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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C

그 연약함의 수치화

by 이븐도





아빠는 주기적으로 내게 똑같은 말을 보낸다.

이번 주 춥댄다 옷 단단히 입어라, 공동구매 등의 사기에 조심해라, 제때 먹어라, 집에서도 불조심해라, 좀 춥다 옷 잘 입어, 변호사도 사칭한댄다, 카드배송도 사칭한다고 한다, 또.. 제때 먹고 꼭꼭 입어라.



이태원이 한창 뉴스에 언급될 때 나는 병동에서 할아버지들이 틀어놓은 뉴스를 들으며 정신을 반 놓은 채 실습 중이었고 그 주 내내 그럴 예정이었다. 아빠는 내게 사람 많이 모이는 외출은 자제해라,라고 했다. 서현역에서 사고가 났을 때는 또 가급적 외출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머리가 더 크면서는 엄마보다는 아빠와 더 자주 대립했다. 그런고로 카톡이 오는 게 귀찮을 때도 있었다.


잘 먹지 못 먹을 게 뭐 있어. 응, 잘 입을게. 나 그렇게 사람 모이는 곳 안 좋아해. 아, 어차피 나 3분 걷고 다 지하철 아니면 버스 타, 라고는 말 안 했다. (했나?)

때로 무책임할 정도로 입이, 마음이 말라서 그런 안부 인사를 부드럽게 받을 여유도 없었다, 고 쓰고 그냥 모난 성격에 어쩌라고 싶었다. 맨날 똑같은 말들인데. 날씨는 나도 알아. 네이버에 나온다고. 춥다고 출근 안 해? 사고 난다고 출근 안 하냐고. 세상 사람들 코로나 걸렸다고 일주일 쉴 때 이제 삼일도 눈치 보면서 쉰다고. 내가 뭘 더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데. 어? 어떡하라고, 더.




그리고 그 말들은 세뇌되듯 남았다. 제때 먹고 잘 자고 즐겁게 지내라. 특별한 단어도 사랑한다는 말 같은 건 더더욱 없는 이 맹숭맹숭한 조합. 아무튼 강령 비슷하게 남았다. 그 정도면 쓸모가 있긴 한 것 같긴 해, 아빠. 여하튼. 세끼까지는 아니더라도 두 끼는 잘 챙기고 푹 자고 단정히 입고 다니고 뭐 그런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새기게는 됐다.






괜찮아지는 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공연을 보러 가거나, 새로운 노래들을 들어 보거나,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거나, 달리기를 하거나, 그도 아니면.. 음. 별로 안 필요하지만 사고 싶었던 걸 산다든가. 그런데 그것들을 할 여력도 안 될 때가 있다. 나는 그럴 때 궁금하다. 나한테 뭐가 필요한 건지.


단지 물을 더 마셔야 하는 때인데 프로틴바나 간식을 더 먹을 때가 있고, 잠을 자야 하는데 달리기를 하러 나갈 때가 있고, 씻고 그냥 누워서 카톡에 답장을 하거나 하이라이트 영상이나 봐야 하는 때에 꾸역꾸역 사람 많은 카페로 나갈 때가 있다. 정말 나가서 달리든 싸돌아다니든 해야 할 때는 그냥 모든 걸 미뤄 두고 이불에서 기어나오질 못한다.






호중구. 감염을 막는 백혈구의 한 종류. ANC는 혈액 속 그 절대적 수치를 리키는 약어다.

이 수치가 500 미만으로 떨어지면 병원에서 병실을 혼자 쓸 수 있다. 혼자가 아니라면 똑같이 500 아래로 떨어진 환자들과 2인실을 쓰게 해 준다. 일반식이나 다른 치료식이 아닌 격리식을 발행할 수 있고 보험이 적용된다. 안 먹어봐서 어떤지 모르지만 어쨌든 최대한 무균적으로 조리된 음식들이 나온다. 1인실, 2인실에 해당하는 비용을 낼 필요가 없으며 이들은 병상 배정 시 우선순위가 된다. 신체의 전반적인 면역 상태를 드러내는 수치이기 때문이다.



