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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omas Oct 18. 2016

Day 2. 색안경.

선입견에 대하여


데이 시트 사러 왔다고 하면 알아서 좋은 자리를 골라준다.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런던에 도착한 첫날부터 굉장히 지쳐있었던 탓인지 꿈도 안 꾸고 푹 잘 잤다. 시차 역시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은 라이언킹 뮤지컬 Day-seat를 구하기 위해 일찌감치 일어나야 했다. Day-seat는 공연 당일 남는 좌석을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는 티켓이다. 영국에 가면 반드시 뮤지컬을 보라고 해서 무엇을 볼까 고민하다가 라이언킹을 선택했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라이언킹 애니메이션을 무척 좋아하기도 했지만, 우선 전반적인 이야깃거리를 알고 있는데다가 영어 대사가 어려운 편이 아니어서 극을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인기 있는 뮤지컬의 Day-seat를 구하려면 매표소가 오픈하는 10시 전에 미리 줄을 서야 한다. 아침 9시를 좀 넘겨서 코벤트 가든의 Lyceum 극장에 도착했다. 이미 많은 한국인이 줄을 서고 있었다. 아마도 네이버 후기의 영향이 큰 듯싶었다. 마침 한 한국인 아저씨가 내 뒤에 줄을 섰고 자연스럽게 말문을 터놓기 시작했다. 먼 타지에서 첫 한국인과의 대화가 내심 반가웠다. 이 분은 부인과 자녀 2명을 데리고 유럽 여행 중이셨는데 독일에서 자동차를 빌려서 여행하고 영국으로 넘어오셨다고 했다. 이때 Anna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없어서 전화했다며 어디에 있느냐고 했다. 오늘은 어디 어디 가냐며 챙겨주는 모습이 정말 친할머니 같다. 시간은 어느새 10시가 되었고 G 열 복도 쪽 좌석을 25파운드에 예매했다. 정말 저렴하고 좋은 자리를 맡아서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극장 밖으로 나와 발걸음을 옮겨 트래펄가 광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내셔널 갤러리를 구경하고 자전거를 빌려 런던 시내를 돌아다닐 예정이다.

The ambassardors, Hans holbein. 1533.



  내셔널 갤러리는 듣던대로 방대한 미술 작품을 전시해놓고 있었다. 15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탄생한 작품들은 지금 이 시대에도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는 느낌이었다.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빌려 내셔널 갤러리 대표작들을 찬찬히 둘러보는 데만 3시간이 걸렸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The Ambassadors라는 그림이었는데 Hans Holbein이 그린 그림이었다. 그림 양옆에 서 있는 두 사람은 프랑스의 지성인이었던 실존 인물들의 초상화고 가운데 보이는 여러 물건은 1533년 작품이 그려진 당시에 지성인들이 추구하던 지식, 교양을 대표한다. 그리고 작품 아래쪽에는 해골이 그려져 있는데 세상의 모든 것들은 영원하지 못하고 늘 우리 곁에는 죽음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 그림을 그린 작가도 결국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언젠가 모든 것들은 사라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진정한 삶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그림의 메시지가 지금의 나에게 더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니 살아있는 지금을, 이 여행을 더 즐겨야겠다.


런던에서 자전거는 진짜 자전차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빠져나와 자전거를 한 대 빌렸다. 런던 1,2존 곳곳에는 Santander Cycles라는 자전거 대여소가 있다. 1시간에 2파운드, 30분 이내에 반납하면 무료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런던에 머물면서 실컷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녔다. 런던은 서울에 비해 큰 도로가 별로 없고 차들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면적 대비 인구밀도가 더 낮아서 그런 것 같다. 도로는 2차선, 3차선이 대부분이어서 자동차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도 큰 위협은 없었다. 런던은 인도 위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을 철저하게 금지하는 분위기인데 자전거를 타려면 항상 도로 위에서 차들과 함께 달려야 했다. 그래서 이따금씩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다는 앰배서더의 의미를 체감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빅벤이다. 런던의 상징인 빅벤은 오후의 태양에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런던의 역사와 함께해온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현대의 모습이 어우러져 런던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자전거로 한참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오후 5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뮤지컬을 보기 전에 누군가와 같이 저녁을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유명 커뮤니티인 유랑에 동행 게시판을 확인했다. 마침 나와 같은 뮤지컬을 보는 사람이 있어서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숫사자를 연기하는 몸짱들이 많이 나와서 괜히 위축된 기분이다.




