낫잖아.










나는 중학생 때 모 아이돌 그룹의 팬이었다. 엄마에게 들키지 않게 앨범을 배송받 혹시 찢어질까, 손자국 남을까 하는 마음에 포스터는 조심조심 꺼내보고 다시 도로 집어넣었다. 그렇게 산 몇 개의 앨범들은 정말 슬프게도 짐덩이가 되어 언젠가의 이사 때 다 버려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들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 혼자, 친구와 함께 휴대폰으로 사진을 모으고, 노래를 듣고, 나오는 방송을 챙겨 보고, 그것에 대해 떠드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들의 굴곡진 역사가 나를 자꾸 흔들어 놓았다.

대학교 1학년 때인가, 아직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기능이 있었던 때였다. 강의가 끝나 기숙사로 가는 버스에 앉자 모 멤버의 이름이 또다시 검색어 1위에 올라 있었다. 나는 좋은 일이 아님을 직감했고 잔뜩 도배된 기사 제목을 읽었다. 그리고 실망조차 하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고등학생 때가 아니라, 이제 정말 '탈덕' 했음을.




-




고등학생 때는 외국 노래만 들었다. 굳이 외국이라고 표기하는 이유는, 부끄럽게도 한국말이 들리는 모든 노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방탄소년단과 트와이스와 산이와 또 방탄소년단과 엑소와 블락비 등등이 있었다. (안 들은 것치고는 잘 알고 있다. 학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스트가 있었다. 아직도 활동을 하는군, 신기하다,라고 생각했다. 초등학생 때 사이가 틀어진 절친이 그 그룹을 상당히 좋아했다. 중학생 때, 내가 좋아했던 그룹을 까내리친구들이 그들을 좋아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아무튼 그랬었다. 그들의 노래는 늘 대체로 좋았다. 내가 좋아한 그룹의 노래들과 함께 초등, 중학교 수련회 장기자랑의 필수 코스였다. 그들의 노래는 사실 신났지만 단단히 아닌 척했다. 역시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고, 그땐 그랬다.










대학생 때는 해외 인디 밴드들 노래를 주로 들었다. 고등학생 때와 다르게 무슨 척을 하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니라 그냥 그땐 그랬다. 중간중간 반짝반짝 빛나는 케이팝 걸그룹 노래도 듣고, 전 세계적으로 히트 치는 곡들도 듣고, 드라마 주제가도 들었다. 아무튼 그렇게 결국은 다 섞여서 지금은 아무 노래나 다 듣는다. 다 좋던데? 그땐 왜 그러고 살았나 모르겠어. 하여간 그런 시간들이 지났다.


3월, 자취를 시작했다. 기분이 좋았다. 집이라 부르는 곳으로 향할 때, 누군가가 자고 있거나 뭔가를 먹은 후 밀어놓지 않은 식탁 의자를 보고 스트레스받을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너무너무 행복했다. 출퇴근 시간이 길어졌지만 그것도 즐거웠다. 아무것에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랜덤재생으로 음악을 듣는데 마음에 드는 곡이 나왔다. 하이라이트네. 역시나 생각했다. 음. 아직 활동을 해? 좋네. 다음 곡도 좋았다. 발매한 지 이틀 된 앨범이었다. 기뻤다. 나는 항상 무언가의 대유행이나 신드롬이 지나가고 나면 그것을 뒤늦게야 '뭐야, 너무 좋잖아 / 예쁘잖아 / 멋있잖아' 하는 경향이 있다. 막 나온 따끈따끈한 곡이 내 마음에도 들다니. 어떤 흐름을 잘 따라가고 있는 것 같아 상쾌했다. 그렇게 며칠 그 노래들을 들었다. 그래. 이 사람들 노래 항상 좋았지, 하면서.




-




4월, 다른 병동으로 파견을 가야 했다.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온갖 몸이 갈리는 일을 다 해내야 했다. 타 부서 사람이라 저녁부터 밤에 처리해야 하는 일은 적합지 않다는 이유로 2교대 데이 근무만 한 달을 했다. 저주스러웠다. 취향이고 뭐고 그냥 신나고 자극적인 노래들을 찾아들었다. 아이돌 노래를 실컷 들었다. 뮤비도 보고 무대영상도 봤다. 하이라이트. 당신들 여전히 참 잘생겼구나. 여섯 명이었지만 네 명이 되어 버렸네? 더 빠질 사람은 없나. 참 이 사람들도 사연이 많군, 생각했다. 검색했더니 콘서트를 한다고 한다. 그렇지, 앨범을 냈으니 콘서트를 하겠지. 이미 한 거 아냐? 어, 안 했네? 티켓팅 끝난 거 아냐? 그렇지, 3월 컴백이면 켓팅도 끝지 않았을까.

해외 밴드들이나 뮤지션들 공연 티켓팅은 길면 일 년 전, 아주 짧아도 서너 달 전에는 한다. 그래서 나는 아, 이번에도 한 발 늦었다, 내가 그러면 그렇지. 했다. 그런데.. 안 했네?

5월 공연인데 아직 티켓팅을 안 했어? 이참에 아이돌 콘서트 한 번 가봐? 그 비스트잖아.




-




나는 그날 아침 지하철역에서 그들의 이름을 검색한 나 자신에게 묻고 싶다.

입덕부정기 아니에요? 맞잖아요.

그냥 신보가 좋아서 콘서트를 가요? 그것도 3일이나.










이전에 좋아했던 그룹의 멤버 본 적이 있다. '끝났구나'라고 생각한 후 반년 , 다니던 대학교에 그룹의 멤버 둘이 왔던 것이다. 그들은 참 멋있게 무대를 하다가 갔다. 군복을 입은 채로. 신기하게도 별 느낌이 없었다. 아, 저 사람들이구나,  내가 장장 4-6년을 좋아한 사람들이 저기 있구나. 그렇군, 했다.

