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투 노동

제가 할 줄 아는 게..

by 이븐도





"병원이란 데는 참, 시사적 변화에 민감한 곳이에요, 그쵸?"

"하핫. 그런가요."

그리고 나는 웃었다. 사실 잘 안 들려서 안간힘을 써 알아들었다. 그분은 참 예쁘게도 웃었다. 오늘 떡볶이와 김말이튀김이 나온다며 단둘이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깨끗한 흰 자켓, 병원 로고가 각인된 배지, 아름다운 미소, 말간 피부, 깔끔한 화장, 높일 일 없는 목소리. 덥고 사람들이 와글거리고 파업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똑같은 뉴스가 커다란 화면에서 나오는 열두 시 사십 분쯤의 구내식당에서.

나는 아마 입술이 허얬을 것이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팔에 메모를 하기 위해 붙였던 플라스터를 뗐을 것이다. 어떤 얼룩이 어떻게 묻든 상관없는 유니폼 상의 주머니에는 미처 놔두고 오지 못한 체온계가 들어 있었다. 병동으로 올라가면 다시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어머, 너무 안 매워서 좋다. 젊은 사람들은 매운 거 좋아하지 않나? 입에 맞아요?"

"그러게요. 안 맵고 맛있습니다."

아마 나는 또 웃었다. 그분도 웃었을 것이다. 시끄러워서 일단 나는 무조건 웃었다. 당연히 맞죠. 안 맞은들 어쩌겠습니까. 뭐든 감사하죠. 진짜 뭐든 감사한 일이었다. 나는 이 사람 나잇대에 이렇게 웃으면서 우아하게 일할 수 있을까.




아니요.

아니요.

응, 아니야.

아무튼 감사한 일이었다. 나는 할 줄 아는 게 없었으므로. 비록 밥 따위 안 먹고 그냥 가서 빨리 항암제를 달고 떼고 차팅을 넣고 입원받는 것을 돕고 퇴원 준비를 하는 게 더 지당한 일이었지만 이래저래 감사한 일이었다. 와우.


"왜 이렇게 못 먹어요, 그래서 말랐나?"

병동 수선생이나 파견 온 이곳 수선생이나 참 날씬했으면서 늘 그런 말을 했다. 그녀가 젓가락을 놨고 나는 배부르다고 했다. 빨리 가고 싶습니다. 저는 바쁘거든요.

비록 할 줄 아는 게 없지만요.






5월 중 면담 예정이니 올해의 계획에 대해 생각해 오라는 각자의 스케줄표가 떴다. 올해의 계획, 뭘 말하라는 거지, 맨날 하는 자기 계발 계획 그런 거? 작년 이맘때쯤 뭐 했더라?

뭘 했긴, 맨날맨날 파김치처럼 일하고 300도 안 되는 월급을 받았다. 나이트 근무를 안 했다는 게 이유였다. 안 한 게 아니고 못 한 거였지, 쌍놈의 자식들. 근무인원이 적은 나이트 때는 해당 과에 경험이 없는 타 병동 인원을 투입할 수 없다는 게 병원 측 입장이었다. 응급상황이 생기면 대처할 수 없다고. 씨, 그럼 그냥 파견을 돌리지 말던가요.




2교대는 너무 힘들었다. 똑같이 일어나서 훨씬 늦은 시간에 들어왔다. 6시 반에 병원에 도착해 7시에 시작한 일을 저녁 7시 반에 인계하고 남은 일을 처리한 후 8시를 조금 넘겨 병원을 나가 집으로 오면 9시가 좀 안 됐다. 밥을 먹고 소화시키고 치울 시간이 없었다. 잘 시간도 부족했다. 한마디로 뭣 같았다. 검사도 수술 환자 받는 것도 항암도 입원도 퇴원준비도 내가 다 해야 했다. 나이트 근무가 있으면 원래 그 병동 사람들처럼 기본 4오프씩을 받았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쁜 새끼들. 세상 모든 일을 내가 하는 기분이었다. 세상 모든 일? 모든 일이라.


아니다. 그런 적이 없지. 세상은 나 같은 사람에게 모든 일을 주지 않는다. 나는 일을 원래 못 했으니까. 잘한 적이 없었다. 아, 퇴사할지 어쩔지 말하라는 거구나. 내년 퇴사 계획 지금 말하라는 거잖아. 망할. 진짜 망할.


나 뭐 해 먹고살지? 정말로.

