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륙양용의 인간

레일 한 번도 안 쉬고 가기

by 이븐도





언젠가는.

접영과 자유형만으로.






어디서 내려요.

예?

뭐라 말씀하셨는데 잘 안 들렸다, 사실. 근데 그 뜻이겠지. 뒤를 도니 버스에는 나밖에 없었다.

22단지요.

요기? 저 앞인데.

아저씨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채 버스 차창 너머 어딘가를 가리켰다.

아저, 수영장 가야 돼서.

수영장? 나 어제도 2km 했어.

네? 아. 수영요? 어, 거기 50미터 아니예요?



아저씨는 다시 앞을 보며 운전했다. 그럼 40바퀴?

자기 자랑이고 뭐고 정말 쇼킹이잖아.

40바퀴 도신 거예요?

별 것도 아냐. 오늘도 세 시에 마치면 가서 3키로..

어. 대단하시다. 안 힘드세요?

힘들긴. 젊을 땐 6키로도 했어. 근데 왜 저길로 가요. 월드컵 가. 거기가 젊은 사람들도 많은데. 오래돼서. 오래된 데가 잘하는 사람들이 많아.

저 못해서 잘하는 사람 많으면 안 돼요. 하하.

거기가 더..

그리고 또 안 들렸고. 아저씨는 아무튼 앞을 보며 열심히 말했다.

근데 왜 그렇게까지 하세요.

재밌으니 하지. 그리고 젊었을 때..

아하. 아아.

사실 잘 안 들렸다.

저기예요. 월드컵 가요. 거기가 젊은사람들이 많다니까.

고맙습니당.

건 수영 해요!


그리고 빠이빠이.






친구는 내게 돌고래 화이팅, 이라고 카톡을 보냈다. 돌고래,돌고래? 무슨 돌고래. 나는 후진 사람이야, 정빈아.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대체 어떻게 다리를 프로펠러 삼아 물을 건널 생각을 한 걸까. 몸은 기계가 아닌데. 아니지. 프로펠러는 사람 몸보다 훨씬 나중에 나왔구나.


그 땐, 그 그 때가 도대체 몇천만년 전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땐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잖아. 아. 태초의 인간들이여. 당신들 정말 강했구나.






오리발 없이 접영을 하려면 상체 힘이 장난 아니게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자유형을 할 때는 내 다리와 발이 그 정도의 지구력밖에 못 내는 게 원망스러웠다. 정말 내 몸이 아쉬웠다. 다른 요소가 딱히 없었다. 이어폰도 없고, 지나가는 강아지도 없고, 사람도 없.. 있긴 한데 아무튼 없다. 없어. 수영은 러닝과 비슷하고 또 달랐다.


수영장에 갔다. 허연 몸으로 바글거리는 탈의실, 이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생긴 것 같은 수영복 탈수기, 할머니들, 흘러내린 살, 수술자국, 머리카락, 터진 살, 셀룰라이트, 그냥 살, 허벅지, 울퉁불퉁한 살. 맨얼굴, 허연 입술. 왜지. 똑같은 세상인데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더더욱 눈에 안 들어오는 온갖 몸들. 목욕탕보다 더 했다.






십수년 전의 경험이 되풀이될 걸 예상했다. 모두가 나를 지나쳐 가겠지. 또 레일에 붙어서 해파리처럼 다리를 꿈지럭대며 누군가를 앞으로 보내줘야 하겠지. 아아.


근데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자유수영 초급 구역이라서. 내가 엉터리 접영을 시도하다 멈춰 서든 더 엉터리인 자유형을 하다 헉헉거리든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러닝보다 더 편하고 불편했다. 이유는 같았다. 정말 물에서 이동하는 것 자체만 신경써야 했기 때문에. 물이 나를 누르는 걸 뚫고 앞으로 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러닝하다 걷는 건 쉬는 거잖아.


일단 무릎이 안 아팠고 허벅지가 안 아팠다. 애초에 아프다는 느낌이 없었다. 다만 약하게 버거운 느낌이었다. 러닝이 충격이라면 수영은 압력이었다. 걷기 전용 레일이라는게 있었다. 걸었다. 십몇년만이야, 이게.




수영장, 그간 안 간 거 아니지. 하지만 그런 가짜 말고. 진짜 고무 수영모 쓰고 물안경 쓰고 등 파인 아레나 수영복 입고 외계인 같은 모양새로 하나의 희부연 신체가 되어 오는 수영장. 가슴께까지 차는 물. 내 몸 전체를 닿는 모든 곳에서 어디로든 약하게 미는 그 모든 것. 뭐가? 물. 진짜 물. 이건 조여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리누르는 것도 아니고. 압력이다. 약한 압력. 그렇게 쎈 압력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압력.


