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집 개

캐비닛의 또디니

by 이븐도





또디니.

그 강아지 이름이다.

어이가 없다. 그 인연만큼이나.






콘서트 첫 날.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거? 단연코, 드디어 공연장에서 본 이기광의 곱슬거리는 헤어스타일. 부정하기에는 정말 이런 것부터 먼저 떠올라서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아니, 얼굴이 너무 갸름해서 쭉쭉 편 머리보다도 그런 머리를 하면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전광판에 그가 잡힐 때마다 한숨밖에 쉴 수 없었다. 할 말이 없어서. 그리고..


밴드 버전으로 리믹스된 비스트와 하이라이트의 풀버전 곡들? 다음 곡이 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전주가 들릴 때의 전율? 그 쪼끄만 얼굴에서, 머리에서 어떻게 저런 성량이 나오나 매번 신기한 양요섭 라이브? 저렇게 땀을 흘리는데 화장이 어떻게 안 지워지는 걸까 싶은 메이크업? 천사? 요정? 왕자? 또 천사? 같았던 중간 의상? 말할 것도 없이 미치게 잘생긴 그들 개개인의 미모? 아는데도 놀라는 아. 저 사람들 노래 잘 했지, 싶은 목소리? 다 맞지. 맞는데.


현실에 남은 건 강아지다. 강아지. 생판 남인 그 집 개.





언니는 대체로.. 늦는다. 늦는다기보다 공연장에 구태여 일찍 오지 않는다. 이런저런 것에 관심이 많아 산만한 나와 다르게 그녀는 나에 비할 것도 아니게 짬이 깊은 팬이자, 하이라이트 그 자체에만 집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끔 나는 그 콘서트장에 모인 팬들이 궁금해 일찍 나가기도 했다. 사진 등의 목적보다는 사실 그게 더 컸다. 곳곳에 숨어 있다가 잔뜩 모인 나와의 동족들은 어떤 사람들이신가, 싶어서. 별거 없다. 그래서 오히려 앉아 있기만 해도 재미있다. 그게, 밴드 콘서트 공연장이랑 이런 아이돌 공연장이랑 분위기가 다 다르다고. 어떻게 놓치냐, 이 구경거리.



닿을 것 같지만 절대 닿지 않고 닿아서도 안 되는 존재인 그들에게 돈을 쓰고 시간을 쓰고 잔뜩 행복해하는 이 활동. 3일간의 공연이 끝나고 출근하는 다음 날 나는 그녀가 준 아크릴 키링을 챙겼다. 또디니. 언니가 그랬다. 소진이 팔자 좋아서 안 바쁘실 거예여 ㅋㅋㅋㅋ


병동 캐비닛에 넣어둔 이어폰. 빨간 옷을 입고 선글라스까지 낀 그 용맹한 강아지 또는 개가 인쇄된 열쇠고리. 집에 오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공연장에서 받아온 생수와 슬로건과 또다른 컨페티가 끝없이 떨어지는 옷가지보다도 그게 더 비현실 같아서.






언니와 나는 인터파크 예매창에서 만났다. 내가 3일씩이나 콘서트를 가는 미친 짓을 하려고 마음먹은 며칠 전 나에게 표를 양도한 사람.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사실 기대가 없었다. 돈은 돈대로 입금했으나 사실 떼먹히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걸 어디에 책임을 물어. 양도하지 말라고 사이트에서 못박아 놨잖아. 근데 기대평 쓰라고 열어놓은 페이지에서 다들 하던데? 14만원이던가. 그 때 거래한 사람이 그 언니가 아니라면 나는 지금까지 덕질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누르는 족족 이선좌에 가끔은 예매창이 아닌 외국어 안내 탭을 눌러 티켓팅 전체를 말아먹고, 가끔은 라이브 방송 등의 시간 자체를 아예 까먹는 등의 처사를 반복하는 내게 그녀는 내 덕질 그 자체였다. 일면식도 없는.. 건 아니지만 하여튼 면식이 있다고도 할 수 없는 멤버들보다, 이 사람과의 인연이 더 진짜고 더 깊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오늘 진짜 다 미친 것 같았어요, 같은 말로 시작된 대화. 작년의 공연이 끝난 후 오른 9호선. 라고온 콘서트 후의 귀갓길? 아니. 머글에서 덕후로 가는 길. 이런 사람들이었구나, 짱멋있다. 진짜 잘생겼다. 얼굴 너무 작다. 아이돌 콘서트는 이런 거구나. 신기하다. 아 어떡하지. 망한 것 같은데? 같은 감정들. 내가 '머글'임을 알고 있던 그녀. 끝은 시작이라 했던가.


