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혀 버린 자의 고백
대체 5일 근무를 어떻게들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왜 이번 달은 다섯 개 연달아 일하는 날이 이렇게 많을까. 힘들면 안 되는 날인데, 낮잠 따위로 날릴 수 없는 날인데 졸렸다. 밥을 먹는데 머리를 말릴 때처럼 고개가 꺾였다. 이상한 일이다. 출근하는 날은 이 정도로 졸리지 않다.
이렇게는 제대로 일할 수 없어서 오히려 달리기를 하고, 스트레칭을 하고, 설거지를 다 해 놓고 밖을 나선다. 그러니까 사실은 의지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야속한 일 아닌가. 노는 날만 되면 이렇게 지친다니.
아빠는 대체로 다정하고 세심했지만 그 근본은 꼰대였다.
고등학생 때인가 중학생 때인가, 아직은 신문을 다들 구독할 때, 아빠는 조선일보를 펴 놓고 앵커가 떠드는 청년실업이니 캥거루족이니 하는 내용을 들으며 그랬다. 다 백만 원짜리 휴대폰 쓰면서 험한 일은 안 하려고 하니까 그러지, 젊은 애들이. 가구단지 가 봐, 다 동남아 애들이야. 힘든 일은 하기 싫고 누구 탓은 해야겠고. 그 말을 들은 엄마는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 쪽팔려, 했다. 아빠는, 내 말 틀리냐, 하는 표정을 짓고는 알았어. 했다.
아빠는 없는 집에서 태어나 사관학교를 나와 군인이 되어 30년 넘게 일했다. 그런 이야기쯤 없는 집이 어딨겠냐만은, 엄마는 전방으로, 촌구석으로, 장교나 부사관의 드센 부인들이 그득한 아파트들에서 나와 동생을 대부분 혼자 돌봤다. 크고 나서 대충 느꼈다. 이 집 정서의 기저는, '알아서 잘'이었다는 것. 거대한 모순들이 있었지만 주를 이루는 것은 그랬다.
크면서는 엄마와 대립했고 커서는 아빠와 부딪혔다. 아빠는 내게 큰소리를 낸 적 없었다. 엄마에게 인정받지 못해 구겨놓은 성적표를 방에 던져 놓으면 아빠는 그것을 도로 펴서 잘했다고 귀퉁이에 뭔가를 써 놓았다. 책을 사면 항상 앞장에 짧은 편지 같은 것을 남겼다. 엄마에서 비롯된 상처와 응어리를 아빠가 봐주었다. 그리고 내가 간호사를 그만두겠다고 하자 아빠는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
나는 잔뜩 비틀며 말했다. 아, 이제 거짓말은 못 하겠다는 거지. 왜 지금까지 아닌 척했어? 내가 힘들다고 징징댈 땐 안 이랬잖아. 때려치운다니까 갑자기 부끄러워? 아하. 딴 애들 취직 못하고 있을 때 그래도 혼자 돈 벌고 어떻게든 사니까 그게 그렇게 대단했구나. 쪽팔려? 딸래미 대학병원 다니면서 혼자 밥벌이한다고 남들한테 말해 놨더니 못 하겠다니까 한심해서 창피해? 그럼 칭찬 좀 해 주지 그랬어, 남들 다 그런다고 열받게 말하지 말고.
무슨 말이 그러냐고, 그게 어디서 배운 말버릇이냐고 그랬다. 글쎄. 이제 와서? 난 항상 그랬는데. 배신감이 컸다. 엄마는 늘 내게 당신이 만만하냐고 했다.
나는 옆에 있던 엄마에게 봤지, 보이지. 엄마가 만만해서 그랬던 게 아니라고. 아빠가 지금 이러잖아. 그 잘난 간호사 관둔다니까 그것도 못 버티냐고 나한테 그러잖아. 그럼 내 말이 틀려? 그거 아니면 난 아무것도 아니다 이거네. 아빠가 소리를 질렀다. 그럼 니가 뭘 할 수 있는데, 넌 뭐 그리 잘났는데? 너 이거 말고 뭐 할 거 있냐?