나아가려면 그 압력을 온몸으로 밀어내야 했다. 그렇게 걸었다. 진짜 어기적 어기적. 기분이 좋은 줄 몰랐는데 사실 되게 좋은 거였다. 계속 웃었던 것 같거든. 그러고 있는 스스로가 어이가 없어서 절반, 정말 수영장에 온 게 좋아서 반. 근데 그게 그거네.





마지막으로 이런 '각 잡힌' 수영을 한 건 아마 12살 때. 상반기에 그만뒀다. 강습은 4시에 시작했고 1시간이었다. 동생이랑 같이 집에 오면 6시였다. 집에 와서는 저녁을 먹었다. 그만둬서 좋았다. '오후 시간'이 생겼으니까. 뒤에서 쫓아오는 애들을 레일에 처박힌 것처럼 멈춰서 먼저 지나가도록 양보해도 되는 일을 그만둬도 됐으니까. 그런데 한 달도 못 갔던 것 같다. 다시 다니고 싶었다.


대학생 때 쓰다 만 다이어리에 수영장 풍경의 마스킹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수영장 관련된 책들을 많이도 샀다. 꽃분홍색, 노란색, 아쿠아마린. 수영장 하면 통상 떠올리는 것들, 어울리는 것들. 그 관념 속의 알록달록하고 유치하고 귀여운 것들. 그리고 16년 만에 진짜 다시 수영장.


아마 대여섯 살때부터 다녔다. 다섯 살 땐가. 그런데 나올 때 보니 키 120cm 미만은 출입이 안 됐다. 그 땐 어떻게 다녔지? 아. 유아풀. 그 땐 그랬겠구나. 인생에서 나는 키가 큰 적이 없었는데. 하여간 그래서 애들은 없었다. 대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았다. 걷기 구역은 사실상 스탠딩 목욕탕이었다. 할머니들은 거기서 한 시간 내내 이야기를 했다. 적어도 내가 여길 찍고 저길 찍는 걸 그래도 반복할 동안 계속 같은 사람들이 서 있었거든. 좋았다. 나도 나이 들어도 수영장에 오면 되는 거잖아. 선 채로 이야기만 하든 평영이라도 하든 여길 올 수 있다면 정말, 진짜진짜 좋을 것 같았다.






수영. 접배평자. 배운 순서대로라면 사실 자유형, 배영, 평영, 접영. 기억은 했다. 정말 기억만 했다. 러닝이랑 달라서, 내가 뭘 얼마나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여긴 물이라고. 몇 바퀴를 돌아야 하는 건지, 어떤 영법으로 해야 맞는지도 알 수 없었다. 비슷한 건가? 공원을 처음 뛸 때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물이니까. 목표는 육지의 것보다 작았다. 작고도 컸다. 이 레일을 한 번도 발 안 디디고, 멈추지 않고 가보는 거. 가능은 했다. 편법을 쓰면.


배영과 평영만 하면 가능했다. 그러니까 양 다리로 물을 차내며 계속해서 발차기를 하지는 않아도 되는 두 가지. 그래서 편법이었다. 배영? 차내긴 하지. 누워 있으면 귀로 물이 다 들어찬 채, 내가 발 차는 소리가 음소거된 채 멀리서 들렸다. 수영장 천장의 온갖 철근들과 커다란 등이 보였다. 내가 튀겨내고 있는 물방울들이 반짝이며 쏟아지는 배경으로. 하지만 누워 있잖아. 그나마 나았다.




떠올려보려 했다. 나는 뭘 제일 좋아했더라? 뭘 제일 못했지? 생각이 안 났다. 하다보니 생각났다. 자유형. 사실 접영도 마찬가지였지만 접영을 할 때는 치트키 효과를 톡톡히 봤었던 게 기억났다. 오리발. 하지만 자유수영 이용권자인 나에게 오리발 같은 게 허용될 리가. 아직 살 생각도 없지만. 아무튼 자유형이었다.


오른팔을 먼저 돌리고 숨을 쉬는데 엄마아빠, 아니.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귀에 팔 딱 붙이라고! 딱 붙여! 아빠는 잘하고 있서어 했었다. 그러면 고개를 휙 돌려 나는 엄마를 째려봤다. 그럼 엄마가 하든가, 라고 생각했겠지. 팔을 귀에 딱 붙이는 것. 못해도 6년이었을 강습 내용은 하나도 기억 안 나고 엄마의 그 고함만 떠올랐다. 딱 붙이라고? 아, 딱 붙이기 힘들었다. 사실 다 힘들었다.