물론 안 그럴 때도 있다. 세상 일이 다 그렇잖아? 수치의 정상범위는 1800 (단위는 마이크로미터,라고 한다. 나도 잘 모른다.) 이상 7000 미만이다. 언급한 500 아래로 떨어지면 진료과에서는 아, 이 사람이 일반 병실에 있다가는 더 상태가 나빠지겠어, 치료가 제대로 될 수가 없겠군, 하는 판단 하에 격리실 입실 처방을 낸다.


그러나 1인실이나 2인실이 아닌, 기침이 콜록콜록 나오는 옆자리 환자와 닿는 곳마다 감염을 우려해야 하는 각종 미생물 보균자와 함께 커튼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인실에 있어야 할 때도 그 처방은 난다. 병원 심보가 못돼서? 지금 2인실에 있는 사람이 더 부자고 명망이 높아서? 는 아니고. 병상이 모두 꽉 차 있을 때, 그래서 정말 어찌할 수 없을 때는 그냥 그 자리에서 커튼을 치고 있도록 한다. 그걸 내가 일하는 곳에서는 커튼 격리라고 부른다. 커튼 격리.




그리고 이곳의 모든 환자들은 ANC가 0이든 6500이든 모두모두 커튼을 침상 끝까지 둘러놓고 지낸다. 그러니까.. 사실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것이다. 면역력 수치가 너무 낮아 존재조차 드러나지 않든 오늘은 간신히 턱걸이에 걸친 530 정도였으나 내일은 17 정도로 곤두박질치든. 정말 그렇게, 어쩔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세상 돌아가는 건.






수술을 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들이 있다. 흉부 엑스레이, 심전도, 소변 검사, 피검사. 수혈을 하게 될 수 있으니 혈액형도 다시 확인하고, 간수치와 신장 수치도 각종 전해질 수치도 확인한다. 폐에, 심장에 특별한 문제가 없는지 보고 몸의 전반적인 기관들이 멀쩡히 돌아가고 있는지 보는 것이다. 당연히 저 위의 면역 수치도 확인한다. 다른 목적의 입원이더라도 위 검사들은 기본적으로 시행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더 꼼꼼히 봐야 한다. 어떤 항이 빠졌는지, 혹시 안 한 건 없는지. 수술이니까. 괜찮은지 봐야 하니까.


정말 몇 가지 경우를 빼면 수술을 위해서는 그게 몇 시든 자정부터 금식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못 먹는다. 항경련제와 혈압약처럼 시간 간격을 지켜 반드시 먹야 하는 약을 환자가 복용하고 있을 경우 진료과에서는 다른 약제를 처방한다. 먹을 수는 없으나 필수적이기에 같은 성분의 주사제로 바꾸는 등의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금식? 당뇨 환자들에게 치명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한두 시간 단위로 혈당을 측정하고 그 결과의 범위에 따라 매번 수액에 적합한 용량의 인슐린을 섞어 주입받는다.




만약 선행한 검사들에서 어떤 수치나 파형 등이 정상치에서 벗어나거나 다른 경우 의사는 해당 과로 협진을 낸다. 수술을 앞두고 있는데 당신 과에서 관할하는 이만저만한 게 좀 별로다, 이상하다, 수술해도 괜찮겠느냐. 그러면 거기서는 회신을 준다. 수술에는 문제가 없겠으나 퇴원 후에 이쪽으로 외래를 잡아 달라든지, 수술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 당장 이것부터 해결해야 한다든지, 이 약을 며칠간 써보고 수술 스케줄은 미루라든지, 아무 문제없으니 그냥 너네 하려던 대로 하라든지. 병원 측에서는 이렇게 수술 준비를 한다.

괜찮은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안 괜찮아질 여건이 있다면 최대한 괜찮게 먼저 만든다.


