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들

목 아래 잠긴 말

by 이븐도





그냥 불쌍했다고 한 줄 써놓고 덮으면 될 것을 나는 그러지 못했다. 불쌍한 건 사실이었다. 불쌍하다는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불쌍하지 않았다. 나는 그래서 단번에 불쌍하다고 잘라 말할 수 없었다.

나도 언젠가 그들처럼 될 수 있으니까.

아니라고? 오만의 방증이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것 같은, 어쩌면 그 노래를 부르고 있는 그 자신들의 것들도 아닌 것처럼 들리는 곡을 따라 달렸다. 그런 걸 사이키델릭이라고 표현하나. 노래 바깥의 밤은 그런 폼 나는 단어와는 거리가 있었다. 할 일 없는 어린애들이 팔짱을 끼거나 붙어 앉거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앉아 쓸데없는 이야기를 줄줄 떠들었다. 본인들이 세상의 중심이기를 바라겠지만 공원에는, 일요일 밤 열두 시의 공원 벤치에는 그런 커플들이 어느 구석을 헤집어도 끊임없이 나왔다.




그들이 지난 자리에는 다 마신 아메리카노 컵과 토레타 병과 생수 병이 남았다. 밤은 공명을 줬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나 의미도, 실상 재미도 없는 개인사를 앉아서 나누고 서로를 관찰하는지도 몰랐다. 환상을 부풀려 주잖아. 아침이면 모두 사라질 것들이지만. 또 그래서 나 역시 어떤 것들을 그렇게나 붙들고 놔주지 못했다. 밤이잖아.


밤에 달리는 것이 좋았다. 머리를 채운 온갖 잡념들보다 음악소리가 더 크게 느껴져 달리기에 편했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적었고 생각을 지우기에 좋았다.

기록은 형편없었다. 속에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만큼이나. 세상만큼이나. 나는 모든 것을 치기 어린 시선으로 유치하게 증오하며 달렸다. 그랬다. 별로 신나지도, 와닿지도 않는 곡들을 그냥 틀어놓고 달렸다. 어설프게 맺힌 땀 때문인지 밤공기 때문인지 모든 움직임이 싸늘했다. 온도가 적당히 낮고 공기가 촉촉해 꿈틀이는 지렁이도 몇 마리 지나쳤다. 호숫가의 선술집들 앞에서 비틀거리는, 또는 비틀거리는 척을 하고 있을 사람들을 지나쳤다. 한심했다. 그래서 밖에서 술을 잘 안 마시려 했다. 추하고 한심하니까.




중반쯤 달려서는, 그 세계가 어떻게 무너지든 나는 또 일어설 거라고 생각했다. 무너져? 다른 곳으로 옮겨. 옮겨서 살아. 조각들을 버리고, 청소하고, 닦고. 원 바이 원. 살아있는 한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어쨌든 잘 살아 있다면.


제일 무서운 게 뭐야,라고 묻자 그는, 소중한 사람을 잃는 거,라고 했다. 늘상 느끼한 말을 떠들어대던 그가 차 앞유리만을 보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엄마, 동생. 그리고 너? 나는 그 뒤에 붙은 그리고 너,라는 어구는 별로 의미가 없는 것임을 알았다. 서운하지는 않았다. 이제야 좀 믿을 만한 말을 하는구나, 하고 느꼈다. 나는 뭐라고 대답했더라.

그래서 그게 생각났다. 내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거짓이라는 게 드러나는 순간. 그런 대답을 했다. 어둑한 시간, 차 안이라 가능했다. 대낮이었다면 그런 감상적인 답을 안 꺼냈겠지. 지금도 밤이었다. 그것도 각종 불행이 모여든 곳에서, 한참 눈도 귀도 없는 것처럼 구경을 하다 돌아온 밤.




오피스텔 엘리베이터 앞으로 돌아와서는 조금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빨리 지나갔다고? 지금까지의 빨리, 와는 달랐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다만 상쾌한 기분이 아니라, 달리기 전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기분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샤워를 하며 생각했다. 이건 성장의 증거라고. 지겹게도 물어댔던 그 문제에 대한 답이라고. 잘 살고 있다고. 그러게. 이게 잘 살고 있는 게 아니면 뭘까.






4년 전에는 열두 시 반에 병원에 들어가 새벽 서너 시가 다 되어 나왔다. 그것도 나 외에 두 명의 교대근무자들이 자거나 휴대폰을 하거나 팩을 붙이고 있거나 옷 비닐을 뜯고 있는 기숙사 방으로. 목구멍에서 거머리가 나오거나, 당장 내일 죽는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꼴사납고 시꺼메지고 우그러들어 흉해진 몸으로 늙어버린, 그 가여운 노인들에게 관련된 일을 했다. 그 정도는 아니었던 암 환자가 내게 부탁했다. 종양이 얼마나 줄었는지 알려줄 수 있냐고.


