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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의 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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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븐도





"묶은 게 더 낫네.

"네?"

"묶은 기 더 낫다꼬."

"아, 네.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오늘 다시 자르러 가려 했는데. 애매하게 집히는 길이라서 여기저기로 다 튀어나와 있는데, 내 머리.

어쨌든 칭찬 아닌가. 이게 더 낫다잖아.

지금은 더 나아 보인다잖아.






나는 어떤 칭찬들을 오래오래 기억한다. 예를 들면 반년 전쯤 입원했던 여덟 살쯤 된 애가 '어떻게 그렇게 이뻐요?'라고 한 말 같은 거. 더 뭐가 있지, 이런 게? 더 쓰고 싶은데 떠오르지를 않네. 짜증나. 어이, J. 좀 나와 볼래? 넌 이런 거 꺼내 쓰면 삼십 개는 나오겠다.


나에게 그 흔치 않은 작업 멘트를 날렸던 친구는 장시간 경련을 하다가 그 아침에야 좀 정신이 돌아왔었다. 그때의 말투도 특이했다. 그래서 사실의 그 칭찬은 의미가 없다. 진짜 예쁜 사람한테 애들은 그림을 그려 준다. 말하자면 뮤즈인 것이다. 나는 몰랐다. 동기 J가 '엘사 선생님'이라고 삐뚤하게 쓰여 있는 본인을 닮은 뭔가를 그린 그림을 받아왔을 때 알았다. 아. 애나 어른이나 아름다운 것을 보면 영감이 샘솟는 건 당연한 거구나. 이쁘다는 말을 인사처럼 들었을 것 같은 그 애한테도 어쨌든 칭찬은 달콤한 걸까. 아이씨, 부럽다.




처음으로 '칭찬 카드'를 받아온 내게 엄마가 한 말은 '니가 아니라도 줬을 사람이다'라고 했다. 아니, 엄마. 나한테 줬다고, 나한테. 그게 무슨 소리야, 아. 칭찬 좀 해 줘라. 나한테 써 줬다니까? 그러나 엄마는 굴하지 않았다. 그래, 니한테 썼지. 근데 니가 아니고 딴 애였어도 그거 써 줬을 사람이야, 그 사람은. 나는 엎드려 절 받기를 포기했다. 내가 뭘 바라냐. 엄마는 덧붙였다. 왜, 가시나야. 틀린 말 같아? 니가 잘못해도 그럼 다 니 탓인 게 되는 거야. 그게 꼭 니가 잘해서 너한테 써준 게 아니라니까? 엄마 말 틀려?


짜증이 난 나는 골똘히 생각해 보려다가 말았다. 병원도 안 해주는 칭찬을 나한테 해 준다고. 봐, 낳은 엄마도 안 해주는 칭찬을 받았다고. 그 파란 카드, 내 이름 병동 번호가 쓰인 그 종이쪽. 나는 출근해서 그 카드를 한 번씩 들여다봤다. 엄마의 말은 논리적으로 틀린 구석이 없었지만 아무튼 나는 기분이 좋았으니까.






병원 인트라넷에는 매달 부서별로 집계된 칭찬 카드의 수를 나열한 순위가 올라온다. 사실 그 의도부터 내용까지 상당히 열받는 게시물이긴 한데 이것에 의문이나 제의를 제기하면 그냥 꼴등의 반항 정도밖에 안 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것도 무슨 엑셀 같은 딱딱한 표로 된 게 아니고.. 알록달록 무해하고 사랑스러운 그래픽을 쓴 포스터 같은 것으로 올라오기 때문에, 까딱하다간 '왜, 니네 부서는 안 친절해서 꼽니?' 라는 반응이나 돌아올 것이다.

찌질해 보이기 딱 좋다. 발언권을 영영 부여받지 못하는 것이다. 뭐가 꼴등이고 찌질하냐고?



