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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omas Oct 17. 2016

Day 1. 런던의 첫인상.

여행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20161014 런던에 대한 첫인상은 차가웠다. 그것은 아마도 무표정한 얼굴을 한 입국 심사원이 나에게 정통 브리티쉬 발음으로 'Hello?' 인사를 건네는 순간부터 시작된 것 같다. 그는 나에게 여기 온 목적이 뭐냐고 물어봤다. 나는 마치 예상했던 문제가 시험지에 나온 것처럼 대답했다.

"sightseeing."

그러자 그가 "그러니까 어디서 뭘 할 건데?"라고 물었다. 런던에 며칠 있는지, 숙소는 어딘지까지 물어보는 건 괜찮았는데 구체적인 여행 스케줄까지 물어보다니.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도 구체적으로 계획한 게 없어서 어디서 뭘 할 건지 나도 궁금해 그러니까 씨발 적당히 하고 그만 들여보내 줘 라고 말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서 대충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빅벤, 대영박물관, 내셔널 갤러리, 심지어 계획에도 없는 해리포터 스튜디오도 갈 거라고 했다. 이후 몇 가지 질문을 더 대답한 후에야 나는 겨우 출국장으로 갈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두세 개 질문만 받고 넘어갔다는데 무슨 취조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문득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불김함은 어김없이 적중했다.

  장시간 비행 후 내리자마자 까다로운 입국 심문(심사가 아니라 심문으로 표현하고 싶다)까지 받고 나니 나의 몸과 마음은 완전히 지친 상태였다. 입국 심사장을 빠져나와 짐을 찾고 출구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는데 이번엔 세관원이 나를 불러 세웠다. "이거 담배 아니냐? 잠깐 따라와." What the hell. 런던은 입국 시 담배를 1보루 이상 가지고 들어오면 안 된다. 그 규정을 몰랐던 나의 오른손에는 면세점 봉투에 담긴 담배 2보루가 당당히 들려있었다. 그제야 담배 허용치가 2보루가 아니라 1보루였다는 것을 직감했다. 나는 복도 옆에 짐 검사대로 열외 했다. 그곳엔 차가운 수술대같이 생긴 철제 테이블이 몇 대 있었는데 그 위에 자신의 캐리어를 올려놓고 배를 가르는 사람들의 얼굴은 나와 같은 표정이었다. 그 세관원은 가방에 또 담배가 있는지 물어보면서 캐리어 이곳저곳을 열어서 확인했다. 그리고선 2보루 모두를 폐기하겠다며 이제 가도 좋다고 했다. 2보루를 모두 다 가져간다고 해서 좀 어이가 없었지만, 런던 첫날부터 괜한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아 그냥 넘어갔다. 그리고 나서야 겨우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출국장 밖으로 나와 오이스터 카드와 핸드폰 심 카드를 구매한 뒤에 숙소로 가는 지하철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도 런던에 도착하지 않은 느낌이다.



Turnpike역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보인 버스


  나는 런던에서 지낼 숙소로 1,2 존 중심가에서 멀어진 3 존에 위치한 에어비앤비를 선택했다. 왜 1,2존이 아닌 3존에 숙소를 잡았는지 의아해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왜냐면 런던의 주요 관광지는 다 1,2존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그곳에 숙소를 정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2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번화가가 아닌 실제 런던 사람들이 많이 사는 주택가에서 영국인과 살아보고 싶었고 두 번째는 이 곳의 에어비앤비 후기가 너무 좋았다. 어쨌든, 히드로 공항역에서 1시간 30분 정도 지하철을 타고 Turnpike Lane역에 내렸다. 출구 밖으로 나가자마자 런던의 2층 버스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진짜 런던에 온 것 같은 기분이다. 길거리 위의 낯선 노숙자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밤길을 헤매었다. 구글 지도를 보고 가다가 핸드폰이 꺼져버렸다. 머리 속에 남아있는 지도를 그리며 겨우 겨우 에어비앤비 숙소 앞에 도착했다. 사진에서 보던 빨간 저택을 보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5A 초인종을 누르니 쇼트컷이 인상적인 한 영국 할머니가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맞이해주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나의 에어비앤비 호스트의 이름은 Anna다. 시인이자 작가인 그녀의 나이는 60대 후반, 70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숙소에 지내면서 그녀의 나이는 물어보지 않았다.) 좁은 복도를 지나서 내가 지내게 될 방으로 들어갔다. 노란 스탠드 조명과 함께 2개의 소파와 테이블, 작은 정원으로 연결되는 창문까지 갖춰져 있는 굉장히 아늑하고 넓은 방이었다. Anna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서 나에게 브리티쉬 티를 대접했다. 그리고 나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국적부터 나이, 직업 등등 하나하나씩 대답하다 보니 문득 영어 회화 학원에 온 기분이었다.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나는 오늘 공항에서 있었던 일, 회사를 그만두고 유럽 여행을 떠난 일들을 이야기했다. Anna 역시 70년대 영국 이야기부터 전 직장, 전 남편 이야기, 인도 여행기 등등 개인적인 경험담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쓴 책과 시도 보여줬는데 그중에는 노숙자와 대화를 했던 일이라던지, 택시를 탔는데 택시 기사가 힘들어 보여서 차를 대접한 내용도 담겨있었다. 살아오면서 정말 다양한 일들을 겪어온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부엌에서 같이 롤링 타바코를 말아서 피울 때 즈음 이미 3시간 가까이 시간이 지나있었다. 그만큼 Anna와 나의 사이도 가까워졌다. 첫날이었지만 마치 친할머니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본적인 이 집의 규칙에 대해 교육을 받는 것을 끝으로 나는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이 곳에 묵기를 정말 잘 한 것 같다. 어쩌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들보고 대화하는 것이 여기서 보게 될 랜드 마크보다 더 값진 무언가를 가져다주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런던은 나에게 차가운 첫인상을 주었지만, 지금은 이 이불속처럼 굉장히 따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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