나는 그 말을 근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들었으나, 세 시가 다 되어서야 여태 안 자고 있던 그에게 다가가 3mm가 줄었다고 전했다. 그는 내게 병원 1층에서 쓸 수 있는 바우처를 주었다. 손바닥만 한 봉투여서 감사 카드라고 생각했는데, 기숙사로 들어오는 길에 꺼내 보니 그런 거였다. 5만 원이었나. 나는 그걸 내가 취직해 처음 받은 칭찬 카드쯤으로 여겼다. 다시 돌려주려 했던 기억도 섞인 것 같지만 어쨌든 나는 그걸 뚜레쥬르와 던킨도너츠에서 요긴히 썼다.



누워 있는 이들의 모습은 흉했지만 차라리 그 세계의 문법이 더 쉬웠다. 이곳에서, 왜 내가 어떤 병실의 문이나 커튼을 열 때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려 했는지 알았다. 병원에는 원래 거짓말이 많았다. 그러나 그 거짓은 진실보다 강하지 못했다. 횡단보도에서 내 앞을 지나가던 한 남자의 담배 연기처럼. 전자담배였는지 연기가 유독 뭉글하고 크게 퍼졌고, 그 자리를 비껴 달리자 불쾌하게 들큰한 냄새가 났다.


연기는 곧 사라졌겠지. 죽어가는 추한 성인들, 기운이 없어 어떤 거짓말을 할 힘도, 꾸며댈 기력도 없는 그들에게는 그런 뿌연 효과가 필요 없었다. 3cm가 아니고요? 감사합니다. 네. 수치가 안 떨어졌어요. 폐를 잘라내야 한대요. 울혈이 심해져서 약을 올린대요. 신기능이 다 떨어졌대요. 어쩌고.

사실은 그런 극명한 경과를 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이미 잔뜩 쇠해 있었다. 그 어떤 진실도 그들에게는 지루한 운명일지도 몰랐다. 그들은 정말 그렇게 지루하게 누워 있기만 했다. 신기할 정도로.






여기에서는, 이 구역에서는 나는 철저히 외부인이었다. 아픈 애와, 그 애를 싸고 돈 부모의 세계. 수치의 추이와 교수와의 면담 내용보다 그 구역의, 세계의 경계가 더 견고했다. 애들은 본인이 맞는 약이 잠이 드는 약인지, 죽음으로 덜 아프게 인도하는 약인지도 분간을 못 했다. 몰랐다. 부모가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다르게 설명했을 테니까. 실제로 그랬으니까. 그게 그곳의 법이었다. 나는 부모들이, 그 애들이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를 몰라 말을 아꼈다. 그런데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머리가 아팠다.


눈을 떴을 때, 정말로 눈을 떴을 때. 내게 반짝였던 세상이 다 반쪽짜리였음을 깨닫는다면. 그로 말미암아 많은 것이 부서지려 한다면. 그 애는, 그 개체는 어떻게 살아갈까.

어떻게 살긴, 잘 살겠지. 원망하고 화를 내고 슬퍼하고, 불행히도 그게 안 된다면 조금 오래 우울한 상태로 지내겠지. 이내, 숨이 끊어지는 것보다 그나마 그렇게 살아있는 게 낫다는 사실을 자각하면 우울을 덜어내겠지만. 그리고, 못 살면 어떡할 것인가. 난 그러지 않을 건데. 나는 그 세계인지 세상인지 아무튼 그게 다 깨진다 해도 어떻게든 살 것이다. 러닝화를 신고, 조용한 듯 아직도 활동 중이던 사람들과 도시를 지나친 것처럼. 그것만은 진실이었잖아. 달렸다는 것.




그러게. 이렇게 끝내버리면 될걸 나는 너무 동정을 했다. 편해진 탓이다. 퇴근 후 선선한 날씨에 달리기도 하고, 혼자 쓰는 집에 들어와 잔뜩 쌓인 마음을 털어내고. 내일은 친구를 만나 영화를 본 후 출근할 것이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불행인지 슬픔인지 비탄인지 모를 것을 꾸며낸 것을 기반으로 한 것을 또 진짜처럼 만들어낸 영화를 보러 간다. 얼마나 사치스러운 활동일까. 동정은, 연민은. 내 하루에는 많은 장면들이 있었으나 나는 그런 대화 한 줄과 몇 초의 목도를 기반으로 남의 우울함을 구태여 끌어왔다. 굳이 그런 어두운 내용의 영화를 보러 가는 것과 맥락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심신이 편해진 탓이다.


