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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omas Oct 25. 2016

Day 5. 노팅힐, 코벤트가든, 류준열, LUSH.

행운이 가득했던 런던에서의 마지막 저녁.



도착한 첫 날부터 하루도 안빠지고 마셨던 Anna의 브리티쉬 티



  토요일 아침, Anna가 만들어준 토스트와 브리티쉬 티가 조그만 부엌 탁자 위에 차려졌다. 이제 뉴스를 보면서 Anna와 함께 아침을 먹는 일이 일상처럼 느껴진다. 토스트를 몇 입 먹다가 갑자기 어제 안나가 쓴 시집에서 본 시가 생각나서 친구한테 카톡으로 보내주었다. 어젯밤에 Anna와 이별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나에게 연인과 헤어졌을 때 보면 좋은 시라며 보여준 바로 그 시였다. 제목은 ' A Shell Explodes'다. (여기서 Shell은 폭탄을 뜻함.)  


A Shell Explodes
                               - Anna -
In your head a shell explodes
when it's over
and a small piece of shrapnel
flies into the heart
and you curl up in a foetal position
pain radiating through your body
to your fingertips

and you go through the motions
of your life, smiling and talking
as if you were alive
and people think you're ok

but you know that deep down
inside
you're dead.



추적추적.. 날씨만 빼면 런던은 참 좋다.



  아침을 먹고 주말에 열리는 노팅힐의 포토벨로마켓으로 향했다. 노팅힐 역에 내리니 갑자기 날씨가 흐려졌고 비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런던 날씨는 참 변덕스럽다. 하늘이 흐렸다가 금세 맑아지고 또 갑자기 흐려지는게 일상이다. Anna가 여기는 종일 비가 내리는 일이 별로 없다고 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저번에 같이 세븐 시스터즈로 여행 갔던 친구들 중에 3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Anna와 아침을 먹고 조금 수다를 떠느라 지각했다. (가다가 화장실이 급해서 유로 공중 화장실에 들렀는데 여기서도 좀 시간을 잡아먹었다.) 포토벨로 마켓은 생각보다 꽤 큰 규모였다. 길 양쪽으로 먹거리부터 다양한 잡화를 파는 가게들, 노점상들이 쭉 들어서 있었다. 분위가는 캠든 마켓과 비슷했다. 나는 지나가다가 한 핫도그 가게 앞에서 멈춰 섰다. 핫도그 빵에 구운 양파와 소시지만 들어갔지만 기본에 충실해보이는 녀석을 골랐다. 그러나 양이 너무 많았다. 여기에 와서 느끼는 거지만, 서양인의 위가 우리보다 큰 탓인지 어디서 뭘 시켜도 양은 언제나 혜자다. 포토벨로마켓을 빠져나오려는데 한 흑인 길거리 연주자와 백인 아줌마가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었다. 흑인은 백인 아줌마에게 여기에 나 말고도 다른 길거리 아티스트들도 많은데 왜 하필 나한테 와서 여기서 공연하지 말라고 시비냐며 인종차별주의자라고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저 흑인이 하는 말이 틀리진 않다. 여행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유럽에서는 백인들이 대놓고 인종차별을 하지 못하니까 조금이라도 트집 잡을 거리가 생기면 백인들보다 훨씬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것 같다.   



핫도그 빵도 크고 소시지도 크다.



  포토벨로 마켓을 다 둘러보고 나니 어느새 오후 1시가 넘어갔다. 잠시 카페에 앉아서 커피 한 잔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명이 곧 파리로 이동해야 해서 다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남은 동행들끼리 각자 스케줄을 마치고 코벤트 가든에 모여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근처 하이드 파크에서 자전거를 빌려 쭈욱 둘러본 뒤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 쇼핑을 위해 마지막 남은 파운드를 챙겼다. 나는 한국에서부터 바버 재킷을 사려고 작정하고 있었다. 바버 재킷은 거의 유일한 유럽 쇼핑 리스트였는데 유럽에서 최대한 유러피언처럼 보이고 싶은 나의 사대주의적 감상에 따른 충동구매쯤으로 봐도 좋다. 요즘 파운드 가치도 떨어진 데다가 지금 하나 장만하면 여행 때도 입고 한국에서도 잘 입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코벤트 가든의 바버 매장에는 한국인 직원이 2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매번 물건을 살 때마다 한정된 영어 표현으로만 물건을 사다가 한국인 직원을 만나니 이것저것 자세하게 물어볼 수 있어서 너무 편했다. 마음에 드는 재킷을 고른 후 내 몸에 걸쳐봤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선 순간 내가 상상한 유러피언 감성은 온 데 간 데 사라지고 100% 퓨어한 한국인 한 명이 거울에 비쳐졌다. 역시 그들과 나는 태초부터 DNA 구조가 달랐던 것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옷은 죄가 없기에 나에게 맞는 사이즈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뒤 앉아 있었다. 그때 왠지 익숙한 얼굴을 한 남성도 주문한 옷을 기다리며 앉아있었다. 자세히 보니 류준열 씨였다. 화면보다 실물이 훨씬 더 세련되게(?) 생겼는데 시선을 의식하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다. 나는 쭈뼛거리며 말을 붙여볼까 하다가 괜히 방해하는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마침 류준열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길래 자연스럽게 인사를 했다. 굉장히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받아줬는데 사람이 참 좋아 보였다.


