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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omas Oct 20. 2016

Day 3.  낯선 곳, 익숙한 '정'

어디에서나 정은 존재한다!





 
  런던 3일 차, 오전 10시부터 열리는 캠든 마켓에 가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일찍 일어나서 Anna와 함께 아침을 먹고 뉴스를 좀 보다가 9시를 넘겨 밖으로 나왔다. 캠든 마켓은 여러 가지 음식들과 각종 잡화, 옷들을 싸게 파는 시장으로 많은 런던 사람들이 애용하는 곳이었다. 마켓을 쭉 둘러본 후에 곧바로 대영박물관으로 향했다. 대영박물관은 영국이 그동안 얼마나 약탈을 많이 자행해왔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만큼 세계 각지에서 수집된 진귀한 물품들이 소장되어있다. 안내 데스크에서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빌려 주요 소장품만 보는 데만 3시간 정도가 걸렸다. 시간만 허락된다면 좀 더 자세히 둘러보고 싶을 만큼 흥미로운 전시물들이 많았다. 가장 눈에 띄었던 건 예수님이 썼던 면류관의 가시를 보관한 보석함이었다. 보석함 주위로 열두 제자의 형상이 새겨져 있고 상단엔 두 명의 천사들이 하나님을 보좌하고 있다. 다양한 보석들로 꾸며진 이 함은 기독교에서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진귀한 물건이라고 했다. 유럽 전역에는 기독교와 관련된 수많은 건축물과 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성경을 모르면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메시지들이 많다. 예전에 성경 공부를 1년 반 정도 한 것이 아주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  



가운데 갈색 이쑤시개 처럼 보이는 것이 면휴관의 가시다.



  대영박물관을 빠져나오니 어느새 오후 4시 , 나는 런던 시내를 둘러보기 위해 다시 자전거를 빌렸다. 오늘은 자전거를 타고 빅벤에서부터 타워 브리지까지 달려보기로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있었다. 템스 강도 한강처럼 자전거 도로가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존 계획과는 다르게 자전거를 타고 타워 브릿지까지 차도로 달리기로 했다. 가뜩이나 런던 지리도 모르는데 안전 장비도 없이 느려터진 대여 자전거로 차조를 달려야 한다니. 재밌을 것 같았지만, 한편으론 좀 무모해 보였다. 그래도 일단 가고 보자는 심정으로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런던의 자전거 대여 시스템은 어플리케이션을 제공해서 타워 브릿지 근처의 대여소를 중간마다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길 위에서 핸드폰을 볼 시간이 없어서 대충 방향만 보고 무작정 가다 보니 어쩌다 런던의 강남인 시티 오브 런던에 들어서게 됐다. 때마침 퇴근 시간대와 겹쳐서 자동차, 자전거, 버스가 도로를 꽉꽉 채우고 있었다. 길거리엔 넥타이 부대들이 성큼성큼 걸어 다녔는데 직장인은 한국이나 영국이나 직장인의 모습은 비슷한 것 같다. 우여곡절 끝에 타워 브리지에 도착했다. 3시간 가까이 자전거를 타고나니 이미 시간은 7시가 넘어선 뒤였다. 자전서를 반납한 뒤 근처 상점에서 맥주 1캔을 사 들고나니 비로소 푸른 빛이 감도는 타워 브릿지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맥주를 마실 땐 화장실이 주변에 없다는 점을 기억하자



  유유히 흘러가는 템스강 위로 도심의 불빛이 아롱거린다. 타워브리지에서 바라본 런던의 야경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한참을 서서 런던의 밤을 즐기고 나서 다시 빅벤까지 템스 강을 따라 터벅터벅 걸어갔다. 온종일 박물관을 돌아다니고 자전거까지 타서 지칠 만도 한데 발걸음은 사뭇 가벼웠다. 오늘 저녁엔 한국인 동행 무리와 모임이 있었다. 유럽 여행을 하다 보면 유랑 같은 커뮤니티에서 한국인들끼리 모여서 어울리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낮에 게시판에 올라온 동행 모임에 참여 의사를 밝혔는데 모두 8명의 사람이 모이기로 했다.
  런던브릿지에 갔다 오느라 조금 늦게 도착한 약속 장소에서는 이미 자기소개와 나이를 말하면서 암묵적인 서열(?)을 정하고 있었다.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고 대부분이 20대 중반이었다. 사실 나는 먼저 나이를 물어보지 않는 한, 나이를 말하지도 물어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한국에선 아무래도 존대 문화가 있어서 여러 사람이 모일 때, 나이를 공개한 뒤에야 비로소 순서가 정해지고 각자에게 맞는 포지션으로 위치는 과정을 거치는 것 같다. 아무튼, 코벤트 가든 쪽에 위치한 바에서 8명이서 와인 1병을 시켜 서로 나눠 마셨다. 이곳에 동양인은 우리밖에 없어 보였다. 어울리다 보니 어느덧 친해진 사람들도 생겼다. 내일 브라이튼에 있는 세븐시스터즈에 다 같이 놀러 가기로 약속까지 했다. 한국인의 정은 외국에서 더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다들 처음 볼 땐 조금 어색했지만, 여행이란 공통 주제로 실컷 떠들고 나니 술자리를 마칠 때쯤엔 모두 금세 친해져 있었다. 사람들 중엔 대학을 다니다가 휴학하고 온 사람, 군대를 전역하자마자 여행을 떠난 사람, 이미 몇 년째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여행 중인 사람, 나처럼 직장을 그만두고 잠시 여행 온 사람 등등 저마다 사연이 있었다. 여행이란 목적 아래 똑같은 길 위에 마주친 사람들. 그리고 다시 각자의 길로 흩어지고 또 어딘가에서 만나는 것도 여행의 또 다른 정의가 아닐까. 잠시나마 그들의 사는 세상을 들여다보면 참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음을 느낀다. 런던에 와서 처음 마시는 술이어서 그런지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술을 잘 못 마시지만, 나름 기분 좋게 마실 수 있었다. 술기운이 오른 상태로(그래 봤자 포도주 2잔에 맥주 1캔이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피커딜리 라인에 몸을 실었다.  


빈깁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니 Anna는 소파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무슨 불상 경첩 같은 물건이었다. Anna는 불교 신자였다. 나에게 이거 어떠냐고 물어보길래 뭔가 엉성하게 만든 것 같았지만, 정말 예쁘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서 오늘은 밖에서 뭘 하고 돌아다녔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저녁에 집 들어와서 Anna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너무 편안하고 좋다. 나도 나중에 자녀를 키우게 된다면 꼭 대화를 많이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오늘 아침에 들른 캠든 마켓, 대영박물관에서 본 유물들부터 저녁에 한국인 친구들을 새로 사귀게 된 이야기까지 쭉 늘어놨다. 자전거를 타고 3시간 돌아다닌 이야기도 했는데 Anna는 위험하니까 절대로 타지 말라고 했다. 런던에서는 도로 위에 자전거 사고가 잦다고 자신도 자전거를 몇 년 전부터 안 타고 다닌다고 했다. 덧붙여, 내가 자전거 사고로 사망해서 한국에 있는 부모님께서 런던까지 오게 하고 싶지 않으면 절대 타지 말라고 아주 신신당부를 했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모습이 영락없이 친할머니 같다. 오늘은 한국과 런던에서 모두 정을 느낀 것 같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그 감정을 '정'이라고 표현할 뿐,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간애'를 가질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한창 수다를 떨고 나니 새벽 1시가 넘어갔다. Anna도 졸리다며 자러 들어간다고 했다. 술기운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왠지 모를 따듯함에 푹 잘 수 있을 것만 같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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