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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그리엄마 Nov 29. 2019

엄마 과학자 생존기 - 14

셀프 육아휴직이 과학자에게 미치는 영향

14. 셀프 육아휴직이 과학자에게 미치는 영향



백수가 되었다. 심지어 남편하고 세트로...

그간 모은 적금도 있었고... 구직급여도 있었고..

(비자발적 퇴사여서...)

퇴직금도 있어서 당분간 버틸 순 있겠다고 계산을 끝낸 뒤 우리는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일단 이력서를 뿌리면서 놀기로 했다. 아이와 함께 노는 것을 우리의 새로운 목표로 설정했다.


사실 우리는 그간 아이와 같이 무언가를 해본 기억이 적었다.

연구직 특성상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왔고...

그래서 온전히 아이를 케어할 수 없어서 하원 도우미 이모님의 도움을 받았었다.

연구자에겐 부모의 역할보다 중요한 게 실험이란 인식이 강한 세계에 있다 보니 정시 퇴근하여 아이를 픽업하는 것은 사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타인의 노동으로 대신했다.

(그래 버는 족족 돌봄비용으로 소진했다...)


그러한 이유로 땡그리는 옹알이도, 뒤집기도, 걸음마 연습도 우리가 아닌 어린이집 선생님들과 이모님을  통해 습득했다. 놀이터에 가면 미끄럼틀을 제일 좋아한다는 것도, 또 그네 탈 때 너무 높게 밀어주면 싫어한다는 사소한 아이의 성향도 이모님과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


열이 난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지 못하여 이모님과 병원에 가거나 혹은 어린이집 원장님이 대신 데려가 주신적도 있으니 우린 딱히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가 정확할 듯하다.


회사를 때려치운다고 결정을 하게 되자 우리는 그간 해보지 못한 엄마 아빠로 온전히 있어보고 싶어 졌다. 땡그리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어 진 것이다.


어린이집 선생님들이나 이모님은 우리 아이가 잘 참는 아이라 했다. 이분들의 말씀에 의하면 대부분 맞벌이 가정의 아이들은 크게 두 가지의 행동을 보이는데

 번째는 부모의 관심을 받기 위해 돌출 행동을 많이 보이거나

 번째는 땡그리처럼 “착한아이가 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누른다고 했다.


당시 땡그리는 만 3세였다.

말은 곧잘 하는 아이였으나, 여전히 말보다는 입이 먼저 나가서 상대를 깨물던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과 굳이 다른 점을 꼽아본다면 어린이집 등 하원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순조로운 편이었고

 (뒤집어지진 않았음...)

엄마 아빠가 바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어서 “엄마 바빠?” “아빠 바빠?” 를 말끝마다 붙이는 정도?.....

조르지 않았다. 어른들의 감정에 민감하여 목소리 톤이 달라지면 눈치를 살폈고, 자신의 고집을 부리는 일이 적었다.


미운 3, 죽이고 싶은 4살이라는데  정도까지 아이에게 살심을 품을 만큼 크게 싸우지 않았다.


궁금했다.

우리 아이는 그냥 원래 그런 성격인건지...

아니면 주양육자인 엄빠가 너무 바빠 우리에게 응석 부릴 시간이 없던 것인지....

어쩌면 우리가 과학자, 연구자라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땡그리가 “아이다움”을 포기하게 만든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그래서 놀기로 했다.

실제 회사를 다니면서는 절대로 신청해보지 못할 육아휴직을 셀프로 써보기로 결심했다. 있는 돈을 다 털게 될 수 있지만, 돈 떨어지기 전에 취업은 되겠지...라고 위안을 삼았다.


엄마 아빠가 회사에 가지 않고 아이와 함께하자 아이는 급속히 변해갔다.

아침 일찍 8시에 등원해야 했던 아이는 9시 반까지 등원 시간을 조정할 수 있었다. 늦게까지 잠을 자기 시작하자 아침에 무언가를 먹기 시작했다. 그전에 바쁘던 아침시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다. 눈도 뜨지 못한 아이를 씻겨 옷을 갈아입히고 안고 뛰던 시절과 비교하면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땡그리는 입맛이 까다로운 아이였다. 너무 짜거나 시거나 하는 것을 싫어했다. 케첩을 싫어한다는 것을 이때 알게 되었다(지금은 좋아한다)

또한 아침에는 시리얼보다 빵이나 오믈렛을 찾는 꼬꼬마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밥은 찾지 않았다. 시리얼도 오레오 오즈는 먹지만 후르츠링은 싫어했다. 쵸코체스도 싫어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초코의 맛에 종류가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4시 반에 어린이집 하원을 하게 되면서 아이가 어린이집 버스를 매우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이가 카시트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 카시트의 5점식 벨트를 할바엔 어린이 버스에서 2점식 벨트를 선호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버스를 타면 맨 뒷자리를 선호한다는 것도 새롭게 알 수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도 했다. 아이는 수영장을 좋아했다. 백수인 덕에 평일에 워터파크를 가니 사람도 없고 아이도 잘 놀아서 만족스러웠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우리는 여행에서 숙소를 선택할 때 수영장의 유무를 토대로 선택하게 되었다.