맞긴 했다. 근데 아빠, 아빠가 그렇게 살아야 했다고 해서 남들한테까지 그렇게 살라고 하지 마. 그럼 남들은 뭐 달라? 걔들은 뭐 잘나서 그렇게 하고 싶은 일 찾아? 난 왜 안 되는데? 왜 이렇게 하기 싫고 힘든 거 참아서 질질 짜면서 해야 하는데? 이게 뭔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데? 아마 아빠는 그쯤에서 내 이름 세 글자를 소리쳐 불렀던 것 같다.
나는 무슨 말이든 더 비꼬며 터뜨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엄마가 아빠를 말리는 건 평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내게 거짓이었던 적 없었던 것 같은 사람이 내게 그런 반응을 보였다. 누가 아빠 그렇게 쳐다보래? 어? 어떻게 쳐다보든 무슨 상관인데, 내 말 틀려? 틀리냐고.
너, 나가. 니 마음대로 해. 나가서, 니 알아서 살아. 등록금까지는 다 대 줬으니까 니 알아서 해.
나는 나가라는 말이 아무 의미 없는 분노의 표현인 걸 알고 있었다. 덩치 산만한 남동생도 아니고 몸무게가 그의 반이나 겨우 나갈 나를 그렇게 쫓아낼 수는 없었다. 내가 왜? 뭘 잘못했는데? 내가 뭘 잘못했냐고, 묻잖아. 어? 아마 그리고 엄마에게 얼굴을 한 대 맞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 아빠가 때리는 걸 막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웃픈 기억이다. 나는 집을 나가지 않았고 엄마를 째려보며 질질 짠 후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 출근했을 것이다.
결혼을 하게 된다면 식장에서 오아시스의 Live Forever를 틀고 싶었다. 그게 무슨 로맨틱한 사랑의 의식이 아니고 그냥 살면서 혼인관계가 되려면 해야 하는 과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 생각은 흐려졌지만. 밥값, 주차장, 내 전 타임의 결혼식, 나 다음 타임의 결혼식, 단체샷 하나를 위해 볼이 얼얼할 정도로 웃어야 하는 시간, 키나 입은 옷의 색깔로 이리저리로 서 있는 자리를 바꾸고 바꿔야 간신히 잡히는 배치와 구도, 소리가 다 찢어지는 후진 음향기기로 나오는 달달한 대중가요, 사실은 아무 관심이 없는 하객들, 와중에도 시간 다 됐으니 빨리 진행하겠다는 날 선 목소리의 지시.
그 행사에는 의미를 넣으려 할수록 촌스럽고 귀찮아지는 구석이 속속들이 있었다. 물론 내가 엄청난 부자라면, 또는 결혼할 상대가 그렇다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냥 난 사실 이거 틀고 싶었어, 왜인 줄 알아? 하고 둘이 있을 때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안 그럴 것 같으면서도 보호자들 응대를 잘 했다. 검사실 사람들이나 의사들에게는 언성을 높인 적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그런 적 없었다. 물론 어느 쪽과의 갈등이나 큰소리도 만들지 않는 게 가장 훌륭하고 멋진 직업인의 자세였다. 나는 시시때때로 올라오는 분노를 감추지 못한 적이 있었고, 그러지 않는 이들을 정말로, 정말로 존경했다.
그리고 안 그럴 것 같으면서도 가장 많이 울었다. 일은 내게 쉽지 않았다. 단계가 있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눈치를 보는 게 힘들었고, 그 이후에는 일이 힘들었고, 또 그 이후에는 가까워진 만큼 무례하고 짜치는 사람들이 힘들었고, 또 일이 힘들었으며 그 단계를 지나자 남의 죽음이 두려워졌다. 외국에 가서도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 시간에서 비롯된 고뇌와 잡념이 대표적이었다. 몇 개의 근무를 끝내고, 오프가 되어서 일어나면 세상이 다 가라앉은 기분이 들었다. 평화였다. 그 평화 속에는 어제 일들의 잔상이 얹히려 했다.