수술이 아니더라도, 포타슘이 부족하면 케이콘틴이 처방 나거나 수액에 kcl을 섞으라는 오더가 난다. 간 수치가 올라가면 우루사를 먹는다. 헤모글로빈 수치가 낮으면 빨간 피를 맞는다. 응고수치가 엉망이면 항혈전제 또는 비타민K 처방이 난다. PCO2 수치가 너무 낮거나 높으면 인공호흡기를 다는 것도 고려한다.




GFR, Nacl, Na, Alb, T.Bill, PT.. 내 몸에 있는지도 몰랐고 운이 좋다면 평생 모르고 살 수도 있는 것들은 진작 잔뜩 세분화되어 있다. 병원에서는 이들 하나하나를 파편으로 쪼개어 대응한다. 나아지라고, 괜찮아지라고. 괜찮아져서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라고. 적어도 신체에 대한 것들은 그렇다. 이렇게나 자세하고 정성스럽다.

그런데도 안 될 때가 있다. 나아지려고 온 병원인데 되려 병원균에 잔뜩 노출될 때가 있다. 위에 써 놓았듯 내 면역력 수치가 '빵'이라면. 보호받아야 할 게 마땅하지만 역시나 세상일이 그렇듯 여건이 안 된다면.






사람은 아프면 병원에 간다. 이 말은 반만 맞다. 적어도 지금의 기조에서는 그렇다. 몸이 아플 때 병원에 간다. 출근은 이르고 퇴근은 늦고 어떻게 수소문해 찾아간 병원에는 나 같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 도무지 접수조차 할 수 없다면 사람들은 약국으로 간다. 열이 나면 해열진통제를 사고, 감기증상이 좀 세면 테라플루를 사고, 뭐 거기에.. 아픈데 병원도 못 가네 이런 씨 개같은 인생, 싶으면 괜히 술이나 디저트를 사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똑같이 산다. 나름의 자구책들이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면.


하지만 마음이 아프면, 짜증나도록 귀여운 표현이지만 마음이 아프면.. 사람들은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뭐가 문제인지를 몰라 해결 방법도 모른다. 약국에 가서 살 약도 아 해보세요 하면서 나를 봐줄 의사도 없다. 어디가 문제인지를 몰라 찾아갈 곳이, 찾을 대상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로 술을 마시거나 바쁜 친구에게 괜히 전화를 건다. 바보들이다.

정신이 나가면 몸도 꺼지는데? 퓨즈가 녹아 몸만 산 사람들이 있을 곳은 이 지하철역과 술집이 아니라 중환자실인데.




혹은, 인터넷 등등으로 자가 검사를 한다. 나 우울증인가, 나 공황인가. 안타깝게도? 아니면 다행히도 거기 나열된 조건들에 내가 몇 개쯤 못 미친다면 나는 아픈 게 아니기에, 정신과에 찾아갈 정도는 아니기에 그냥 그대로 산다. 그 마음과 상태를 스스로도 못 보게 덮어 놓은 채로. 주변인들에게 말하기도 스스로 되새기기도 좀 남사스럽다. 난 그냥 좀 청승맞은 거일 수도 있으니까. 아무것도 아니래잖아, 여기서. 그리고 그 마음은 몸 주변으로 질질 새거나 폭발해 버리기도 한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잖아. 가끔은 그냥 피와 살과 뼈 덩어리지만 때로는 그게 아니잖아. 한참 상태가 잘못된 정신은 몸으로 신호를 보내거나 자멸해 버리자고 택한다. 몸과 정신은 각자 최종적으로 자생하기 위해 사인을 보냈으나, 결국 어느 쪽도 괜찮아지지 않고 있을 경우 점점 시들어 간다.






우리는 병원에 가야 할 때만 아프다고 하지 않는다. 약국에서 약을 사 먹어야 할 때도 아프다고 한다. 신체에 이상이 생기면 그렇게 대응한다.

그런데 마음이, 이 발음조차 귀엽고 뭉개져 하찮게 들리는 나의 반쪽에 균열이 오고 흔들리면 그걸 방치한다. 스스로도 그 부분의 어디가 어떻게 이상한지 딱 짚어내질 못한다. 병은 나쁜 것이지만 내가 불러낸 것도 혼자 쫓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가만히 놔두거나 온갖 봉창을 두드린다.