트위터, 공식팬클럽 가입, 인스타 공지채널 등록, 콘서트 음원 공유, 이걸 지나치면 인생을 손해보는 게 분명한 사진들, 앨범 공구, 사전녹화 공개방송 후기. 워터밤? 카스쿨? 언니 저 이 때 오프 맞는데, 갈까요? 음. 아니요오, 진짜 기다리다 쓰러져요. 굳이 가지 마요. 고능하게 덕질해야 돼요 ㅋㅋㅋㅋㅋ 아니 !! 저기 사진에 저 차. 거기 말고 저 사이드로 가봐요 아마 목 푸는 소리 들릴거예요 백퍼. 들리죠? 아 어떡해 진짜 들려요 미친 말도안돼.




그녀의 말을 따라간 곳에 덕질이 있었고 나의 지출내역이 있었고 추억이 쌓였다. 이기광이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던 시절의 일화, 공방에서 받아온 가사지, 포토카드, 그녀가 한창 입덕한 지 얼마 안 되어 도파민에 미쳐 체력이 남아나던 시절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받아온 스티커와 팬들이 만든 굿즈들, 그 날의 눈물과 빗물과 기쁨과 행복 등등이 다 서린 종이쪽과 스티커와 카드들. 멤버들의 얼굴이 있는 거라서? 귀여워서? 그것도 맞지. 그녀가 보낸 택배를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감정은 신기하다, 였다. 사실은 어디 쓸 데도 없는 공식 팬클럽 키트를 받은 날보다 더. 그녀가 해온 덕질의 부피를 내가 다 체감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그들을 일 년 넘게 좋아했고 한두 번의 행사와 다수의 공연들을 관람했다. 그녀는 정말 오랜 세월을 좋아했다. 그녀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이었다. 착하다, 멤버들이. 나는 믿지 않았다. 연예인인데? 그래서, 그것보다는 그 오랜 시간을 성인이 되어서 좋아했는데도, 그들에 대해 그렇게나 아는 게 많은데도 착하다는 말을 하는 그녀를 믿었다. 원래 그런 거잖아. 돌아선 팬이 가장 무서운 이유라고. 알 것도 모를 것도 다 알고 있기에 강력한 존재가 되는 거.




그녀는 어떤 종류의 공연이든 내게 앞자리를 구해 주려고 했고 더 좋은 자리로 바꿔 주려고 했다. 사실 이유를 파고들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그녀가 한창 서울에서 덕질을 알차게 하던 때를 함께한 것도 아니고, 인생의 어느 시기를 같이 부대던 것도, 은 직업이나 출신지를 공유하는 것도 아니었다. 우린 그냥 온라인에서 만나 연예인을 매개로 이어지고 있는 연이었다. 정말로.






그녀는 부산 사람이다. 언젠가부터 카톡창에 강아지 사진들이 올라왔다. 사실 강아지라고 하기엔 뭐하고 개라고 하는 게 더 맞는 그 존재. 소진이. 나는 애완동물에 관심이 없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싫지는 않으나 내가 스스로 들여서 키울 일은 아마 살면서 없을 것이다.



진돗개와 어떤 종의 믹스라고는 했다.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잘생긴 강아지였다. 위엄 있게 생긴 주제에 이름은 '소진'이라고 했다. 그런 쪼끄만 이름표 목걸이 같은 건 사실 전혀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그 작은 펜던트에 명확히 써진 이름이 너무 웃겼다. 그래, 니가 소진이구나. 소진이. 반은 그냥 하는 반응이었고 반은 진심이었다. 우와, 너무 귀여워요 ㅋㅋㅋㅋㅋㅋ왕커서 왕귀엽네. 왜 저렇게 커요? 아 이름이 소진이예요? 진짜 골때리네 아니 여자예요? 아하.


강아지가 움직이는 영상에는 미묘하게 억양이 다른 그녀와 다른 사람들의 말소리가 북적하게 섞여 있었다. 강아지는 그냥 강아지였다. 내가 호수공원을 돌면서 일주일에 보는 개는 못 해도 오십 마리는 될 것이다. 이 강아지도 그들과 똑같았다. 사실 더 멀지. 밀양의 어느 가정집에서 나보다 더 사랑받으며 좋은 것만 먹으면서 지내는 진도 믹스 암컷.






웃긴 일이었다. 가끔은 하이라이트 멤버들의 이런저런 사진이나 영상 클립보다 그 강아지를 보면서 웃는 날들이 있었다. 출근길, 퇴근길. 기합 또는 체념과 무념무상. 또 가끔은 우울과 무기력이 앉는 그 버스와 지하철에서의 시간. 경상남도 어딘가에서 내가 평생동안 어쩌면 한 번도 볼 일이 없는 그 강아지가, 모처의 길가에서 벚꽃을 귀에 얹고 서 있거나 햇빛이 쏟아지는 잔디에 누워 있거나 부엌 베란다 방충망 앞에서 저편을 쳐다보는 모습. 방바닥에 퍼질러져 주인 또는 사진 찍는 사람을 쳐다보는 모습. 사실 전혀 안 어울리는 옷을 입은 모습. 여드름 날까 봐 나도 안 먹는 요거트를 좋아해 많이 먹는다는 그 강아지. 살쪄서 다이어트를 했다는 근황.