그러게, 그저 일일 뿐인데. 나는 병원을 나왔고 오늘은 노는 날인데 왜 그런 것을 추모하거나 더 안타까워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정말로 그게 그렇게 가여우면 지금이라도 가서 일해, 생각했다. 가서 도와줘, 일하겠다고 해. 유니폼 입고 컴퓨터 앞에 앉아.
당연히 그건 싫었다. 그럼 나가, 나가서 놀아. 나는 그런 기전으로 밖을 나가고 친구를 만났다.
왜 그렇게 빚진 듯한 기분이 드는지는 지금도 잘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런 기분이 드는 사람이구나. 그렇구나. 다른 이들도 그렇기야 하겠지만 그걸 주제로 토론을 한다거나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고 재미있게 떠들기 좋은 토픽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일에 공감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마음에 묻어 두었고 잊으려 했다.
쉽지 않았다. 쉬웠다면 나는 글쓰기도 달리기도 이만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남의 아픔이 힘들었다. 병원은 내게 그것을 던져놓고는 갈무리할 방법은 알려주지 않았다. 뭐, 다달이 월급을 받았으니 그걸로 됐으나 나는 그 물들어가는 마음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자각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해결책은 간단할지도 몰랐다. 안 하면 될 일이었다. 세상에 일이 이것밖에 없지 않잖아. 그렇게나 매일매일 어딘가로 뛰고, 잊고, 글로 써서 저장한 후 잊어야 할 정도로 내게 고달프다면 그만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만두지 않는가. 아이돌 콘서트며 내한공연을 수도권에서 쫓아다니는 게 좋아서? 집에서 나와서 살고 싶어서? 경력이 필요해서?
셋 다 틀리지는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비약이 있었다. 콘서트는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었다. 큰 공연들은 주최사에서 셔틀을 대절하는 경우가 많았고, 뭐로든 먹고산다면 교통비를 부담해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올라오면 될 일이었다.
본가를 나와 사는 거? 다른 동네로 옮겨가거나 월세가 더 낮은 곳을 계약해 다른 일자리를 찾으면 됐다. 대형 병원이 아니더라도 내가 갈 자리는 많았다. 강남의 어느 한방이나 재활병원들은 여기처럼 근무가 빡세지는 않은데 급여는 비슷하다고들 했다. 경력? 간호사 면허가 효력을 발할 수 있는 건 통상 3년의 경력이라고들 했으나 어떻게든 애쓴다면 2년으로도 아주 부족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왜 그만두지 않는가. 이쯤 되면 쌍방이잖아.
그리고 나는 내리기 싫은 결론과 마주했다. 나는 이곳에서의 진실을 사랑했다는 것.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나 지금까지는 그랬고 당장도 조금은 그랬다는 것.
세상의 많은 게 포장이고 부풀림이고 허세 깃든 작위적인 피상이던 와중에, 병원에서의 사람들은 항상 허름했고, 쌩얼이었고, 피곤해했고, 아파했고, 울었고, 초췌했고,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피부와 머리는 가끔 기름져 있었다. 이곳을 떠다니는 감정이나 표현에는 거짓이 없었다. 짜증도, 무례함도, 이기심도 다 진짜였다. 몸은 어디 절여진 것처럼 힘들었지만 이 모든 에너지의 방향이 단 한 치의 거짓으로도 흐르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없는 능력, 어딘가 운용하며 살아야 한다면 그러기를 바랐다.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어딨어. 정말로, 안 힘든 일은 없었다. 그 고단함이 간단한 진실을 향해 흐르길 바랐던 것 같다. 이렇게나 힘든데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 그것도 좀 그렇잖아. 나는 그걸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글쎄, 이렇게나 허튼 오만함에 젖을 거였으면 그냥 공부를 더더더 열심히 해서 의사가 되었어야 했는데. 이런.