밴드들 공연은 몇 번을 갔지만 그때에 이어 아이돌을 보는 건 이번이 최초였다. 하지만 기대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아닌 척했던 건가?



노래들을 좀 더 들어 보려 했는데 무대영상을 보다 보니 자꾸 알고리즘이 콜드플레이의 스타디움 공연, 에드시런의 라이브 영상 같은 걸 띄워줬다. 거대한 경기장에 A sky full of stars를 배경으로 반짝이는 불들이 잔뜩 들어오는 영상 너무 '쩔었다'. 대히트 친 노래들 말고는 몇 번 듣지도 못했는데 그들의 공연날이 다가왔다.




-




3일 중 언제의 티켓을 잡을지 몰라서 아예 3일 다 저녁에는 시간이 비도록 스케줄을 신청했다. 한 번 쓰고 말 건데 사야 하나, 하고 오십 번은 고민하다가, 결국은 막판에 웃돈을 얹어 주고 응원봉도 샀다. 숨길 필요도, 들킬까 조마조마한 느낌도 없이 이런 걸 사고 예매하는 기분이 이상했다.


공연 전날이 되자 티켓 예매 사이트에는 양도글이 올라왔다. 내가 잡은 티켓은 첫째 날 뒤쪽 좌석이었다. 뭐 어떤가, 나는 구경하러 가는 건데. 그것도 감지덕지였고 기뻤다. 연예인이니 당연히 잘생겼을 거고 얼굴은 화면에 커다랗게 띄워 줄 텐데 굳이 앞에까지 가서 봐야 하나, 했다. 했는데. 양도로 올라온 자리들은 '대체 이런 자리를 왜 놔주는 거지' 싶게 앞쪽들이었다. 6만 원이나 주고 산 응원봉도 있겠다, 그냥 갈까, 하고 세 번씩 고민했다. 6만 원 때문에 약 30만 원을 더 쓴다는 말도 안 되는 계산법은 어디서 들어맞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나는 3일간의 콘서트에 모두 출석하게 되었다.










나는 기대를 뒤엎는 대상들에게 반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경외심 같은 것마저 혼자 가지게 되는데, 그건 그만큼 나의 자의식이 비대한 탓이겠지. 아무튼.

공연날이 되었다. 졸려 죽을 뻔했다. 데이근무가 끝나고 탄 늦은 오후의 지하철은 조금 덥고 사람이 많았고 나는 너무 피곤했다. 그 앞에서 누구든 붙잡고 까, 아니면 그냥 가지 말까. 십몇만원을 쓴 건 맞지만 나는 그때 너무 졸렸다. 당장이라도 어디든 글 올려서 양도할까, 가격 낮추면 누구든 나타나긴 할 텐데, 하며 벼락치기로 그들의 노래를 틀어놓고 끊임없이 졸았다. 기대치와 체력이 다 바닥이었다.




-




올림픽공원에는 공연 시작 10분 전에 도착했다. 아무튼 하이라이트의 팬들임이 분명한 그녀들을 쫓아 달렸다. 현수막에 잘생긴 얼굴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실감이 조금 나려 했지만 아무튼 뛰어야 했고 공연 티셔츠를 입은 스태프들은 목이 나가도록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입구에서 생수를 나누어 주었다. 응원봉을 꺼내서 인터넷에서 본 대로 연동도 시켜 놓고 공연장에 가득 찬 팬들과 텅 빈 넓은 무대를 쳐다봤다. 아, 이제 나오겠구나. 믿기지 않았다. 정말로 왔다니.


옆자리에는 허리를 쭉 펴고 앉은 여자가 슬로건과 응원봉을 무릎에 얹어 놓고 열심히 무대를 배경으로 한 티켓 사진을 찍고 있었다. 저런 건 어디서 주는 거지, 나만 없네, 생각했다. 입구에서 물이랑 같이 주는 건데 그냥 내가 지나쳐 온 거라는 걸 그다음 날 알았다. 아무튼 나도 그분을 따라 사진을 찍었다. 신기했다.

(그녀는 중간에 저기, 자리가 너무 흔들려요,라고 했다. 뒤에 ㅠㅠ를 붙여 줘야 할 것 같은 말투로. 내가 너무 신난 티를 감추지 않은 탓이었. 죄송했고 창피했다.)




-




정말 우스운 일이지만, 왜 그랬을까 싶다. 나는 늘 그렇게 생각해 왔던 것이다. 아직도 활동하네, 아직도 잘생겼네, 아직도 앨범을 내네, 멋지군. 하고 간단히 생각했다. 그러면서 노래를 듣고 사진을 보고 영상을 봤다. 그냥 그때 더 좋아한다고 생각했어야 하는데.. 왜 그리 늦게 인정했던 걸까. 하등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가끔 그런 생각이 들긴 한다.

조금 더 일찍 '입덕' 했더라면 작년 공연도 갔을 텐데, 내 '최애 앨범'의 수록곡들을 쫙 불러준 그 콘서트를 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들.











번의 끝났다, 가 있다.

대학생 때 그 통학버스에서의 '끝났다'.

그리고 그 공연장의 불이 모두 꺼진 뒤 등장한 한 멤버의 시원시원한 목소리를 듣고, 전광판에 잡힌 말도 안 되게 빛나는 얼굴을 격한 순간. 그때의 '끝났다'.

나는 그날 공연장에서야 인정했다. 아, 망했다. 끝났다,라고.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때부터였을까요, 아.. 네 남자를 향한 (유부남인 멤버가 있지만) 저의 팬심 가득한 일상들이 재생된 게 말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