동물원을 매우 좋아할 거라 생각되었던 아이는 사실 동물원보다는 수족관을 좋아했다. 수족관은 좋아했지만, 아마존 물고기의 사이즈를 보고 기절초풍을 한 덕에 큰 물고기가 나오는 곳에서는 아이를 안고 다니기도 했다. 의외로 땡그리는 겁이 많은 아이였다. 아마존 섹션에서 괴물이라 하는 아이에게 물고기는 먹는 거라 알려주니 지금은 아마존 물고기도 좋아한다. 역시 상위 포식자에겐 먹는 것과 못 먹는 것으로 비교를 해주는 것이 이해하기 쉬웠던 모양이다.


종합해보면 땡그리는 겁이 많았다.

아! 잠도 많은 아이였다.

불금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엄마 아빠가 다음날 자기와 함께 있기 때문에 잠을 안 자고 놀았던 것이었다.

잘 참는 아이가 아니라 사실 굉장한 까불이였다.

깐족거리는 것도 곧잘 했다.

건방지게 가출을 감행할 정도로 고집 센 아이였다.

착한 아이가 아닌 영악함도 가지고 있었고

생각보다 엄마와 아빠를 많이 어려워했다.

그리고 매일같이 우리에게 내일은 회사에 가냐고 물었다.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던 시기였다.

우리는 주양육자로 아이를 직접 키우겠노라 했지만 연구자라는 본업을 하느라 또 다른 본업인 부모의

일에는 소홀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우리의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조그만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또, 과학자인 엄마 아빠를 얼마나 멋지다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엄마 아빠가 바쁘기 때문에 매일 어린이집에 가고 있다는 사실 역시 땡그리는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몰아치는 죄책감은 엄청났다.

남편과 나는 아이와의 시간을 보낸 뒤에야 우리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시간을 보냈는지를 깨달았다. 우리는 우리의 커리어를 위해 아이의 유년기를 갈아 넣었던 것이었다.


비참했다.

처음의 결심과 달리 우리는 기본적인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돈만 벌었다.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에 박사를 달고 취업을 했고 또래보다 높은 직급에 높은 연봉을 받으며 아이랑 쇼핑만 잔뜩 했지 아이와 무언가를 제대로 한 적이 없었던 거다....

돈 벌어서 아이에게 풍족하게 용돈만 주면 된다는 방식은 우리 부모세대의 이야기가 아닌가....


이러한 경험이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되며 그냥 무턱대고 뿌렸던 이력서의 수를 줄였다. 다음 직장에 대해 고려할 점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한번 맛본 금단의 열매가 달콤하다 했던가...

처음으로 아이와 함께한 시간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귀한 것이었다. 이직을 하게 된다면 더 회사에 올인할 수 있도록 시부모님께 육아를 부탁하고 합가를 하겠노라 결심했던 나와 남편의 결심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연구에 올인하는 삶은 잘못된 선택지였다.

일과 가정은 같이 가야 하는 것이지 둘 중 무엇인가를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선배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고 살아가는 것을 롤모델로 삼을 이유가 없었다.


사실 자체 육아휴직을 시작하던 초에 우리 부부는 아이와의 시간을 포기하고 시댁과의 합가를 결심했었다. 궁여지책이었다. 나는 커리어를 포기할 수 없었고 우리는 둘 다 합성을 하고 싶었다. 합성에 돌아가면 또 야근이 있을 거고 그럴 때마다 나 혼자 희생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신랑은 자신의 부모를 육아에 갈아 넣고 와이프의 커리어를 지켜내고자 했다.

그게 아니라면 진지하게 수능을 다시 보려 했다.

교대나 사대나 약대를 갈까 고민하기도 했다.

아니면 연구직이 아닌 연구기획으로 갈까도 고민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현장연구를 포기하기엔 박사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었고, 실험에 손이 많이 익은 사람이며, 해보고 싶은 게 많았다. 마지막으로... 육아로 인해 어려움을 겪다가 그만두게 되는 많은 이공계 경력단절 여성의 사례 중 하나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아이 분유 먹이며 논문 쓴 세월이 격하게 억울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급여보다 워라벨을 중시하는 회사를 가기로 했다. 워라벨... 쉽게 말해 정시 퇴근이 가능한 곳을  찾아서 가자고 결정했다. 더럽게 안 끝내주는 유기합성연구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최대 7시엔 나올 수 있는 회사를 고르자 결정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둘 중 하나는 꼭 그렇게 하자고 했다.


돈은 아이의 유년기와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연구자로서의 커리어가 중요한 만큼 부모로서의 정체성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부모로서의 커리어는 사실 합성연구를 한 경력만큼 늘어가고 있다. 그 귀한 커리어를 버릴 순 없지 않겠는가.


엄마 경력 5년....

졸업 후 현장연구자 경력 4년...


비등비등한 이 경력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돈을 포기했다. 신랑보다 적게 벌게 되는 것이 너무나도 억울했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에 선택했다. 엄마를 포기하지 않은 대가로 한다면 값을 적게

치른 셈이다. (사실 이런 값을 치르게 하는 세상에 미쳤다 본다)


나같이 바둥거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길 바란다. 부모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바둥거리는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오래 살아남아 관리직에 올라가길 꿈꾼다. 그리고 우리가 선례가 되길 희망한다. 부모의 삶은 연구자의 삶과 공존될 수 있는 가치란 것이 그렇게 증명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래야 한다. 그래야 지만 훗날 땡그리에게 연구자의 삶을 추천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자체 육아휴직을 통해 나는 땡그리가 난동을 잘 부린다는 것을 알았다. 창경궁에서 난동중인 말띠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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