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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년필 Feb 24. 2022

도시에서의 작은 기억

그 속에서 흐르는 사람들

 사람들이 강물처럼 흐르고 그 위에 도시가 비추는 아득한 날이었습니다. 그 속에 흐르는 고기떼와 같은 나의 기억들과 그들의 기억들은 흐르고 넘쳐서 비가 되어 내렸습니다. 빨강, 파랑이 흐르고 강물 위에는 도시가 비추는데, 나부끼는 물결은 자신의 발걸음을 무겁게 지고 올랐습니다. 지금 보니 우리도 똑같은 걸음으로 가고 있더군요. 앞사람의 입김이 내 가는 길에 안개를 남기고 갔습니다.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둠침침한 골목이 나왔습니다. 그때 스치듯이 그 사람의 얼굴을 봤었어요. 분명해요. 그 사람의 옆얼굴을 저는 또렷이 기억하거든요. 날아가는 새의 꽁무니를 이어 그린 듯한 곡선의 긴 속눈썹, 불빛에 비춰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눈동자, 숨을 들이쉴 때 살짝 벌어져 하얀 이를 감싸 안은 입술들, 그 두 포옹하는 팔 같은 입술들. 저는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비 냄새 속에 섞인 연기 냄새를 지나 그 사람의 얼굴이 버스 차창에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잡아내었으니까요. 버스 번호를 외워 마트 반환 창구에 놓여있는 펜으로 휘갈겨 썼습니다.

 '32우 5892'

 그렇게 마트 직원들의 의아하면서도 무표정한 얼굴들을 뒤로하고 저는 다시 밤 아래로 들어섰습니다. 발걸음 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먹먹하게 울려오는데 제 손에 쥐어진 종이는 제 온기를 닮아 따스하게 빛나는 듯했습니다. 그 빛나는 종이가 차갑게 내려다보는 도심의 눈초리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는 듯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은 맑았습니다. 그럼에도 어젯밤 같이 걷던 신발이 젖은 채로 웅크려 있길래 저는 불편한 신발을 구겨 신고 터미널로 찾아갔습니다. 네, 어제 그 버스를 찾으려고요. 그 사람은 이미 내렸을 텐데라고 생각하겠지만 제게는 더 이상 그런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삶의 시간 속에서 스쳐가는 사람들은 흐르는 냇물 같아서 이 바위를 조금 만지고 저 이끼를 조금 쓰다듬고 하면서 내려갑니다. 나도 그렇고 다른 이들도 그렇게 흐르기 때문에 내가 바위면 당신이 물살이고 내가 물살이면 당신이 바위처럼 보이겠지요. 저는 이 태평한 날의 바람처럼, 하늘로 높이 높이 치솟는 바람처럼 흘러가는 것들에 연연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한때 제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 사람과의 시간은 아직 중요합니다.

 바람 속에서는 날아가고 스쳐가는 것만 나를 둘러싸서 아무것도 얼굴을 맞대지 못하고 아무것도 붙잡고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그때 내 손목을 잡아당기던 사람이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한때 제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때 그 바람 속의 고요를 나는 한 장의 사진처럼 시간을 멈추고 바람을 멈춘 채로 마음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흐르는 것 속에서 그렇게 멈춰있는 것을 찾기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게 내가 연연하는 이유입니다. 흘러가는 강물 속에 멈춰진 자갈들을 그러쥐고 있습니다.

 나는 다시 걷습니다. 도시는 차가운 햇빛 속에 둘러싸여 눈을 번쩍입니다. 그 광채에 휩싸인 나는 차가움에 겉옷을 감싸 안습니다. 도시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지만 그 어떤 인연도 흘러가기에 붙잡기 버겁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 아래에 붙여져 있는 오래된 침묵 한 장 덕분에 잘 살고 있습니다.

 터미널은 유리 새장 같습니다. 그 바깥 주차장에는 길게 뻗은 버스들이 누워있겠지요. 나는 32우 5892를 찾아 조용히 올라탑니다. 그리고 조용히 그 자리를 빠져나갑니다.


 버스 위에 올라타면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멀리 건너편을 바라보고 어떤 이들은 지나가는 이들을 바라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땅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미소 짓습니다. 오늘도 도시는 바라보는 시선들과 그 아래 자유로운 움직임들로 흘러갑니다. 흘러가는 인연들 속에 씻겨지고 멈춰 선 몇몇에 의해 가라앉고 닻을 내립니다. 그렇게 흘러가는 게 도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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