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 보라매의 겨울
보라매의 겨울
2017년 12월, 올 처음 한강에 결빙이 생긴 날. 보라매 병원 희망동에는 햇볕이 별로 들지 않았다. 나는 1층 편의점에서 간단한 먹거리를 샀다. 그리곤 로비 벤치 중 아무 빈자리에 털썩 앉았다. 뒤쪽엔 중간중간 크리스마스트리가 무심하게 배치되어있었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성탄 장식과 조명 패턴들. 나름 이곳에서도 한 해가 그럭저럭 지나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입원 내내 왼뺨 전체에 찰떡처럼 붙어있는 드레싱은 뭘 먹을 때마다 꽤 성가시다. '그레이스'는 이걸로 입원 후 4통 째인가. (나는 당신이 '그레이스'가 얼마나 훌륭한 주전부리인지 알기 원한다.) 여기에 입원하기 일주일 전, 집 근처 슈퍼에서 그레이스를 찾다 찾다 못 찾아서 다른 과자를 집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신세로 먹게 될 줄이야. 이곳 편의점에서 '그레이스'를 발견한 건 말 그대로 은총이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은 항상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되곤 한다. 때론 그 전개 속도가 너무 급박하고 빨라서 새로 맞이한 국면에 꽤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나의 지난 연애의 끝이 그랬듯이 이 질병은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나를 찾아왔다. 순식간에 어두워진 내 눈은 앞에 무엇이 있을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나는 지난주 봉와직염으로 보라매 병원에 입원했다. 봉와직염은 급성 세균 감염 질환으로 모낭이나 상처를 통해 생긴 피부에 세균이 빠르게 침투해 생기는 염증이다. 무좀이 있는 발에 걸리는 것이 일반적이나 얼굴이나 등, 모낭이 있는 곳이면 신체 어디든 발생할 수 있다. 2017년 내 인생의 클라이맥스를 선사해준 봉와직염. 반쯤 정신을 놓고 살던 나에게 그 상처의 아픔만큼이나 깊은 사색을 안겨준 이 병을 기록하기 위해 나는 오늘 펜을 들었다. 조금 더 빨리 글을 쓰고 싶었으나 생생한 현재의 아픔을 다시 머리로 되새기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작업이란 굉장히 괴로운 일이었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병상일기를 쓰고 있는 위대한 누군가에게 경의를.) 그래서 나는 상태가 어느 정도 호전된 입원 9일 차가 돼서야 글을 쓸 정신이 들었다.
아마 군대를 갔다 온 남자라면 봉와직염에 대해 잘 알 것이고 그중 몇몇은 실제 이 병에 걸려본 적도 있을 것이다. 혹자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그게 그렇게 유별난 병인가?"
사람마다 고통의 크기는 다르지만 왼쪽 뺨에서 시작된 염증이 또 다른 종기를 만들면서 뺨 전체로 퍼져나갈 때,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는 고름찬 얼굴을 보며 감수해야 하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겪어보지 않으면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조선시대 왕이 무엇으로 가장 많이 죽었는지 아는가? 바로 '종기'다. '종기'는 한의학적 용어로 뜻을 풀이하자면 기가 부풀어 올랐다는 뜻이다. 그 부푼 곳이 어디냐에 따라 암, 대상포진, 봉소염 등 다양한 곳에 다양한 형태를 띤 증상으로 나뉠 수 있고 하나로 묶어 종기라고 한다고 한다. 어쨌든 하루에 5끼를 먹는데 운동할 시간도 없이 하루 종일 앉아서 격무에 시달리고 스트레스를 받던 조선의 왕들은 지금 현대인의 삶과 많이 닮았다. 만약 지금까지도 항생제가 없었다면 한국의 수많은 직장인들이 봉와직염으로 생사를 오가는 게 결코 어이없는 발상은 아닐 것이다. 옛날엔 종기는 한 번 나면 죽을병으로 취급받았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명의들도 막지 못한 왕의 종기를 일반 백성들은 어떻게 감내했을까 싶다. 아마 종기가 패혈증으로 이어지고 시름시름 앓다가 눈을 감는 일이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간혹 사극 드라마나 영화에서 배우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종기로 몸져누워 있는 장면들이 떠오른다. 나는 이제 그들의 고통이 어느 정도였을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2화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