진짜, 뭐 해 먹냐고. 퇴사 못 해. 내 이천만원.






2천만원이 사라져서 퇴사를 못 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능력이 없었다.



3년이 됐다. 지났다. 모든 간호사는 버티자는 생각으로 들어온다. 정말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단언할 수 있다. 신규는 유예된다. 본인의 인생에서도 유예된다. 뭐에서? 앞으로 뭐 해 먹고살지, 에 대한 진지한 걱정에서 유예가 된다. 일단은 이곳에서 살아남아 경력을 가지고 나간다는 계획이자 의무를 지고 학생들은 면허 한 장과 성적증명서를 달랑달랑 들고 들어와 유니폼을 입는다.


면접장에서 입었던 정갈한 정장과 샵에서 받은 메이크업과 반듯한 자세와 쪽진 헤어스타일은 어디 가고 얼굴이 누렇거나 허얘진 채 산발 비슷한 묶은 머리에 온몸으로 눈치를 보느라 잔뜩 주눅 든 몸짓으로 '이걸 왜 몰라요?'를 오백 번쯤 듣고 나면, 거기다가 출퇴근길에 병원 근처 다리나 횡단보도에서 눈물을 요구르트 한 병쯤 흘리고 오프 때 본가에 가고 애인을 만나고 이것저것을 사고 야식을 먹고 또 눈물을 흘려주면.. 주면? 똑같다. 변하는 건 없다. 지금의 나처럼.

경력? 목적지가 없잖아. 이걸 가지고, 이 한 줄 뿐인 경력을 가지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너무 열심히 유예하고 도피만 해 버린 탓이다.






옛날 옛적에는 기자가 되고 싶었고 그보다 전에는 유사 백수를 꿈꿨다. 하도 문송한 헬조선이라고들 떠들어 대길래 간호학과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문송한 지옥문을 뚫을 간판을 따낼 성적도 안 됐고 노력도 못할 것 같았다. 적중했다. 성적이 안 됐고 노력도 못 했다. 그러니까 대학에 가서도.



내가 집에서 눈총을 받지 않은 건 입학금과 등록금을 받고 입학한 그 해뿐이었다. 나는 '어떻게 이걸 몰라?'를 모든 강의의 수업 시간마다 생각하며 어떻게든 편입을 하거나 이 강의실의 모든 이들보다 내가 똑똑하다는 걸 증명할 생각만 했다. 써놓고 보니까 진짜 멍청이에 등신인데.. 정말 그랬다. 왜 그랬지. 아무튼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으면 안 멍청했을 일인데 나는 안 멍청하지 못했기 때문에 증명해내지 못했다.


애들은 내가 알았던 것만 모르는, 모르는 척했을 뿐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들은 정말 흡수를 빨리, 열심히 했다. 나는 아니었다. 아마.. 그 애들과 같이 수능을 쳤더라면 (물론 친 게 맞지만 수시로 온 사람들이 훨씬 많았기에) 나는 어쩌면 그 정도의 대학에도 못 갔을 수도 있다.

별로 대수롭지도 않게 학교는 재미가 없었다. 공부라도 열심히 했어야 했는데 아무튼 학점이 좋지 못했다. 열심히 안 했다. 하지만 돌아간다고 해도 열심히 했을 것 같지는 않다. 나는 그 방대한 양들을 그 기간에 외울 수 없다. 열심히 안 해서 성적이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내 능력치가 안 됐다. 이 문장을 쓰면서도 가슴이 조금 아프다. 진짜 뭐 해 먹고 살지.




그나마 학교가 서울에 붙어 있었기에 그 알량한 어드밴티지로 몇 군데의 대형 병원들에 실습을 다녔다. 정확히는 하루 종일 선 채 수첩에 알지도 못하는 랩 수치들을 잔뜩 적으려 했고, 그 시기가 지난 후에는 세상 열심인 눈빛을 하고서 집에 가서 할 일들을 생각했다.

그 원피스 얼룩 세탁하기, 그 책 도서관에 갖다 주기, 분리수거하기, 다이소 가서 탈취제 사기.. 같은 것.


하하.