알고 있다. 못 했을 것이다. 나는 머리가 나빴고 어떻게 천운으로 의대에 입학했다고 하더라도 그 학업량을 따라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 능력치는 이 정도가 최대였다. 그런 주제에 성질은 더러웠고 다행히도 눈치는 조금 빨랐다.
내가 진로를 정해야 했을 때쯤 나는 내가 집에서 취직하지 못한 인간으로 남아 있으면 처참한 시간을 보내야 함을 알았다. 그렇게 간호사가 되어 일했다.
브런치 전에도 글을 쓰긴 했지만 시작과 끝이 없어 다시 열어보지 않을 낙서나 다름없었다. 어쨌거나 쓰긴 썼다. 어떤 장면들을 지나치지 못해 이곳에 토하고 정렬했다. 나는 근무를 하고 오프를 살았다. 작년 9월부터는 하나를 더 추가했다. 달리기. 기운이 안 나면 달렸고 잊고 싶으면 썼다. 변하는 건 없었지만 아무튼 그만둘 수는 없었다. 내내 생각했다. 체력이 따라주지 않을 때, 나에게는 이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한데 몸이 따라주지 못할 때, 왜 나는 이 일을 놓지 않고 사는지를 추적했다. 이렇게나 힘이 든다면 안 하면 되는 건데, 그렇잖아.
끔찍히도 성질이 더럽고 좀 머리가 나쁜 탓이었다. 복잡한 게 싫었고 계산은 더 싫었다. 병실의 사람들은 화가 나면 화를 냈고 아프면 아프다고 했다. 슬프면 슬퍼서 울었다. 그리고 그들을 보고 선 나 역시 그럴 수 있었다. 내가 이상해서, 성격이 어때서, 예민해서, 뭐가 어때서라고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나는 아프다 한 것을 해결해 주면 됐고 우는 것에 똑같이 조금 아파하면 됐다. 이곳에서의 감정과 나의 고단함과 피로에는 정당화가 필요 없다는 점이 나를 편안하게 했다.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그랬다. 나를 너무 힘들게 한 만큼 그 사실이 나를 안심시켰다. 이 모든 것이 진짜라는 사실. 알아 버린 것이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만두지 않고 자해의 순환이나 다름없는 일을 지속하고 있는지.
힘들었다. 힘든 만큼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스톡홀름 신드롬 같은 건가. 너무 오래 곁에 있던 탓에 익숙해진 것을 사랑이라 착각하는 그런 거.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당장은 그렇다. 내게는 자유가 필요했다. 필요한 인간으로, 어떤 의미 부여 없이 간단히 필요한 뭔가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모든 감정과 잡념의 등락이 당연한 것이라는 사실이 받쳐놓은 그 공간에서의 간단한 자유.
할 줄 아는 게 없는 나는 그 사이에서 숨을 쉬었다. 노동의 대가인 월급은 말할 것도 없고, 나를 과하게 정의할 필요가 없는 병원의 생리와 사람들의 기전이 나를 그렇게 고단하게 한 만큼 자유롭게 했다. 뭣 같지만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식 때 그 노래를 틀고 싶었던 이유와 동일했다. 어차피 개같은 세상, 너도 알잖아. 그럼에도 너랑 함께하겠다는 그 다짐.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것도, 알고도 못 본 척하며 달콤하게 속삭이는 것도 아니었다. 이 모든 지저분하고 괴로운 것들을 알지만 그래도 당신과 견디겠다는 그 무례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권유이자 선언. 그러니까 우리는 이 답 없고 아픈 세상에서 영원히 구를 거라는 멍청하게 밝은 가사.