열몇 시간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붙잡힌 노예처럼 일했기 때문에 그곳이 사생활이라고는 전혀 없는 공용 기숙사 건물인 전혀 상관이 없었다. 씻고 누워서 잘 수 있음에 감사했다. 반면에, 일도 익숙해지고 나 혼자 쓸 수 있는 공간이 단단히 존재하는 지금은, 아무리 시간에 맞춰 퇴근해도 알 수 없는 울적함이 남는다. 사치스러워진 것이다. 감정을 들일 공간이, 체력이 남아나게 된 것이다.






그들은 한때 잔뜩 사랑받고 덕망이 높았으나 결국은 버려진 노인들이었고, 이들은 잔뜩 어리고 살결이 부드럽고 몸집이 작은 탓에 보호를 받고 동정을 받고 귀여움을 받는 어린애들이었다. 나는 성인 병동에서는 두려움을 느꼈고 이곳에서는 공연한 희망과 사랑을 본다. 벌어지는 현상은 똑같은데 개체의 생김새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유는 그것뿐이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일도 출근할 수 있어서. 키보드로 뭔가를 적고 있어서. 그 셋만은 아마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까. 어떤 거짓도 의미도 없는 사실이니까.






아주 어릴 때, 엄마에게 안겨 거실 소파에 누워 있었다. 엄마가 하고 있던 목걸이의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엄마, 사람은 다 죽어? 그럼 엄마도? 나는 내 말이 슬프게 들렸을 것 같아서 엄마의 표정이 슬플 줄 알았는데 별로 그렇지 않았다. 대답은 기억이 안 나고 그런 표정이 아니었던 것만 떠오른다. 살결의 냄새, 엄마가 입고 있던 원피스의 꽃무늬, 쳐놓은 커튼으로 들어오던 늦은 오후의 햇빛. 이게 꿈의 기억인지 정말 진짜 기억인지는 영영 알 길이 없다.


나는 그런 것들을 연상해 줄줄이 떠올리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병원은 가끔 너무 슬픈 곳이다. 슬프고, 잔인하다. 오래 있다 보면 세상 모든 게 시시하고 허위로 느껴질 만큼 잔인하다. 하지만 이곳은 늘 그랬던 곳이다. 내가 적을 두기 훨씬 이전부터 늘 그랬다. 그래서 엄청난 사실을 알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이렇게 호들갑을 떨 필요가 사실은 전혀 없다.




주말의 밑반찬 만들기와 코스트코와 트레이더스와 이마트 장보기와 김장, 가구 재배치, 빨래 개키기, 다림질 같은 게 없었더라도 엄마와 아빠는 지금처럼 지냈을까 궁금했다. 어쨌든 그들은 큰 문제없이 결혼생활을 이어 왔다.

딸의 자취방에 낯선 이의 흔적이 있지는 않은지 한 번씩 주기적인 시찰을 한다. 냉장고를 잔뜩 채워 놓고 망가졌거나 수리해야 할 게 없는지 샅샅이 본다. 엄마 아빠가 조금 보고 싶다. 온갖 잡음들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를 보존해 온 성실성과 강인함과 안온함을 나는 높이 산다, 이제야.






이곳의 어떤 공기는 가끔 너무 무겁다. 공기가 무겁다 싶었더니 사실은 희뿌연 유리 벽이었다. 그 불투명한 벽 바깥에서, 또는 안에서, 나는 어떤 말을 어떻게 골라내야 할지 알 수 없다. 몇 미리가 작아졌다느니 커졌다느니 하는 말은 너무 날카로운 말이라 그 공간 안에 존재할 수 없다. 사실 그러면 그냥 하던 대로 입을 닥치고 있으면 되는 건데, 나는 그게 왜 힘이 겨웠을까.


지겨운 곳이라 그렇다. 병원이라 그렇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 그렇다.




쉬고 싶다. 출근해서 다행이라고 썼던가?

그래. 다행이다. 다행인 일이다. 사치스럽고 건강한 일상을 살고 있잖아, 나는. 정말로.

남의 불행을 구경한다는 건 정말 여유로운 활동이긴 하잖아. 뭘 보고 어떻게 느꼈든 이 기록 역시 결국 지난 하루가 될 것이다. 다 잊고서는 한심하게 느낄 그런 날. 그냥 들어가서 잠이나 자지 뭘 그러고 있었나, 하게 되는 날. 그리고 가끔 너무 쓸데없이 슬프다. 왜 슬픈지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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