나는 집에 있기 싫었다. 어떻게든 떠나야 했다. 내 방에서 이어폰으로 노래 한 곡도 마음 놓고 못 들으며 20대를 보낼 수 없었다. 20대에 무슨 큰 로망이 있었던 게 아니고, 합법적 근신이나 다름없는 수험생 생활이 끝나고도 그렇게 살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그렇다고 맨날 이불 들쓰고 자는 척을 할 수도 없잖아. 무엇보다, 노력한다면 떠날 수 있었다. 당시 본가는 대전이었다. 대전 및 충청도에는 대학이 무지하게 많았다. 당연히 그보다는 급간이 높아야 집에서 떠날 수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목표에만은 성공했다. 다행이었을까? 수도권으로 떠난 건 멋진 일이었지만 문제는 과잠을 입고 다니는 모든 이들의 대학 레벨이 나보다 높았다는 데 있었다. 당시 내 딴에 '어떻게 이걸 모르지' 싶은 애들이 가득한 강의실로 향하는 지하철역과 버스정류장과 기숙사에 명문대생들이 자꾸 나타났다. 게임 속 장애물처럼. 누가 싸우라고 한 것도 아니었으며 사실 내게는 무기도 없었는데, 혼자 싸웠다. 무엇과? 뭐..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와 이 세상 모든 인서울 대학생들과.

등하굣길, 외출, 친구와의 약속. 나는 끊임없이 섀도 복싱 중이었다. 아, 그래서 다이어트를 한다면서 그렇게 먹어댔군. 혼자 허공에 주먹질을 해대느라 배가 고팠다.






원래도 못 갔을 대학들인데 괜히 이곳으로 납치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스스로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게 한심하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를 못했다. 도서관에 숨어서 페이지 속 문장이 아닌 그 장면들만을 곱씹었다. 우울했군. 우울했던 게 맞았다. 그걸 빼면? 다이어트? 그러니까 다이어트와 학교 간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재학 중 두 항목 모두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타깝게도.

방학 때는 집에 가야 했다. 번번이 싸우고 나왔다. 어디로? 아빠의 직장이 보장해 준 기숙사로. 정말 웃긴 모양새였다는 생각이 든다. 진짜 무슨 똥고집을 그리 부렸을까. 당연히 엄마는 용돈을 주지 않았다. 용돈이 없으니 해야 했다. 알바.






내가 살면서 했던 아르바이트는 다섯 가지다. 대전 모 구의 동대문 엽기떡볶이, 의정부 모처의.. 무슨 호프집, 역시 의정부 모처의 노군꼬치, 서울 모처의 미니골드. 그리고 학교 체육관 수영장 여자 탈의실에서 몇 시간 동안 앉아 있기.



트와이스의 낙낙, 비투비의 무비, 메종 마르지엘라 티셔츠에 족발 같은 신발을 신고 전자담배를 피우던 부산 사나이의 취향이던 하우스인지 퓨처 일렉트로닉인지 알 수 없는 장르의 음악, 2019년도를 강타했던 수많은 가수들의 애절하고 쨍쨍이는 발라드들, 방탄소년단의 핑크색 앨범. 그리고 내가 돌아다니며 듣던 시끄러운 락 음악들. 한여름 1호선의 차고 눅눅하고 냄새나는 공기. 라이키, 노땡큐, 하트셰이커.


몇 가지를 알았다. 나는 멀티가 안 되는 인간이며, 습득력이 상당히 느렸고, 누군가 윽박지르면 머리와 손이 더 느려지는 안타까운 성정을 지녔으며, 대중가요가 스피커로 끊임없이 나오는 환경에 정말로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작업장 공기의 무게는 그 주인의 나이에 비례한다는 점.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들이 없으면 없을수록 공기가 가벼웠다.




의정부의 호프집이 그걸 증명해 줬다. 강한 경상도 말씨를 쓰던 육십 대쯤의 노부부는 그전 근무자와 나를 시시각각 비교하며 잔소리를 했다. 대전에 있을 엄마와 아빠가 경상도 사람이었고 명절에 어딘가를 가면 늘 듣는 게 그 말투라 나는 뭣 같음보다는 공경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그 잔소리를 견뎠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못 견딘 모양이었다.


한 달. 우리는 서로를 못 견뎠다. 그들은 알바를 세 탕 뛰고도 빠릿빠릿하며 요령이 좋고 싹싹한 그전 근무자가 아닌 나를 못 견뎠고 나는 내가 본인의 딸도 아닌데 말은 편하게 하고 그 어떤 딸 같은 편의도 봐주지 않는 그들과 취객과 시끄러운 음악 소리를 못 견뎠다. 그들이 먼저 항복했다.

