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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omas Oct 24. 2016

Day 4. 브라이튼, 세븐시스터즈의 아름다움.

창백한 절벽, 잿빛 하늘, 끝없는 바다.


  오늘은 드디어 세븐 시스터즈를 보러 가기로 한 날이다. 런던 여행을 계획하면서 가장 기대했던 일 중 하나가 바로 세븐 시스터즈 절벽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새하얀 절벽에 서서 저 멀리 바다 에 너머로 보이는 수평선을 바라보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Anna가 차려주는 아침 식사도 거른 채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아침 9시 런던 빅토리아역, 한국 친구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일행 중에는 세븐 시스터즈를 한 번 갔다 온 친구가 있어서 수월하게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브라이튼역에 도착해서 다시 한 번 버스를 타고 세븐 시스터즈 입구에 도착하기까지 3시간이 걸렸다. 여기까지 2층 버스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리면서 둘러본 전경은 꽤 아름다웠다. 왼편은 넓은 대지 위에 작고 아담한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고 오른편엔 바다가 쭉 펼쳐져 있다. 시끌벅적한 런던에서 벗어나 한적한 브라이튼으로 오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장롱 면허지만 운전을 하고 싶어지는 도로다.



  버스에서 내려 잠시 사진을 찍으며 쉬다가 세븐 시스터즈로 향하는 들판 길로 들어섰다. 수풀 내음이 진하게 베인 바람이 불어온다. 이렇게 드넓은 초원을 걸어온 적이 언제인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휜 채 자라난 나무가 들판 위에 외로이 서 있는 모습이 문에 들어왔다. 세월의 풍파를 정면으로 맞았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 그리고 들판 위에는 양 떼들도 있었는데 자유 방목 중이었다. 온종일 먹고 싸는 일 외엔 고민이 없어 보이는 양들이 부럽기도 하다. 지뢰밭처럼 깔린 완두콩 모양의 양 똥을 피하면서 계속 걸었다. 날씨도 살짝 흐린데다가 황량한 들판을 계속 걸으니 기분이 묘했다. 이곳은 아주 다른 세상인 것 같았다. 주변에 한국인 관광객들이 있다는 사실이 현실감을 되찾게 해주었다. 한참을 걸으니 자갈밭 길 너머로 바다가 나타났다. 그리고 일곱 자매의 첫 번째 언덕으로 오르는 길이 보였다. 나는 절벽에 올라가기 전, 한동안 자갈밭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언제 어디서 봐도 늘 그대로다. 내가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듯이 바다도 아무 말도 없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들었다.


정말 고요하다. 파도와 바람 소리 뿐.



  세븐 시스터즈 언덕 위로 올라갔다. 절벽 위 언덕 위로 올라서는 순간, 장관이 펼쳐졌다. 카메라에 담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피부를 스치는 차가운 바람, 잿빛 하늘 아래 펼쳐진 황량한 들판, 그리고 저 멀리까지 굽이치는 듯한 창백한 절벽, 그 아래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잊을 수 없는 광경이다. 날씨가 흐렸지만 나는 오히려 이런 날씨이길 기대했었다. 절벽 끝에 서 있으니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졌다. 영화 Mars의 주인공 맷 데이먼이 화성에 홀로 남겨졌을 때 느낀 쓸쓸함이 이런 기분일까. 이른 아침에 일행 없이 혼자 여기 와보는 상상을 해본다. 이 세상에 혼자 남은 진짜 고독함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일곱개의 언덕이 있어 세븐 시스터즈라고 한다.



  세븐 시스터즈를 돌아보고 아까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갔다. 여기는 다음에 꼭 다시 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던 첫 번째 여행지였다.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서 많이 돌아다닌 탓에 몸은 피곤했지만, 정말 후회 없는 곳이었다. 런던에 오면 '뮤지컬'과 '세븐 시스터즈'는 꼭 가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런던에 와서 몇몇 친구들과 같이 하이드 파크 근처에 있는 '버거 앤 랍스터'에서 저녁을 먹었다. 밤에는 오늘 여행했던 사람들끼리 MOS라는 유명 클럽에 가서 놀기로 했었는데, 다들 피곤한 탓인지 약속이 흐지부지 됐다. 나도 마찬가지로 집에 들어가니 바로 다리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 방 소파에서 60년대 음악을 들으니 그 시절에 가 있는 기분이다.




  비록 클럽은 못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Anna가 최신 클럽 사운드 못지않은 60~70년대 영국 락밴드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Anna는 집에서 흑백 화면으로 된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었는데 영국 유명 밴드들의 공연 영상들이었다. 클럽보다 Anna와 거실에서 옛날 영국 락 음악을 감상하는 게 훨씬 잘 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엔 비틀스, 롤링 스톤즈만 있는 게 아녔다. Anna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유명 브리티쉬 밴드들을 쭉 열거해줬는데 사실 기억이 다 나진 않는다. Anna는 젊은 시절부터 Rock spirit이 충만한 락 광팬이었는데 비틀즈의 거의 모든 노래의 가사를 다 외우고 있다고 했다. 물론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모든 밴드의 노래들도 전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요즘 Rock은 너무 다듬어졌다며 (so perfected) 듣지 않는다고 했다. 날 것의 느낌이 살아있는 예전 음향가 진정한 록이라며 영국 락 밴드들의 스토리를 쭉 설명하는데 마치 설교를 당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씻고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이제 영국에 머물 수 있는 날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벌써 떠나기가 아쉬운 마음이다. 런던도, 이 집에도 더 오래 머물고 싶지만 결국 나는 이탈리아로, 또 한국으로 언젠가는 돌아가야 한다. 아직 여행은 많이 남았지만, 런던에서의 추억만큼은 정말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졸리지만, 왠지 더 깨어있고 싶은 마음에 자기 전에 담배를 한 대 피웠다. 그리고 Anna에게서 전해진 락 스피릿이 충만한 상태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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