강습 때는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사실 안 늦춰도, 느려터진 나를 다른 애들이 지나쳐 갔기 때문에 그러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정도는 가능했다. 여긴 자유수영 초급 레일이라구. 하지만 아예 또 멍하니 둥둥 떠 있기만 할 수는 없었다. 참나. 그건 비슷하네. 러닝할 때도 그랬다. 달리기 때는 신호등이 그렇고 수영장에서는 사람들이었다.


저편에서 빨간 불이 보인다면? 곧 초록불로 바뀔 거니까 달려야 한다. 초록불이라면? 어쨌든 초록불이라는 게 보일 정도라면 시도는 해 봐야 한다. 달려야 한다. 이러나 저러나 그렇다. 사람? 달리기 때는 옆으로 지나가면 된다. 레일에서는? 누군가 나를 지나쳐 가려 한다면 옆으로 바싹 붙어 줘야 한다. 쫓아붙는 누군가를 피하기 위해 더 빨리 수영하는 거? 달리기 때는 안간힘을 써서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긴 아니지. 물속이었다. 이미 온몸으로 나를 누르는 물에서 어기적거리는 것만도 꽤나 힘을 쓰고 있는 중이라고.






사물함을 결제한 후 2시간 후면 자동으로 잠긴다고 했다. 그게 반복되면 블랙리스트에 오른다고 주의사항에 쓰여 있었다. 그렇다면 앞뒤로 씻는 시간을 뺐을 때 오래 해 봐야 한 시간 반. 한 시간 반? 흠. 나쁘진 않은데 좀 짧네, 라고 생각했다. 짧기는, 한 시간도 채우기 힘들었다. 도무지 데이터가 없었다. 어릴 때 주말에 수영장 가면 얼마나 있다 왔더라? 기억이 안 났다. 그런데 당시에도 열심히 수영을 하진 않았었다. 그건 기억났다.


그냥 수영장에 둥둥 뜬 채 멍이나 때렸다. 그 물에 잠긴 느낌을 좋았다. 귀까지 물에 찬 채 누워서 천장만 보고 싶었다. 계속계속. 배영이 그래서 좋았다. 안면부만 둥둥 뜬 채, 물이 다 들이차서 모든 소리가 이불 세 겹쯤의 바깥에서 들리는 기분.




오십 분 정도를 물에 있었다. 정말 높고 짙은 밀도의 할머니들의 수다를 들으며 머리를 말리고 다시 옷을 입었다. 별 거 없었다는 생각을 했다. 진작 올걸 싶었다. 달리기를 했을 때는 미치게 기분 좋은 순간들이 있었다. 수영은 그게 없었다. 러닝을 하고 온 후에는 기분이 올라가는 게 있었다. 수영을 하고 돌아오니 조금 가라앉았다. 우울했다는 게 아니고 조금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물에 몸 담그고 따끈한 물로 또 씻는 것까지 과정이라 그런가.


달리기는 정말 나만 신경쓰면 됐다. 다리 아픈 거 참고, 숨쉬고, 땀나고, 또 다리 아픈 거 참고. 그런데 물은, 그 안에 서 있는 것 자체가 묵직하게 에너지를 요하는 느낌이었다. 안간힘을 쓴다는 게, 숨이 들이찰 때까지 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다고 해도 딱히 죽을 것 같은 느낌이 안 들었다. 맨 땅바닥이 아니고 물이라 그랬나. 그리고, 오히려 정말 더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바깥과 유리된 공간. 물, 엄청난 물. 똑같이 괴상한 차림의 사람들. 사실은 교류도 없으니 사람이라고 하기도 뭐한 다른 존재들. 이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정말 달라진 게 없는 모든 것. 음악을 들으면서 떠오르는 생각. 남들을 보며 떠오르는 생각. 오늘 하루의 일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붙들고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었다. 달리기를 하면서 그런 상태에 도달하려면 정말 힘껏 뛰어야 했다. 수영장에서는, 그게 가능했다. 적어도, 오늘은. 오늘은 1일차였으니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나은 건지 잘 모른다. 아예 모른다. 그냥 하나가 생각났다. 언젠가는 그 두 영법만으로 끝에서 끝까지 가보자고.





근데 목표를 꼭 정해야 하나? 그것도 잘 모르겠네.

하여간 좋았다. 좋았다고 표현해도 되나?

좋은 거야. 좋았다.


하늘? 애초에 불가능. 그렇다면?

육지와 물 모두에서 이동할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거야.


나자신 화이팅.




근데 지금 생각하니 이십 바퀴구나. 사십 아니고.

흠.

나도 그 나이에 그러고 싶다.

지능은 어쩔 수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