2학기가 시작되어 슬슬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이번 달까지만 하겠다는 말을 품고 출근했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말을 꺼내기 전에 이번 달까지만 하는 건 어떻겠냐고 웬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눈치채고 있었다. 마치 헤어지기 전처럼. 흠. 나는 차인 거였다.




그런데 그게 처음이 아니었다. 나는 대전의 엽기떡볶이 집에서는 2주 만에 잘렸다. 혼자 홀서빙을 하고 주방에서 배달 나갈 것도 만들고 포스기를 붙들고 계산도 했어야 했는데 나는 알바 경험이 전무했다. 잘렸다. 나는 꽤 큰 상처를 입었다. 입을 만했다. 서울에서는 '설잡대생'이었으며 방학 중에는 거기에 +1 해서 쓸모없는 백수였다.


서울 모처의 미니골드는 나쁘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냥 그 듣기 싫은 발라드와 점장의 가격표 맘대로 붙이기와 남 험담과 한숨 같은 것만 좀 견디면 됐다. 무엇보다 나는 그 동네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생각으로 여름을 보냈다. 그래봤자 두 달짜리였다.

노군꼬치?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이었고 장사는 역시나 안 됐다. 나는 거기서 자영업자의 쓴 눈물 같은 걸 본 것 같다. 장사가 좀 된다 싶은 주에 주인은 가족들을 데리고 동남아시아 등지의 휴양지로 갈 계획을 세웠지만 조금이라도 손님이 뜸하면 그릇과 컵을 닦다가 그 마르지엘라 티셔츠 알바생과 나를 아련한 건지 잔소리를 참는 건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봤다. 마르지엘라는 부엌으로 숨을 수라도 있었지만 나는 숨을 곳이 없었다. 아무튼 거기도 두 달도 안 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엔딩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뭐, 별달랐겠나 싶다. 누가 찼든 아무튼 이별 아닌가. 결혼할 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아름다운 이별 같은 건 원래 잘 없잖아.






학교의 체육관 알바는 당시 친했던 학과 언니가 주선한 거였다. 국가근로 비슷한 거라 자격요건이 충족되어야 했는데, 내 이름 걸어둘 테니 니가 할래,라고 해서 나는 몇 달을 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가서.. 발가벗은 초등학생들이 나를 보고 '남자예요?'라고 묻는 걸 받아주고 그들이 수영가방에 젖은 수영복과 머리방울 같은 걸 넣고 떠나면 그 물기와 머리카락 가득한 바닥을 한 번 닦고 탈의실과 샤워실의 불을 끄고 문을 잠그면 됐다. 심심했고 잠이 왔다.


애들이 나에게 어떤 어그로라도 끌어주길 바랐는데 꼭 뭔가 할 걸 가져가면 자꾸 말을 걸었고 안 가져가면 '왜 남잔데 치마 입었어여?' 같은 질문을 히죽히죽 했다. 나중엔 재치 있는 척 대답할 레퍼토리도 떨어져서 '아니거등' 하고 말았다. 지루했다. 하기 싫은 건 아니었으나 중요한 일도 아닌 걸 위해 옷을 챙겨 입고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학교까지 또 와야 하는 게 상당히 귀찮았다. 근데.. 지금 생각해 보니 모든 일이 그럴 것 같은데. 그땐 정말 몰랐구나. 쥐뿔 할 줄 아는 것도 없으면서 그런 생각은 왜 한 걸까.

지금은 아는 것 같다. 그거 평생 해야 돼, 인마.



아무튼 그런 진리를 그때는 몰랐다. 다만 말한 대로 몇 가지는 알았고 하나는 명확했다. 나는 일을 못 한다는 것.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것.






국가고시에는 정말 놀랍게도 놀라운 점수로 통과했다. 나는 1교시 성인간호학을 친 후 노은도서관에 짱박혀 일 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천천히 생각했다.

자양중학교였나, 학교를 엄청난 인파와 함께 나와서 어떤 카카오톡도 보지 않은 채 건대입구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떨어질 것 같아. 가시나, 지랄하네. 진짜야. 어떡해? 뭘 어떡해. 가시나야, 밥이나 사 먹고 들어가. 어디냐?건국대. 맛있는 거 사 먹어. 응.