내가 얘를 왜 보고 있지 하는 생각이 다. 어이가 없어 웃는 건지 이 커다란 개가 귀여워서 웃는 건지 모르겠는 감정. 내가 다이어리를 쓰는 것을 안 언니는 스티커를 갖다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래서 정말 콘서트를 기다렸다. 그 강아지 스티커를 받으려고. 아, 언니. 언제와여 제 스티커 내놔여, 하면서. 그렇게 그녀에게 줄 쿠키를 사서 공연장으로 갔다.






양요섭과 전미도가 출연한 날의 뮤지컬. 그 날을 빼면 우리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한 시간은 채 하루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티켓팅 전후로 전화를 할 때를 빼면 목소리를 들을 때도 없다. 부산 사투리가 섞인 여린 목소리.


언니, 근데 여기 저 사람도 저랑 같은 티켓팅 하러 온 것 같아요, 라고 피씨방에 앉아서 카톡을 보내자, 헐 뭐야. 찾아가 봐요. 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말. 전선 뽑아버려요.

아니 전선을 왜 빼요 ㅋㅋㅋ 경쟁자잖아요 빨리 가서 끊어요. 아 망했으면 좋겠다 그 사람. 진심이예요? 당연하죠

나보다 욕도 안 하고 성정도 약한 사람 같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에게는 의외인 모습들이 나왔다. 아니 띠드버거님 필요한 정보만 주는 연습을 하셔야겠어요 ㅠㅠ 지난번에 저한테도 너무 다 알려주시고.. 나쁜 사람 많아요 다음부터는 알려달라고 다 알려주지 마세요 저한테 꼭 물어봐요.






공연장에서 사 온 반다나. 키체인. 그거 말고 그 강아지 키링을 거기다 달아놓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멀고 먼 성수 또는 그 사옥 어딘가에 계실 그 멤버들보다 그 강아지가 나를 더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았거든. 어차피 일면식 없는 건 마찬가지. 월요일 이브닝. 당연히 바쁠 수밖에 없는 날. 매일매일 이벤트가 생기는 애. 퇴근도 식사도 또다시 보장을 못 할 것 같은 두려움. 사람이 가득 차 숨이 딱 막히는 병원 1층 로비. 거길 다 통과하면서 나는, 하이라이트가 아닌 소진이한테 빌었다. 야, 나 안 바쁘게 막아줘라.


멤버들에 대해서 아는 거 백 개보다도 어쩌면 이제는 그 언니에 대해 아는 걸 백 개 쓰는 게 쉬울지도 모른다. 덕질. 환상을 좋아하는 것. 그것보다 그걸 함께한 이 바람 같았을 연이 이어진 것만은 진짜라 신기한 일이다. 어차피 그 강아지나 아이돌이나 나와 상관이 없는 존재임은 매한가지이나, 그 시간은 안정감을 줬다. 아무것도 단언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시간들. 지나온 건 변하지 않잖아. 그녀가 행복했던 시간과, 나에게 전유된 것들과, 그 캐비닛 안에 박제된 우스꽝스러운 모양새의 잘생긴 소진이처럼.




어이없어 즐겁고 소중한 것들이다. 혼자 하면 활동이었을 게 함께 했더니 추억이 됐다. 신기한 일이야. 내가 같이 공방을 뛴 것도 그 강아지에게 단호박 간식을 준 것도 아닌데 말이지. 인연은 그래서 이따금 필요하고 좋은 건가. 맥락을 끼운 시간에 추억을 꿰매 놔서.


그녀는 내게 하이라이트의 다섯 번째 멤버 같은 존재가 되었다. 돌아보니 그렇다. 그녀를 빼놓고는 이 시간들을 떠올릴 수 없게 되어 버렸거든. 아마 10월, 하이라이트와 전혀 관련이 없는 오아시스 콘서트장에서도 나는 그녀와 함께일 것이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앞자리를 구해준 그녀와의 인연에 또다시 신기해하고 무한한 감사를 보내면서.






그리고 콘서트 다음날 이브닝. 바빴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한 번은 질문할 수 있었거든. 그 또디니가 있었어서, 더 바쁠 수 있었을 게 안 바빴을 수 있었던 거 아닐까, 하고.


밤 열두 시가 훌쩍 넘어 어처구니없게 비가 미친 듯이 내리던 지하철역 출구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팔자 좋은 소진아, 조금만 더 좋지 그랬어.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하고.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