그리고 나는 시간이 지나 그 노래를 내 결혼식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넘기기로 했다. 내 맘이다. 좀 창피하지만 뭐 어때. 어차피 세계의 몇십만, 몇백만 명이 이미 그러고 있을 텐데. 집에서 부모님과 공존할 수 없는 나에게 노동은 필수였고 꼴에 간단한 것만을 추구하고 아닌 것을 미치게 빨리 감지해 내는 내게 맞는 일이 뭐 얼마나 될까 생각한다.
나에게는 슬프게도, 기쁘게도 나뿐이다. 누구와 어떻게 살게 된다고 해도 알 수 없을 그 미래보다 이곳에서의 내 시간이 더 숭고했다. 내가 그만큼 힘들었다. 그랬는데도 그만두지 않았다. 사랑하기 때문에 놓을 수 없었다. 정말 미친 것 같지만 어느 정도는 그랬다. 무엇을 하든 이유가 명확했고, 정신을 다 볶아낼 것처럼 속 시끄러웠고 사람을 돌게, 소진되게 만들었지만 안 그런 일이 어딨겠는가. 다만, 그 환경의 그 혼란은 다 아픈 사람들로부터 왔다. 나를 비롯한 모든 인간의 미래이자 과거이자 현재. 그 안에서의 아우성과 눈물과 웃음과 미소와 분노. 그 다채로운 모든 양상들은 그들이 살아 있기에 내는 것이었고 그 이상의 이유는 없었다.
아직은 잘 살아 있어서 뭔가를 원하고 불평하고 고맙다고 했으며 울었고 잔뜩 성질을 냈다. 아픈 인간들을 모아놓은 동물원이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그리고 나 역시 언젠가는 누워 있게 될 여기서 모두는 그저 한 명의 인간일 수 있었다.
아픈 이들은 혼자서 아팠고 어떤 사람이 어떻게 곁에 있든 그 고통은 홀로 감내해야 했다. 인생처럼. 그렇게 아프고 외롭다면 생은 차라리 끝나는 게 맞을지도 몰랐으나 지겹게도 끝나지 않았다. 노동과 병세와 삶의 공통점이었다. 어쨌든 혼자여야 한다는 것. 그래도 살아 있음에 다행이었다. 이 더럽고 피곤하고 피하고 싶은 사건들의 연속과 회오리.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떻게 간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살아있기에 그런 걸.
그들의 짜증도, 나의 피로함도, 항상 부족한 시간도, 출퇴근도, 근무가 끝나자 되려 늘어져 있고만 싶은 이 기분도. 다 내 선택이었으며 내 인생이었고 그 발원지에서의 조각들 역시 그랬으니까. 병세도, 인간들도, 노동도, 어차피 평생을 함께 가야 하는 거니까. 그들의 모습은 내 모습이었고 그 공간 속에서의 말도 안 되는 일체감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도 변하지 않을 사실이자 진실이었다. 다 같은 인간이고 생물이기에. 그래서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끌어안고 사는 법을 은연중에 조금은 배웠는지도 모른다.
제목을 붙인 뭔가를 써서 올린 것이 30회를 채웠다. 피곤했고 기력이 안 생겼다. 눌러 놓고 싶었다. 내가 왜 이렇게 나의 힘듦을 구구절절 토로하면서도 그만두지 않는지. 30회, 그 이상의 글들은 모두 사실상 내가 이렇게나 생고생을 했어요, 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때려치우지 않는지를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 싶었다. 엄마아빠가 싫어서? 덕질을 위해서? 영미권으로 튀기 위해서?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이었다.
나는 그래도 조금은 사랑했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고 이 피곤함과 지겨움도 그래서 다 내 몫이었다. 내 노동은, 삶은 그래서 숭고했다. 뭐 같지만 계속할 거니까. 계속했으니까.
그 하나의 진실로 말미암아 나는 이 페이지에 자취를 남긴다. 사랑했고, 그만큼 힘들었고, 힘들었지만, 내 선택이었고, 사랑했고, 진실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