문제의 바버 자켓. 옷은 참 이쁜데....(sigh)



  매장 밖으로 나오니 해는 저물고 비가 다시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이건 바버 왁스 재킷의 방수 기능을 시험해보라는 하늘의 계시다.' 나는 참 쓸데없이 긍정적인 것 같다.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코벤트 가든 역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제 영국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일행 3명이 다시 코벤트 가든역에서 재회했다. 우산이 1명 밖에 없어서 3명이서 우산을 같이 썼다. 사람들 사이를 헤집으며 거리를 헤매다가 결국 쉑쉑 버거로 한 끼를 때웠다. 한 명은 라이언킹 뮤지컬을 보러 떠났고 남은 한 명과 옥스퍼드 역 쪽에 쇼핑을 하러 갔다. 아직 파운드가 조금 남아서 ZARA에서 15파운드에 회색 목도리를 하나를 샀다. 그리고 LUSH에서 괜찮은 페이스 스크럽 제품을 하나 구매하려고 발걸음을 옮겼다. 같이 쇼핑을 다닌 친구를 잠깐 소개하자면 군대를 전역하고 복학하기 전에 유럽여행을 떠나온 친구다. 전역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한창 꾸미는데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 중이었다. 갑자기 내 대학 친구 '달심'이 떠올랐다. 달심이는 OT 장기자랑에서 맡은 역할이 '달심'이어서 대학 시절 쭉 그 별명이 붙어 다녔다. 달심 역시 이 친구와 마찬가지로 군대 가기 전에는 꾸미는데 전혀 관심이 없었다가 군대 갔다 와서 혁신(?) 적인 변신을 시도했다. 결과는 꽤나 성공적이었다. 심지어 달심에서 간지 달심으로 별명이 바뀔 정도였다. 어쨌든, 그 친구에게 ZARA에서 재킷도 골라주고 내가 Lush 향수를 추천해줘서 함께 Lush 매장에 들리게 됐다. 영국의 Lush 매장은 지하까지 포함해서 3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굉장히 큰 규모였다. 매장에 들어서니 고객에게 제품 하나하나 성심껏 설명하는 Lush 특유의 열정과 유쾌함이 느껴졌다. 런던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LUSH 매장을 가 eh 활기 참으로 가득한 것 같다. 그 친구가 영어에 익숙하지가 않아 직원이 향수를 설명해주는 걸 살짝 통역해줬다. 직원이 골라준 향수를 통역하면서 스머글러스 소울이란 이름의 향수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건 정말 향이 좋은데 한국에서 너무 비싸게 판다며 직원이랑 웃으면서 잡담을 나눴었다. (한국에서 1병에 17만 원 정도 한다) 향수를 다 고르고 계산하려고 카운터에 갔는데 아까 그 직원이 잠시만 기다리라며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설마 했는데 스머글러스 소울 향수 50ml 1병을 그냥 무료로 넣어주었다. OMG. 나는 연신 고맙다며 그 직원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페이스 스크럽 제품 하나 샀을 뿐인데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었다. 그리고 작은 명함 카드에 글씨를 써서 같이 넣어줬는데 너무나 애석하게도 그 카드를 잃어버렸다. (Becky.. I'm so sorry....)



시간이 좀 많았으면 더 자세히 둘러보고 싶은 옥스포드 LUSH 매장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하루 무슨 일을 했는지 Anna에게 종알종알 이야기하는 것도 이제 마지막이었다. 오늘 포토벨로마켓에 간 이야기부터 바버 재킷 (이 재킷의 가격을 말하며 나의 보물이라고 말하니 굉장히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류준열 씨도 보고 러시 향수까지 선물 받았다며 운이 정말 좋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국에서는 여기에 머물게 된 것이 나에게 가장 큰 행운이었다는 말도 전했다. (이번엔 살짝 감동 받은 표정으로 쳐다봤다.) 정말로 이번 유럽 여행에서는 Anna를 만난 것이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직 여행이 많이 남았지만 여기서의 시간은 정말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영국 여행을 갈 계획이 있는 사람이라면 Anna를 만나보는 걸 추천한다. 그리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함께 대화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많은 것을 배울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런던에서의 마지막 밤이 아쉽지만, Anna도 피곤하다며 일찍 들어갔고 나도 그동안 계속 돌아다닌 탓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제 내일이면 이탈리아로 떠난다. 소매치기들과 노숙자들에 대한 수많은 에피소드를 들어왔던 탓인지 왠지 런던에 더 정이 가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여행길 위에는 또 다른 특별함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내일은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무서운 사람만 아니였으면 좋겠다.




런던의 마지막 밤, 옥스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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