엄마는 아무래도 내가 농담을 하는 줄 아는 것 같았다. 나는 진지했다. 그래서 진짜 최후의 만찬을 즐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망한 시험지를 가방 속에 넣고 밥이나 꾸역꾸역 먹기가 싫었다. 롯데몰로 가서 사카구치 켄타로가 나온 로맨스 영화를 봤다. 재밌었다. 뭔들 재미가 없었겠냐만은.




십 층이었나 아무튼 롯데시네마에서 계속계속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길에, 남자 둘이서 커다란 시험지를 넘기고 있었다. 저 새끼들도 망했을까. 나만 망했을까. 분명 마지막 교시 끝나고 사방에서 'X발 존나 어렵지 않았냐? X 됐어.'라고 그랬는데. 나는 그 카페로 들어가 그들을 멀찍이 두고 휴대폰을 켰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환호성이었다. 나 말고 그들이. 제발. 나도 붙게 해 줘. 나도. 나도.


그리고 기적적으로 믿을 수 없는 점수가 나왔다. 엄마, 나 안 떨어졌어. 진짜야. 붙었어. 붙었다고. 턱걸이도 아니야. 어떡해? 나 자유야, 진짜. 하고 빨간 오미자차 비슷한 걸 앞에 두고 그 사람 없고 잠 오게 공간만 큰 평일 쇼핑몰 안 카페에서 온 호들갑을 다 떨었다. 붙을 거라고 했잖아, 원래 국가고시는 안 떨어져. 아니야. 진짜 어려웠다고. 붙었다매? 그래. 됐다니까? 대전 안 가도 돼. 좋겠다, 가시나야. 어딘데, 아직 잠실. 빨리 가, 들어가 자. 씻고. 했다.

나는 그 영화의 OST를 들으며 1층 자라에서 옷을 두어 개 사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다음 날에는 잔뜩 꾸미고 온갖 곳을 쏘다니다 두끼에 가서 떡볶이 국물과 튀김과 볶음밥과 오뎅을 먹었다. 그리고 친구와 밤새도록 전화를 했던 것 같다.




4년이 지났다. 그때의 인생 계획에는 런던 간호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있었던 것 같은데.. 오프는 점점 도피의 시간에서 여가의 시간이 됐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기숙사 기간만 채우고 관둘 줄 알았던 병원을 자취방을 구해 달리기를 하고 아이돌 공연을 쫓아다니고 카페에 앉아 쓸데없는 것을 쓰고 몇몇 일에 눈물을 짜내며 착실히 다녔다.


착실히? 그래. 그건 맞긴 하지. 못 그만둬서 다니는 줄 알았던 병원인데.. 진짜 그렇게 돼 버렸다. 그때는 떠나기 위해 다녔고 지금은 묶여 있다. 누가 묶었냐고? 병원이 나를 짝사랑하는 존재길 바랐는데 이제는 진짜 쌍방이 되었다. 사랑은 아니어도.. 서로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아니, 서로도 아니지. 다른 짝사랑이 됐다. 웃긴 점이다. 한 명분의 인력으로도 기능하지 못했던 신규 때는 누가 나를 협박하는 것처럼 살았는데 그때보다는 나을 지금은 내가 쫓아다니는 기분이다. 아니, 사실 그 정도는 아닌데.. 아닌가? 정말 아닌가? 도망치고 싶지는 않은데 그냥 있자니 이 안온한 미래가 두려워지는 것이다. 적응을 하랬지 길들여지라고 한 적은 없었는데 너무 효과적으로 그렇게 되어 버렸다.






동기 중 하나는 나이트 때마다 소아 경력을 원하는 병원이 없다고 거절 의사를 밝히는 영문 메일들을 확인하며 짜증을 냈고, 한 명은 부자가 되겠다며 어디로의 로테이션이 나을지를 한 번씩 물었다. 한 명은 뭐.. 별 말은 없었지만 그녀는 아마 우리 중 그만둘 가능성이 적었다. 그리고 남들 눈에는 나도 그런 모양이었다. 아, 언제 관두냐, 소리가 나오면 '니가 제일 오래 다닐 것 같아'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사실 그건 모두 당장은 그래 보였다. 우리보고 4년 차라고 했다. 구라치지 마세요, 소리가 절로 끓어 나왔다. 입밖으로는 '에이. 그런 게 어딨어여' 뿐이었지만.