나는 가끔 그래서, 그렇게나 아파 버리기 전에 면역력을 올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손상, 산증, 울혈, 종양, 괴사, 병변 같은 이상하게 폼나서 더 심각해 보이는 (물론 심각한 게 맞다) 단어들이 아닐지라도 그 아픈, 비정상이 되어 버린 부분들을 찾아 낱낱이 쪼개 고쳐 내고 싶었다.


고치는 거 좋아. 그런데 어떻게 할 건데? 수치의 정상범위는 인터넷이나 전공책이나 병원 전산에 잔뜩이지만.. 내 수치는 노멀 레인지는 커녕 어떤 항목이 있는지도 몰랐다. 모른다. 그래서 알아내야 한다. 쩌겠어. 자급자족해야지.






때로는 누군가를 찾고 또 때로는 스스로, 머리에 박히게 들은 것처럼 영양제도 밥도 먹고 잠도 자면서. 통증만큼이나 또 다른 나를 이루는 이 부분에 관심을 가져 줘야 한다.

아직은 그만큼은 없잖아? 처방전 없이도 낫게 해 주는 약국도, 수액을 놔주는 한의원도 없잖아. 준비해야 하는 시험 때문에, 벌어야 하는 돈 때문에, 늦은 퇴근시간 때문에, 미친 대기열에 질려서 정신과에 걸어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잖아.


세상은 쉽지 않으니까. 아프면 나만 손해니까. 세상이 나빠서가 아니라 원래 그러니까. 하지만 슬프게도, 다행히도 나만 아픈 게 아니잖아. 나만 아팠다면 병원도 없었을 거고 치료법도 없었겠지. 그러나 나만 아픈 게 아니었기에 누군가는 치료법을 찾아 놓았고 방책을 지어 놓았다. 세상은 차갑지만 사람들은 다 같이 약해서 때로 도움을 요청할 만하다.




신체에 관해서는 많고 많은 사람들이 데이터를 잔뜩 쌓아 줬으니, 나의 정신에 대해서도 면밀히 살펴야 한다. 괜찮은지 들여다보아야 한다. 부서지지 않도록? 아니. 이런 감상적인 단어 말고. 음. 부전이 오지 않도록. 정말 말 그대로.. 이 소프트웨어에, 마음에 부전이 오지 않도록.

사는 과정에는 이것 역시 포함이다. 스스로의 수치들을 들여다보고 교정할 방법을 찾아 나가는 것. 그리고 혼자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


왜?우글우글한 병실에 연약한 상태로 언제든 방치될 수도 있잖아. 메르스가 돌고 코로나가 돌고 마이코플라스마와 인플루엔자가 돌면 정말 언제든 그러지 않으리란 법 없잖아.






사람이 많아 오는 역풍이 있다면, 가산점도 응당 누려야 하지 않겠어? 정체를 알아내 보강하되, 혼자 해보기 어려울 땐 이 세상에 사람이 득시글하기에 내가 뽑아먹을 이점이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물어보고, 같이 놀아 달라고 하고, 헛소리도 좀 하고, 배가 아플 만큼 웃기도 하고. 그리고.. 그 이점이, 도무지 실효성 없어 보이는 성분들이, 내게 도움이 될 거라는 것도 인지해야 한다. 그런 희망을 놔서는 안 .




그래야 이것저것 찾아 먹고 자생하지. 결국은 혼자 일어서 걷고 뛰어야 하니까. 햇빛 좋을 땐 자전거라도 타고 어디 피크닉이라도 갈 수 있게. 즐거운 일을 질투 없이 함께 잔뜩 축하해 줄 수 있게. 무슨 역병이 돌아도 며칠만 앓을 수 있게.


안 그런가? 그렇게 수치들을 올리고 보존해야 한다.

밥 꼭꼭 먹고 가능한 즐겁게.



그러니까 모두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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