  극장앞에서 6시에 보기로 했는데 6시 15분이 지나고 있었다. 입구는 나 처럼 누군가를 찾는 표정을 한 사람들로 붐볐다. 뒤늦게 똘망 똘망한 남학생이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휴학을 하고 유럽 여행 중인 이 친구는 내년에 4학년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취업에 대한 걱정도 많았고 내가 벤처 기업에 다녔었다고 하니까 이쪽 업계에 대해서도 궁금해했다. 요즘 대학생들 역시 4년 전에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취업'. 정말 어렵지만 20대에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하나의 관문처럼 돼버렸다. 나 역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취준생이나 다름없겠지. 순간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지만, 눈앞에 스테이크와 파스타 덕분에 금방 잊을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극장으로 가려는데 길을 헤매는 바람에 15분 늦게 입장했다. 라이언킹은 한창 공연 중이었는데, 심바가 하이에나들이 사는 금지된 구역에 가고 싶다고 무파사에 조르는 대목이었다. 런던에서 본 라이언킹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무대, 조명, 연기, 노래, 모든 것이 내가 여태껏 본 뮤지컬의 수준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뮤지컬을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이정도 퀄리티의 뮤지컬을 겨우 25파운드에 봐도 될까 싶을 정도로 입이 떡 벌어지게 하였다. 이런 좋은 공연을 눈앞에 두고 (시차 적응을 못 해서인지) 옆에서 꾸벅꾸벅 조는 한국인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공연은 성황리에 끝났다. 줄지어 나가는 사람들 틈 사이에 껴서 겨우 극장 밖으로 나갔다. 같이 간 친구랑 방금 본 뮤지컬에 대한 칭찬을 쉴 새 없이 늘어놓고 있는데 한 노숙자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한국에서 만난 노숙자들과는 다르게 굉장히 당당한 자세로 우리에게 잔돈이 있는지 물어봤다. 난 돈이 없고 이 친구도 돈이 없다고 말하니까, 넌 그만 말해 이 친구가 직접 이야기하게 내버려둬 라고 했다. 돈이 있어도 어차피 안 줄 거긴 했지만, 더더욱 주기가 싫다. 옆에 동행하던 친구도 역시 돈이 없다고 하시까 알 수 없는 욕설을 뱉으면서 홀연히 사라졌다. 뭔가 기분은 더러웠지만, 유럽 여행을 하다 보면 노숙자에 얽힌 에피소드 하나쯤은 당연히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하며 코벤트 가든 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동행하는 친구와 작별인사를 하고 내 집으로 돌아오니 11시 정도 되었다. Anna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늘 있었던 일에 관해서 이야기하다가 집에 오다가 만난 노숙자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오늘 나쁜 사람(bad person)을 만났다고 하니까 무슨 일이냐고 했다. 그리곤 아까 있었던 일을 Anna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그녀가 격하게 공감을 하면서 별일 없이 돌아와서 다행이라는 대답을 기대했다. 그런데 Anna는 "What do you mean, 'bad person' How can you say that he is bad?"라고 했다. 나는 그 노숙자가 굉장히 화난 표정으로 알 수 없는 욕까지 내뱉고 갔다고 했더니 Anna가 말했다. 집이 없고 가난해서 그런 행동을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순 없다고.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 했다. 순간 멍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선입견을 품고 그 노숙자를 판단한 것이다. 선입견은 나쁜 것이라고 어렸을 때부터 배웠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보이지 않는 색안경을 쓰고 살아왔던 게 아니였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Anna에게 또 다른 교훈을 얻은 저녁이었다. 이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북한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Anna가 지금 북한 통치자 이름이 뭐였는지 묻자 나는 조금 고민한 끝에 이 말을 내뱉었다.


"김정은 and... He is a bad p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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