내가 온갖 일거리에서 노동이 내 인연이 아님을 확인할 동안, 나와 함께 살던 절친한 친구는 간간이 하던 카페 아르바이트 생초짜에서 마스터가 되었다. 능력은 그런 거였다. 나에게는 없었다. 세상이 나에게 가르쳤고 나는 그 정도는 알아들었다. 천만다행히도.

내 능력치는 이 정도였다. 눈 뜨고 정신만 차리면 되는 일을 4년쯤 하면 간신히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정도.


티오가 정말 없는 다른 분야에 적을 두게 될 친구에게 종종 너 듣는다. 병원 바깥, 통상의 취업이나 취직이나 일자리와 관련된 것들이다. 수다를 떨다가 느꼈다. 내가 정규직인 이유는 누군가에게 해를 끼쳤을 경우 책임을 강하게 물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뿐이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었다. 그런 게 아니었다면 이 직종 역시 고용불안정의 세태를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장도 예전 같지 않았다. 코로나와 의료 파업 등등의 물결이 다 말라 버린 게 아니었으니. 병원들은 신규 채용을 한 때 올스톱하다시피 했고, 수도권의 대학병원들이 입원을 안 받거나 가려 받는 동안 지방의 중소 병원들은 터져나갔다고 했다. 그 때라도 환자를 더 받아 돈을 받아야 하니까. 그들이 그 간호사에게 돈을 더 줬을까? 글쎄. 모르겠다.






아. 그러니까.. 진짜 뭐 해 먹고살지.

내년에 한 달을 쉴 수 있다. 정말 뭐 하지. 살면서 잊어야 할 게 많다. 보이스피싱 십새끼들에게 전달한 현금 이천 만원의 행방이 그렇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 나라는 인간의 능력치와 그 능력치의 부재. 나는 평생을 할 줄 아는 게 없었고 주의가 부족했다. 가여운 일이다. 비꼬는 게 아니다.


진지하게, 올해는 뭐든 해야 했다. 병원에서는 자꾸 경력 관리를 하라고 했다. 대학원을 가든가, 승단 계획을 알아보던가. 아니면 정말 영어 공부를 하든가. 후자는 뭐 언제든 해야 하는 게 맞긴 했다. 이제 유예의 기간이 끝나 버렸다. 경력을 위한 생존이 아니라.. 향후 십 년의 행방을 결정할지도 모르는 방향을 정해야 한다. 언제 끝날까. 이런 건. 에휴.






아빠는 5월에 전역한다. 면접을 보러 다닌다. 식구 중 가장 자격증이 많았다. 아빠는 공부로 스트레스를 푸는 게 분명했다. 나는 내가 50 중반에도 어딘가로 면접을 보러 가서 무례하거나 무례하지 않게 평가를 당해야 한다는 게 낯설었다.


그 낯선 것을 겪는 사람이 내 옆에서 운전을 하며 내 푸념에 평생 안 끝나, 시험은. 이라고 했다. 아빠는 나름 그 분야에서 '순혈'이었다. 내가 보기엔 그랬다. 그런데도 그렇게 노력하며 살았다. 백세시대잖아. 인생 반 좀 넘게 온 거야, 라고 또 그랬다. 아빠는 참 대단하고 가여웠다. 멋지기도 했다.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억을 모으면 관두려고 했다. 병원. 그게 큰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고 그냥 돈을 그렇게 모으려고 했던 거였다. 2천만원 만큼의 노동이 사라졌다. 돈만 보고 일하기에는.. 일은 정말 평생 해야 했다. 하기 싫어 억지로 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정말 기분 나쁘게도 늘 그렇지는 않았다. 이 고용 상태는 쌍방이었다. 당연히. 아닌 척했지만.


그리고 나는 노동에 적합하지는 않지만 또 그만큼 방구석에만 있어서도 안 되는 애매한 인간이었다. 어쨌든 일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뭘 해야 하나.




근데 뭐.. 언제는 계획한 대로 흘러갔던가. 인생에서 최선이었던 건 언제나 아무것도 없었다. 늘 차선이었고 차차선이거나 저 멀리에 있는 갓길을 걸어야 하기도 했다. 앞으로도 그렇겠지? 그래.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언제는 잘 알아서 했나. 몰라서 했다. 몰랐고 차였고 그제야 확인했다.


재밌군. 참 재밌어. 나는 나를 데리고 사는 게 재밌다. 정말이다. 엄마, 나 현자가 다 된 것 같아.

그치? 난 참 재밌는 사람이야.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