우리 병동, 나의 병동. 항상 최하위다. 꼴찌인 게 정체성이 되어 버린 야구팀 같은 존재랄까. 물론 스포츠에서는 한 번쯤 해당 팀이 꼴찌를 탈출해 가을 야구에 진출하는 등의 기적 같은 해도 있지만 여기서는 없다. 진짜 만년 꼴찌다. 작년에도 올해도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꼴찌일 것이다.






나는 이 병동에서 삼 년간 일하며 열 장이 조금 넘는 카드를 받았다. 언제부턴가는 세지 않아서 그다지 정확하지 않다.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다. 삼 년간 그 정도의 '칭찬'을 보호자 또는 일고여덟 살짜리 애들한테 받은 대신, 작년 한 달간 성인 병동으로 파견 근무를 갔을 때는 여덟 장의 카드를 받았다는 것이다. 나만 놀랍나?



우리는 항상 친절했다. 자랑 아닌 자랑인데, 나는 작년에 그 부서에서 일할 때 종이에 펜으로 쓰면 되는 칭찬이 아니고 인터넷에 올려야만 하는 감사글의 주인공이 된 적 있다. 멋진 일이다. 아마 퇴사할 때까지 다시는 없지 않을까.


아무튼 이 일화를 굳이 끌고 온 이유는.. 내가 그때 그 어떤 특별한 짓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던 대로 했다. 어디서? 여기서, 소아과에서. 아프거나 불편한 걸 방치하면 난리 난리가 나는 이 유사 외계인들을 대하는 방식으로 했다. 조금이라도 아프면 안 아프게 나름의 조치를 취했고, 불편하다고 하면 안 불편하게 있을 수 있게 최선을 다했다. 내 담당 환자의 보호자가 간호사실이나 복도를 서성거리면 어떤 게 필요하시냐고 먼저 말을 걸었다. 우리는 늘 그렇게 했다.





애들은 주사가 아프면 운다. 우는 걸 방치하면 나중에는 피부에 왕물집이 잡혀 있거나 운이 나쁠 경우 괴사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조용히 처지는 걸 방치하면 중환자실에 가는 엔딩이 올 수도 있었다. 그런 무서운 일들을 심심찮게 봤다. 울거나 불편해하는 것을 넘기면 어떻게 되는지의 안 좋은 사례를 자꾸 알게 됐다.

애들이 아픈 보호자들은 말도 걱정도 요청사항도 많았다. 그런 보호자를 다른 사람이 상대한 후에 나에게 돌아올 짜증을 예측하지 못할 경우 내 기분은 얼마나 어떻게 더 나빠질지를 대충 알았다. 그렇게 일했다. 그랬더니 어른들은 너무 좋아했다. 정말 사소한 것에도, 고맙다고 했고 감사하다고 했다. 내가 다 민망할 정도로.






엄마의 말이 맞았다. 사실 나에게 카드를 써 준 그 사람은 열일곱 살짜리였던 덩치 큰 남자애의 보호자였다. 정형외과 병동에 자리가 없어 거기 입원한 거였다. 여기 선생님들은 너무 친절하다고 했다. 그때 몇 층 병동에서는 어땠는데 여기는 다들 너무 좋으세요, 했다. 애가 컸고, 좀 아플 수도 있는 거고, 어쨌든 수술이 잘 끝났으니 기분이 좋은 보호자는 내게 칭찬을 적선했다. 맞다. 나는 엄마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그 이후로 카드를 받을 때마다 생각했다. 정말 내가 아니라도 줬을 사람일까 의심했다. 뭘? 내 행동의 진정성? 그 사람이 내게 던진 찰나 애정의 진정성? 둘 다. 그리고 대개는 전자도 후자도 '응 아니야'였다. 응, 니가 잘해서 준 거 아니야. 그냥 기분이 좋았던 거야. 진짜? 응, 진짜.

아니라고 할 수 있어? 맞아. 사실 다 그랬다. 내가 잘해서 받은 게 아니었고 그들은 내가 아니어도 줬을 사람이었다. 엄마는 짜증나게 맞는 말만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녀는 Q였고 R이었다. 주의해야 할 환자라는 뜻이다. 주의해야 할 사항이 많았다. 말이 많았고 요구사항도 많았다. 불편한 것도 기억하는 것도 많았다. 하나를 하러 가면 다섯 개쯤의 잔소리를 듣는 기분이었다. 며칠 전에 투약을 하러 갔을 때는 이건 왜 이렇게 안 하냐, 어제까지 간호사 슨생님들은 요렇게 하든데 왜 그렇게 안 하시냐, 이거는 지금 들어가는 게 맞느냐 등등의 말을 쏟아냈다.

다 맞는 말이었다. 할 수 있는 질문이었고 그녀의 관심과 예민함은 충분히 그럴 만한 거였다. 상당히 중환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름의 항변들을 하면서 최대한으로 친절하려 했다. 친절? 이건 너무 갔고, 그냥 그 행위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 악명에 비해 너무 일찍 예민함을 누그러뜨렸다. 나이 때문인지, 본인의 몸이라 그런 건지.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딸뻘이었고, 이 병실 바깥 수많은 소아 환자들의 부모들과 달리 그녀는 본인 몸이 아픈 것만 감내하면 되는 입장이었다.




내가 다 엉킨 수액줄과 자리를 정리하자 그녀는 내가 나이가 들어서 불편한 게 많다고, 고생하십니다,라고 했다. 나이도 새파랗게 더 어린 나한테. 그 고생하십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사실 나에게 전하는 인사라기보다는 그냥 그녀 본인의 인생이나 인간성에 대한 예의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오랜 시간 사회화된 결과물.


엄마가 말한 것처럼 그건 내가 잘해서가 아니었다. 통증이 그 순간에는 좀 덜했을 수도 있고, 말이 많았던 당신의 모습에 스스로가 멋쩍었을 수도 있고. 아무튼 그 기전이 어떻든 그 인사들에 내가 다 황송해졌다. 아닙니다. 정말 인사치레였을 수도 있던 그 말이 그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굳이 아픈 몸으로 사지 멀쩡한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그녀가 안쓰러울 만큼 감사했다.






그런 그녀가 오늘은 머리를 칭찬했다. 머리 칭찬이 아닌가? 아무튼 내 외양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기분이 좋았다. 퇴근해서도 생각이 났다. 참, 나. 이게 뭐라고. 예약해 놓은 미용실에 앉아서도 그 생각이 났다. 알 수 없는 기전이다. 진짠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칭찬들이 이곳에서는 진하게 남는다. 이곳에서는? 여기 말고 내가 주기적으로 가는 데가 또 있나? 없어서 그렇구나. 원래 칭찬은 좋은 건데 너무.. 폐렴 시즌에 칼퇴하듯 들어서 그런가 봐.


엄마의 말은 오늘도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컨디션이 올라서 원래 하려던 항암을 했기 때문이다. 입원 당시의 계획대로라면 2주 전에 진작 했어야 했다. 정말로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그런 칭찬 비슷한 것을 들었을 날이었던 것이다.






비록 모두가 불친절해서 만년 꼴찌인 병동의 일원이지만, 칭찬은 좋다. 아닌 척하지만 칭찬 카드도 좋고 감사하다는 인사도 고생하셨다는 말도 좋다. 나는 사실 감사하거나 고생할 일을 한 게 아니고 그냥 돈 받고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지만 어쨌든 좋다. 달달한 게 좋은 것처럼 좋다. 달다면, 그게 초콜릿이든 설탕이든 대체당이든 어쨌든 반가운 것처럼.




그런 말을 듣기 위해 일하는 게 아니고, 본인이 대신 아프고 싶을 자식들을 여기 입원시켜 놓은 이곳의 보호자들은 그럴 수밖에 없기에, 칭찬에 목말라하고 그걸 달가워하면 안 되지만.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의사든 간호사든 이송 요원이든 배식차 여사님이든 그런 말을 들었을 테지만..


좋은 걸 어떡해. 좋은 건 좋은 거다.

조각이 하나도 안 들어맞는 퍼즐이면 좀 어떤가. 모아놨을 때 이쁘면 된 거 아니야? 고 흐뭇하면 되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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